그리스 인생 학교

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 불과 3만 명의 아테네 시민들은 어떻게 100억보다 위대한 지혜를 자랑할 수 있었나?
-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은 어떻게 수십만 명의 적에 맞설 수 있었을까?
- 작은 섬 사모스에선 어떻게 피타고라스 이솝 에피쿠로스 등 천재들이 나왔을까?
- 그리스인들은 왜 그리스가 낳은 정복대왕 알렉산드로스에게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나?
- 아킬레스와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철옹성 트로이를 넘어설 수 있었나?
- 소크라테스는 왜 살길을 두고 독약을 마시면서도 설레고 기뻐했을까?
- 구걸로 살아가면서도 세계대왕 알렉산드로스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 디오게네스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나?

‘그 탁월함과 내적 평화, 자신감의 비밀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떠난 그리스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여행을 하며 내 안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 그것은 감동이었다.
이 달에 소개할 책은 부끄럽지만, 필자의 신간 <그리스 인생학교>다. 필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과 은혜가 된 이 여행을 마치고,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16개의 질문으로 이뤄져 있다.
나는 온전히 당신 자신이었던 적이 있는가?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나의 자유를 위해 지금의 습관을 바꿀 용기가 있는가? 어디서부터 내 삶은 길을 잃었는가? 무엇이 나의 행복을 무너뜨렸는가? …
여행자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런 질문에 답하면서 여행하는 중 내 체험과 같은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필자는 누구나 이 16가지 질문을 답하면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이 안개를 벗고 분명해지며, 내면에서 오래도록 잠자던 탁월함이 깨어나고,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상처가 내 삶을 빛내는 아우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스는 서양문명의 원류다. 미국의　문명사학자 윌 듀란트(1885~1981)는 “오늘날의 문명국가들은 모든 지적 활동 분야에서 그리스의 식민지”라고 평했다. 지상의 문명국가들은 그리스의 지식으로 길러졌다는 것이다.
또 독일의 대표적인 철학자 칸트는 “그리스라는 경탄할 만한 민족이, 희망봉을 도는 항로를 발견한 것보다 훨씬 중대한 사고방법의 혁명을 가져왔다”고 찬사를 보냈다.
영국 출신의 하버드대학 철학교수 화이트헤드는 “2000년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에 각주(풀이)를 단 것에 불과하다”고 까지 평하기도 했다.
대단한 평가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선진문명인 인도와 이집트, 페르시아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철학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피타고라스나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칭송 받는 플라톤은 이집트와 페르시아 등 방대한 지역을 여행하며 지식을 습득했는데, 그 때 인도까지 갔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이후에 등장한 알렉산드로스는 북인도까지 정복했다. 그 때 동서양 문화가 회통돼 헬레니즘 문화를 낳았다. 그 헬레니즘의 산물인 간다라미술은 석굴암 부처님의 상호에서 보여진다.
그리스는 지금은 98%가 기독교를 믿는 그리스정교회 국가다. 그 수도원에서 그들의 예배를 지켜보았는데, 시끄러운 개신교의 예배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르간 등 악기를 많이 사용하는 가톨릭의 미사와도 달랐다. 악기 없이 고요하게 같은 구절을 끊임없이 낭송하는 것이 불교의 염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를 따라간 장군이 세운 북인도 왕국의 그리스인 왕과 불교 고승간의 대화록이 미란다왕문경이다.
이 뿐이 아니었다. 독약을 마시면서도 일상의 마음과 한 치의 다름이 없었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에서 생사를 초탈한 불교 선사의 모습을 보았다. 또 “탁월함은 훈련과 습관이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라고 한 아리스토의 말 속에서 “훌륭한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업과 습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스며있었다.
우리는 늘 극락과 천국을 기대한다. 그러면서 지옥 같은 세상이 지겹도록 바뀌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바뀌지 않은 것은 세상이 아니라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그리스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바꾼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우리는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를 칼집에서 채 다 꺼내지도 않았다. 인간은 생각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래서 죽음을 부활로, 절망을 희망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뒤바꾸는 마술은 아직 무대 위에 올려지지 않았다.
우리가 원수처럼 여기는 장애가 실은 자기에게 주어진 비밀스런 소명과 의무를 깨닫게 하는 열쇠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는 태어나자마자 요람 속에서 살해 위기를 맞는다. 제우스가 다른 여자를 범해 낳은 아기를 낳자, 부인 헤라가 뱀 두 마리를 요람 속에 넣은 것이다. 아기는 두 손으로 뱀을 목졸라 죽인다. 헤라클레스란 이름은 ‘헤라를 통해 영광을 얻었다’는 뜻이다. 그는 헤라를 통해 위기와 싸우는 법을 태어나자마자 터득했고, 영웅으로 거듭났다. 그래서 삶에서 원수는 바로 은인이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은 절망적 상황에 주저앉지 않은 이들이 그리스에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하층민이자 첩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거대제국 페르시아를 살라미스해전에서 무너뜨려 그리스 황금시대를 열었다. 호메로스는 맹인이었지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써서 서양 문명을 열었고, 노예이자 곱사등이였던 아이소포스는 《우화》를 통해 어리석은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디오게네스는 노숙인이었지만 왕도 부러워하지 않는 여유를 자랑했고, 노예이자 절음발이였으나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승이 된 에픽테토스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상처에서 진주를 낳았다. 신체나 계층의 장애가 비록 불편하기는 했지만, 이런 결핍과 시련을 탁월함의 양분으로 삼은 이들이다. 인생이 빚어내는 최고의 요술은 이런 약자들이 상처를 아우라로 바꾸는 것이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에게 소크라테스와 한 끼 식사 할 기회를 준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그 식사와 바꾸겠다.”
잡스의 식탁에 소크라테스가 초대됐다면 여지없이 그 특유의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세상 사람들이 환호하고 칭송하는 것 말고, 내 내면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다른 사람들이 괴롭다는 것 말고 당신만의 고민을 물었고, 남들이 원하는 것 말고, 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했다. 또 세상 사람들이 훌륭하다는 것 말고 당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길 말고 당신이 행복해질 방법을 찾게 했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갔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신화와 철학자들의 치열한 문답을 통해, 그리고 내면의 물음을 통해 소크라테스와 같은 그리스의 현자들을 내면의 식사 자리에 초대할 수 있다.
최고의 직업은 남들이 줄 서는 분야가 아니라 내가 기쁘고 행복하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다. 최고의 짝은 미스월드나 미남 배우가 아니라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상대다. 최고의 답은 남들의 말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물음을 통해 얻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