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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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인연의 영가들을 위한 기도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여름은 본래 더운 계절입니다. 그러나 해마다 더위의 결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사흘간 전국적으로 비가 온 뒤에야 조금씩 누그러질 것이라 합니다.
계절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다가옵니다. 언제부터인가 ‘봄인가 싶으면 가을이고, 여름인가 싶으면 겨울’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겨울은 겨울대로 춥고, 여름은 여름대로 덥지만, 마음속의 불씨(心火)가 꺼지지 않아 더 덥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욕망과 물질적인 풍요만을 좇아온 삶의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출가한 지 60년, 구룡사에서 생활한 지 40년이 되었습니다. 세월은 참으로 물이 흐르듯 빠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불자들을 보살이라 함은 모든 각유정(覺有情: 깨달은 이, 깨달아 가는 이, 깨달을 수 있는 이)이라 합니다. 보살이 묻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스스로 알기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다른 이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 수보리와 부처님의 문답 또한 부처님과 수보리 존자의 경계에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질문을 대변하는 문법이었습니다.
보살에는 두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처음 발심發心한 이며, 둘째는 그 발심을 바탕으로 도를 행하여 길을 가는 이입니다. 발심은 시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불교는 우주를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삼계三界로 설명합니다.
그 중 욕계는 ‘욕심의 세계’입니다. 비유 하자면 밥을 먹으면 배부른 세계이며 그 안에 6천六天이 있습니다. 색계는 ‘물질의 세계’입니다. 냄새만 맡아도 만족하는 세계이며 그 안에 18천十八天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색계는 ‘비물질의 세계’입니다.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이며 그 안에 4천四天이 있습니다.
삼계三界안에는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간人間·천상天上의 육도六道가 있는데, 업력業力에 따라 윤회輪廻합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약 45억 년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수 있습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끝도 없이 우리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며 끊임없이 윤회해 왔습니다.
지금 법당에 모셔진 영가들은 우리와 깊은 인연이 있어 모셔진 분들입니다.
수많은 영가들이 모셔져 있지만, 그분들만 오고 가신 것은 아닙니다.
저는 늘 일문권속一門眷屬이라는 표현을 써서 축원합니다.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인데, 부모·형제·처자 권속 등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진 그 인연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가들도 부처 성품으로 보면, 불생불멸不生不滅·불구부정不垢不淨·부증불감不增不減한 자리이지만, 인연 따라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수레바퀴처럼 하고 있는 모습은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인연이 있는 영가들이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허망한 존재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거나 손에 쥘 수 없을 뿐, 그분들도 어딘가에 몸을 받아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 또한 이와 같습니다. 살아 있을 때 미리 복福과 덕德과 지혜智慧를 저축하는 일입니다. 선근善根과 지혜를 키워 보리심菩提心을 장양하는 것, 이것이 본래의 뜻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3년마다 윤달에 이러한 의식을 통해 다짐하고 믿음을 굳히는 방편을 마련했습니다. 그 깊은 이치를 잘 새기고, 수행修行과 신행信行의 삶에 실천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경涅槃經』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남을 보고 그것을 죽음으로 알지 말아라. 열반은 죽음이 아니니라.”


우리 역시 언젠가는 이 사바세계를 떠나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건강하고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오래 사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의미가 퇴색될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저녁 공양 후 잠시 쉰다는 것이 깊은 잠이 들어, 눈을 떠보니 밤 9시 이였습니다. 그대로 앉아 있기보다 도량 밖으로 나가 걸었습니다. 새벽예불 마치고 도량을 30분가량 돌아도 몸이 훨씬 가벼워집니다. 아침에 3천~5천보 정도만 걸어도 저녁에 만보를 걷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루를 방안에서만 보내다 보면 도량에서 1천보도 걷기 힘듭니다.
저는 큰길가 보행도로를 걷습니다. 신호등을 건너야 하는 일은 많지 않지만, 신호를 반드시 지킵니다. 파란불이 켜진 뒤에도 잠시 여유를 두고 건너면, 차량들도 안전하게 멈출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의가 큰 위험을 막아줍니다.
그렇게 걸으면서 스스로에게 묻기도 합니다. “이 더운 여름밤에 꼭 이렇게 걸어야 하는가?” 그러나 곧 대답합니다. “혹여 이 자리에서 몸이 다치거나 병이 나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어려움을 끼치게 된다.”
전문가에 따르면, 노년에는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7~8천보, 많게는 1만보 이상 걷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저 역시 때로는 1만5천보~2만보를 걷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고나면 도리어 몸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부처님께서 ‘내가 떠남을 보고 그것을 죽음으로 알지 말라’하신 가르침은, 열반은 곧 죽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죽음이란 육신의 소멸이며, 이 몸은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져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이나 내일 당장 닥칠 수 있는 사실은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이 화를 부르기도 합니다. 인생은 찰나처럼 흘러가며, 지구의나이 45억년,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지 2,600년 그 시간을 생각하면, 우리의 생은 얼마나 짧고 덧없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만큼은 오래, 건강하게,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 죽음을 삶의 맞은편에 두고 외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어제 염곡동 사거리의 교통사고 현황판을 보니, 서울에서는 하루 평균 50~60명이 부상당하고 있었습니다.
한 달이면 1,500명, 1년이면 18,000명에 달합니다. 그 중에는 목숨을 잃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일은 ‘설마’ 하고 미루어둘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조심하고 또 조심이 필요 합니다. 이 이유는 백중의 유래를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목련존자는 출가 전에 사업을 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습니다. 그 재산의 대부분 어머니께 드렸는데, 어머니는 인도의 샤머니즘에 빠져 살생을 일삼았습니다. 돌아가신 뒤에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이를 확인하고 부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백중날 대중 스님들과 함께 삼악도와 육도 윤회하는 중생들을 위한 천도재薦度齋를 베풀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백중의 시원이며, 자자일입니다. 우리가 백중에 지장기도하는 이유입니다.
‘백중百中’이라는 말은 한자 ‘우란분盂蘭盆’의 뜻처럼 ‘거꾸로 매달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고통의 상태를 비유하는 말입니다.
오늘은 이 의미를 다시 새기며, 조선시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와 동시대에 살았던 진묵대사震黙大師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진묵대사의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처럼 장수하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진묵대사의 여동생 또한 결혼하지 못한 채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을 걱정하고, 저녁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어렵게 이어갔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진묵대사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청해, “어찌하여 여동생이 이토록 박복한지, 살펴 주기를 바란다.”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49재를 마친 뒤, 진묵대사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글도 남겼습니다. “열 달 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며, 삼년동안 슬하에서 길러 주신 정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만세를 사시고 더 산다 해도 자식의 마음은 오히려 부족하거늘, 백 년의 수명조차 다 누리지 못하시고 떠나시니 어머님의 생은 어찌 그리 짧으십니까. 표주박 하나 들고 걸식하는 이 소승은 말할 것도 없지만, 비녀를 아직 꽂아 보지 못한 누이동생은 얼마나 애처롭겠습니까.
스님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가고, 앞산과 뒷산은 겹겹이 둘러있건만, 어머니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셨습니까. 오, 애달프고 또 애달픕니다.”
진묵대사의 전해오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그 진묵대사가 부안 내소사 지장암에 주석하고 계실 때, 가난에 시달리던 여동생이 절에 와서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진묵대사는 “몇 월 며칠 날, 손님이 올 것이니 음식을 정성껏 대접하라.” 했습니다. 그러자 누이동생은 큰 기대를 품고 있는 돈 없는 돈 모아 잔칫상을 차려 놓고 손님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귀한 손님은커녕, 행색이 남루한 거지들이 찾아 왔습니다. 박복한 누이동생은 화가 잔뜩 났지만, 그래도 진묵스님 체면을 봐서 먹는 시늉만 하다가 떠나갔다는 설화說話입니다.
“막혐문전페의객莫嫌門前廢衣客이요, 영산수기세월장靈山授記歲月長이라.”
길거리에 구걸하는 사람이 “한 푼 줍쇼.” 하거든, 문전박대하지 말아라. 영산회상靈山會相에서 어느 세월에 “네가 불자佛子인지 확인하러 오실지 어찌 알겠는가.”하는 가르침입니다.
이 일화 이후 여동생은 기이하게도 굶주림에서 벗어났다고 전합니다.
진묵대사의 제문祭文과 일화는 모두 따뜻한 마음과 깊은 깨달음을 전합니다. 우리도 부모님의 은혜와 인연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은 무상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반은 죽음이 아니며, 참 주인공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한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영가님들, 위패 속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더 복된 세상에 머무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는 우란분재일에 49일 동안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기도합니다.
이 모든 인연을 귀히 여기며 깨달음의 길로 향해 나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