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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初心이 던져주는 교훈 |
김종만 불교언론인 불기 2555년 신묘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희망의 새해를 여는 힘은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다는 계획과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한 마음 다짐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마음으로 새해 첫 걸음을 시작한다. 이것이 초심이다. 초심은 나를 잡아주는 버팀목이자 강인하게 이끌어주는 채찍이다. 이런 저런 유혹과 나태로부터 나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메시지이자 일상적 삶 속에서 나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신약(信藥)이다.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내 삶을 빛나게 회향시킬 수 있는 ‘리모콘’이기도 하다. 초심은 그래서 엄격한 자기관리를 요구하는 지계와도 같다. 다만 출가 수행자가 파계를 범했을 경우 대중의 질책과 그에 따른 벌칙이 주어지는 것과는 달라서 언제든 좌절과 포기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오히려 초심을 잃고 변절과 굴곡된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초심을 잃는다면 언제든 위기의 삶이 초래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초심을 잃었다는 얘기는 바꿔 말하면 변칙과 타협을 용서했다는 말이 되고 이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되는 상황을 부른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도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심심치 않게 회자됐다. 특히 정치인이나 유명 연예인들은 자신들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하며 대중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도대체 초심이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기에 위기돌파의 메시지로 작용하는 것일까. 초심은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열정’과 통한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 순진 그 자체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의 법문을 ‘순일’(純一)한 것으로 묘사되는 장면이 적지 않게 나온다. 부처님의 법문은 과장되거나 꾸미거나 수식되지 않는 것이어서 순일한 것이다. 또 듣기 좋은 말로 치장되거나 위협하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아 순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허공법계에 두루하나 걸리거나 변색되지 않는다. 이것이 부처님의 순일한 법문이다.     이같은 순일한 상태에서 ‘그 무엇’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므로 초심을 받아들이는 대중들의 마음이 너그럽고 관대한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은 때에 따라선 경륜많고 노회한 사람보다 패기넘치고 순수한 젊은이들에게 거는 기대가 더 크다. 때문에 초심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불교에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란 말이 있다. 신라의 의상스님이 화엄경의 뜻을 요약한 ‘법성게’란 글에 나오는 이 말은 처음 불도에 마음을 내디뎠을 때 그 마음이 바로 부처를 이룬다는 뜻이다. 처음 믿고 발심[서원]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우는 말이다. 부처님에게 초심은 중생들에게 놓여진 생로병사의 문제를 푸는데 있었다. 그래서 왕자의 신분마저 포기하고 성을 뛰어넘어 출가의 대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이 초심을 놓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부처님은 왕자의 신분으로 ‘빛의 세계’에 사셨다. 매일같이 궁녀들의 가무가 펼쳐지는 빛 속에서 젊은 나날을 보냈다. 이렇게 사신 분이 출가를 단행하여 저 깊은 숲 속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그 칠흑같은 어둠만이 짙게 깔려있는 숲 속에서 밤을 보낸다는 것은 웬만한 배짱과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온갖 독충과 뱀과 날짐승들이 있었을 그 곳에서 맨 몸으로 날을 지샌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부처님을 그 어둠의 세계에 이르러 수행하게 했을까. 그것이 초심이었다. 부처님으로 하여금 불퇴전의 용맹정진을 하게 만든 그것이 바로 초심이었던 것이다. 이 초심이 위대한 이유는 부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들을 생로병사의 유전으로부터 구제해야 겠다는 대승의 서원이 깃들어 있어서다.  우리는 이러한 부처님의 초심정신을 배워야 한다. 실제로 초심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가져가는 사람의 인생은 성공하고 삶이 빛난다. 반대로 초심을 놓은 채 타협과 변절로 삶을 꾸리는 이들은 반드시 위기를 맞게 되고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우리는 조선조 불교를 폄훼하는 ‘불씨잡변’을 남긴 정도전에게서도 초심과 관련하여 얻는 교훈이 있다. 정도전은 당시 불교의 종교적 순기능을 부인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불교가 지나치게 세속화하여 국가 재정과 민생에 미치는 역기능이 적지 않았으므로 이를 바로 잡고자 ‘불씨잡변’을 써냈다. 물론 이 책은 불교의 이해가 적확하지 못함으로써 많은 오류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초심을 이루고자 하는 정도전의 야망과 초심을 잃고 지나치게 세속화의 길을 걸었던 불교계의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도전이 단순히 권력을 잡으려고만 했다면 그토록 위험한 도박에 수없이 목숨을 걸고 뛰어들었을까. 그는 첫 귀양을 갈 때부터 ‘사람은 한 번 죽는다’는 비장한 시를 남겼다. 그를 이토록 강하게 만든 것은 썩은 정치를 정화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꿈꾸고 열망하는 튼튼한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 그를 강인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또한 이렇게 꿈꾸며 자기 자신을 다잡은 것이 바로 그의 초심이었다. 그의 초심은 조선초 경제정의실현과 실업자 구제 등 민본정치의 핵심을 여는데 기여했다. 반면 불교계는 핍박과 외압에 굴복하여 왕실의 보호에만 전격 의존한 채 타락의 후유증을 극복해 내는데는 실패했다. 초심이 사라진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교계에서 이러한 모습은 과연 없는지 자성해 볼 일이다. 종단의 요직에 있으면서 사욕을 앞세우는 지도자들이 있다면 초심으로 돌아가 주기 기대한다. 말은 끝이 있으나 뜻에는 끝이 없다는 경구를 가슴에 새긴다면 초심이 갖는 변화의 힘을, 그 위력을 실감할 것이다. 해가 바뀐 지금 이 시간에도 제방선원에서는 초심을 달구는 납자들이 한국불교의 내일을 밝히며 화두와 씨름하고 있음을 상기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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