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불교의 나라, 미얀마를 다녀와서 |
신강호 서울 수락중학교 3학년   첫 번째 해외봉사이자 두 번째 해외여행으로 다녀온 미얀마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미얀마를 가기 전에는 솔직히 미얀마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동안 주위에서 미얀마를 다녀왔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단지 미얀마 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웅산수치여사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얀마에 가기 전, 인터넷으로 미얀마를 검색해 보았는데, 한 뉴스기사를 보고 놀라서 가는 것을 포기하려고까지 생각을 했었다. 그 기사가 무엇이었냐 하면, 미얀마 군부독재정부와 시민단체가 대립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하지만 꿈같은 첫 해외봉사를 놓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즐겁게 짐을 싸고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를 타면서 아쉬웠던 점은 미얀마까지 가는 직항 비행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베트남 하노이 공항을 경유하여 미얀마 양곤공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빨리 미얀마 직항로가 생겨야 한국 사람들도 미얀마로 더 많이 여행을 다닐 수 있을텐데 말이다. 또 미얀마 공항 면세점에서 본 뱀술도 신기했다. 코브라 한 마리가 전갈과 싸우는 게 통째로 술이 되어있었는데 모양이 정말 징그러웠다. 미얀마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공기 자체가 우리나라와는 달랐다. 그 찐득찐득한 느낌을 표현하자면, 30도의 습한 사우나라고 해야 적당할 것 같다. 한국의 한여름 무더위에 폭우가 내리고 다시 해가 쨍쨍했을 때도 이곳 미얀마만큼 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치 사방에서 가습기를 틀어놓은 듯 한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영하 5도일 때 입던 바지로 영상 30도에서 버티려니 당연히 답답한 게 사실이었겠지만, 인천공항에서 벌벌 떨던 내가 여기서는 정말 우스워졌다. 또 문화적 충격도 있었다. 미얀마 남자들이 대부분 치마를 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들이 바지를 안 입고 모두 롱지(Longyi)라는 치마를 입는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었다. 뭐 며칠 뒤에는 나도 미얀마 조상님들의 훌륭한 지혜에 감탄해서 롱지 한 벌을 구입해 입긴 했지만 말이다. 그것 때문에 같이 간 친구와 선생님들이 현지인이라고 놀리기는 했지만, 그 치마 한 벌로 미얀마사람이 된 것 같은 친근한 느낌이었다. 미얀마는 버스도 트럭버스가 굉장히 많다. 트럭버스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나라 용달차에 지붕만 올려놓고 타는 버스를 말한다. 타보지는 못했지만 트럭버스는 버스라고 하기 뭐할 정도다.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아닌데, 매달려서 가는 폼이 정말 외줄타기를 하는 듯했다. 트럭버스를 보고 풍경을 구경하고 있자니 뭔가 허전한 면이 있었다. 미얀마의 도로에는 신호등이 거의 없었다. 도시 중심부나 그 근처 외에는 신호등이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도로에 신호등이 없는 게 이렇게 허전한 거였는지 미처 몰랐다. 차들은 사거리에서도 자기 갈 길을 잘만 가는 게 참 신기했다. 트럭버스는 급브레이크만 밟아도 사람들이 다 튕겨나갈테니 신호등이 없어야 하겠지만, 신호등은 어디에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고정관념을 깨버린 신선한 충격이었다. 버스를 타고 주위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미얀마 ‘아웅빠리따’학교에 도착했다. 우리를 환영해주는 사람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딜 가서도 나를 이렇게 반겨주는 사람들은 없었던 것 같았다. 나를 반겨주는 많은 꼬마 아이들과 친구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여기서 꼬마아이들과 친구들로 비유를 한 것을 말하자면, 미얀마는 만 6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초등학교 4년, 중학교 4년, 고등학교 2년 과정이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3학년인 나는 미얀마의 고등학생들과 동갑인 또래들인 셈이다. 미얀마 애들은 학교가 우리나라 나이로 17살이면 끝나고 곧바로 대학교에 간다니, 좀 부러운 면도 있었다. 더 빨리 어른이 된다는 느낌이랄까? 다시 아웅빠리따로 돌아오자면 아웅빠리따 학교는 길을 사이에 두고 2개 건물에 있다. 한 반에 6~70명이 수업을 받는다. 아빠나 엄마가 한 반에 6~70명이 수업을 받았다고 들었을 때, 그게 좁아서 수업이 될까 생각했었는데 여기에서 보니 실감이 났다. 그런데 실제로 6~70명이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을 보니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의 표정 하나하나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은 했지만, 말도 안 통하는 아이들과 있으려니 처음엔 많이 힘들었다. 영어라도 할 수 있다면 영어를 하겠는데, 꼬마아이들이 많아서 만국공통어인 바디랭귀지로, 또 눈빛과 마음으로 대화를 했던 것 같다.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고유 전통복인 한복을 입혀주는 일을 했다. 또 아이들은 한국에서 가져온 경복궁 대형사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 즉석 사진 프린트기로 사진을 뽑아서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남자아이들 중 반은 나의 손을 거쳐서 멋진 한국 소년이 되곤 했다. 같이 온 일행에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사진 찍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사진 찍는 게 조금 부러웠다. 나는 아이들의 키에 맞춰서 섰다가 앉았다가 하며 옷을 입혀주었는데 그 친구는 배경에 맞춰서 손가락만 누르면 되는 게 쉬워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번째 날이 지나고 두 번째 날이 되니 이 일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두 비슷하게 생겨보였던 아이들이 조금씩 구분도 되고 얼굴을 보면 언제 찍었는지 대강 감이 올 정도였다. 그 아이들이 좋아해주는 게 보였기 때문에 더 즐겁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줄을 선 아이들이 자기 차례가 되면 웃음을 보이고 뒤에 서있는 아이들도 옷을 입는 게 재밌는 듯 많이 웃어줬다. 내 생에 첫 해외봉사가 끝나고 한국에 왔을 때 친구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너희들이 미얀마 아이들의 웃음이 얼마나 예쁜지 알아?’였다. 그 정도로 아이들은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한복을 입히고 사진을 인화하던 중 실수가 나와 버렸다. 내가 했던 한복 입고 사진찍기팀은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다른 팀들의 시간에 맞추지 못해버린 것이다. 다른 팀들의 아이들이 우리 팀이 끝나기도 전에 들어와 버려서 다른 아이들이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기도 하고 우리 팀이 끝날 때까지 다른 팀 선생님들이 고생하기도 하셨다. 실수는 또 있었다. 위에 얘기한 것처럼 바쁘다보니 사진 인화가 너무 복잡해서 실수가 많았다. 똑같은 아이를 두 명 뽑아서 난처했던 경우도 몇 번 있었다. 또 그러다보니 먼저 찍은 친구에게 사진을 늦게 주고 기다리게 하기도 했다. 그 때마다 미안해서 한복을 입혀주는 건 제쳐놓고 사진을 뽑다보니 아이들이 어떻게 입는지 잘 몰라서 허둥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까 그래도 더운데 땀이 더 뻘뻘 나는 것 같았다. 결국 사진은 나중에 뽑아서 나눠주고 한복만 입히게 됐다. 셋째 날에 했던 아이들에게는 나도 처음 보는 ‘사진프린터’로 사진을 뽑는 멋진 광경을 못 보여준 게 아쉬웠다. 아웅빠리따학교의 교장선생님이신 ‘우산따띠리’ 스님께서는 봉사활동을 마치고 다음 학교로 갈 때 3개의 프린터기 중 한 개만 스님께 파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셨다. 멋진 광경을 보여주는 사진기가 탐나시긴 탐나셨다보다. 뭐 그 프린터기에는 전용 종이와 전용 잉크가 필요해서 그것을 구하는 게 힘들 거라고 설득은 했지만, 스님께서는 프린터에 눈독 좀 들이신 것 같다. 나라도 참 좋아 보이는 프린터였으니 말이다. 아직 미얀마를 다녀온 후기는 더 많이 쓸 수 있겠지만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줄여야겠다. 7박 8일간의 봉사일정을 모두 마치고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는데, 초롱초롱한 미얀마 아이들의 눈망울이 자꾸 떠오른다. 그리고 그동안 부모님께 말썽부렸던 일,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동생과 다퉜던 일, 공부하기 싫어 내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꼈던 일들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고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