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한스님 / 봉담선원
얼마 전 강원도 정선 함백산(1,573m) 기슭에 있는 토굴 암자로 만행을 다녀왔다. 도반 스님과 함께 암자를 지키고 있는 주목나무 가지마다 눈꽃이 하얗게 피었다. 퍽 아름다웠다. 저 멀리 싸리울처럼 일렬횡대로 쭉 늘어선 눈꽃 능선 또한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 능선을 쪼며 날아다니는 새의 날갯짓 또한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겨울 산새들의 부르짖음을 따라 뚜벅뚜벅 눈꽃 능선을 올랐다. 발밑의 마른 풀잎과 나뭇잎, 그리고 이따금 발부리에 차이는 작은 돌멩이들이 나의 발길을 느릿느릿 붙잡았다. 바짓가랑이를 자꾸 붙드는 그것들을 보면서 나는 문득 ‘인연’과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지금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 당기는 저 마른 풀잎과 나뭇잎과 돌멩이들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 이 깊은 겨울 함백산 기슭에서 오늘 만나게 된 걸까? 저 겨울 산새와 눈꽃은 또 무슨 인과로 나를 지금 이렇게 눈꽃 능선으로 불러낸 걸까? 무엇 때문에 나는 지금 저 ‘하찮은 것’들에 ‘귀한’ 마음과 시간을 빼앗기고 서있는 걸까?
5부 능선쯤 올랐을 때 눈 덮인 묵정밭에서 배추 한 포기가 살포시 어깨를 내놓고 있었다. 미처 김장 김치가 되어 사람들의 몸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데에 버려진 배추였다. 그때 나는 다시 생각했다. 만약 저 배추 포기가 김치가 되어 지금 내 몸속에 들어와 있다면?
그렇다. 저 배추 포기가 김치가 되어 지금 내 몸 안에 들어와 있다면 저 배추는 이미 내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되었을 터다. 그리고 그 살과 피와 뼈가 자라 내 마음을 이루고 생각을 일구었을 터다. 그러고 보니 저 배추가 바로 나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생각해보았다. 지금 여기 토굴에서 저 배추를 얻어먹은 나는 이제 소변과 대변을 배설하겠지. 그러면 내가 배설한 소변과 대변은 거름이 될 테고, 언젠가는 그 거름이 저 묵정밭 배추의 밥이 되고 실핏줄이 되고 잎사귀가 되겠지.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내가 저 배추가 되었다. 배추가 내가 되고, 내가 배추가 되고 말았다.
하산 길에 등산하고 내려오는 중년 신사 한 분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내 입에서 절로 감사와 찬탄의 인사가 나왔다. 중년 신사도 싱긋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중년 신사의 눈망울에 온전히 들어있는 나의 모습을. 중년 신사도 그 순간 보았을 터이다. 내 눈망울에 온전히 고여 있는 당신의 모습을. 그러고 보니 그 순간 중년 신사와 나는 둘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서로의 눈망울에 담고 있었다. 한 몸이었다.
그렇다. 이제 임진년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임진년 새해에는 부디, 저 겨울 함백산 기슭에서 내가 만난 묵정밭 배추와 마른 풀잎과 나뭇잎과 돌멩이와 중년 신사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고 이어져 하나의 관계로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들임을 온 가족과 함께 확인하는 ‘뉴 이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발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