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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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밭, 고요 속 암중모색의 시간

정성운
텃밭농부


겨울은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있다. 동지가 지나 낮이 더 길어졌어도 밤이 아직도 길다. 새해는 이렇게 고요 속에서 암중모색하고 있다. 그렇다. 씨앗은 저 차가운 흙 아래에서 봄맞이 채비를 하고 있다. 마늘과 양파, 대파와 쪽파는 희디흰 뿌리의 힘을 기르고 있는 중이다. 버드나무 가지에 달린 잎눈도 안으로 여물고 있다. 겨울의 밭은 뜨거운 생명을 품고서 정적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게 겨울이다. 겨울은 묵언의 시절이다. 묵언은 생명을 길러내는 역동의 몸짓이다.
겨울에도 밭에 나간다. 밭에 이끌려 그냥 갔다가 꽁꽁 언 땅을 밟고, 스산한 풍경에 몸을 떨다가 목덜미에 감기는 찬바람을 데려오는 것이다. 어제도 습관처럼 밭에 다녀왔다.


“죽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태고의 짐승처럼 침묵은 거기 누워 있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유마거사의 우레와 같은 침묵
세상의 등불같은 역할을 하는 거룩한 가르침(종교)들은 침묵을 귀하게 여겼다. 불교에서 ‘묵언’은 수행의 한 방법이다. 안거에 들어가며 몇 수행자는 가슴에 ‘묵언’이라는 패찰을 달기도 했다. 오래전 송광사에서는 재가자들이 절에서 숙식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지금의 템플스테이의 효시같은 것이었다. 3박4일 일정 동안 새벽예불과 좌선, 발우공양, 청소 울력, 차 마시기 등이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이었다. 특이한 것은 일정 동안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묵언이 들어 있었다.
프로그램을 마친 참가자들에게 소감을 들어보았더니 가장 힘들었던 게 묵언이었다고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어려웠고, 가부좌하고 앉아있는 것도 고역이었으리라. 발우공양은 무거운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데 묵언이, 들썩이는 입술을 닫고 있으면 되는데 그것이 가장 힘들었다는 반응이 놀라웠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묵언은 자기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실 이게 힘든 일이다.
법정스님은 『말과 침묵』이라는 저서를 펴냈다. 송광산 불일암에 기거하던 시절이었다. 이 책 가운데 ‘말과 침묵’이라는 글에서 법정스님은 유마 거사와 보살들과의 법담을 인용한다.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방법을 묻는 문수보살의 질문에 유마 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이에 문수보살이 감탄하여 말했다.


“훌륭합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문자나 말 한마디 없는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유명한 ‘유마 거사의 침묵’의 장면이다. 침묵은 단지 말이 없는 물리적인 고요에 머무는 상태가 아니다. 법정스님은 다음과 같이 풀어낸다.


“생명 자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 “그러한 침묵이야말로 말이 따를 수 없는 우레와 같은 침묵이다.”


기독교 계통에 속하는 퀘이커 교도들의 가장 중요한 의식은 모여서 침묵하는 것이다. 퀘이커들에게 침묵은 이 단어를 말하는 것조차 의미를 훼손하는 것 같아 조심스러워 할 정도다. 그들은 침묵이 ‘내면의 빛’으로 이끈다고 생각한다.


“퀘이커들에게 있어 지혜는 침묵 속에서 시작됩니다. 퀘이커들은 우리의 목소리와 우리의 영혼을 침묵시킬 때에만 ‘움직이지 않는 듯 고요한 내 안의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목소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소리이며, 우리 행위를 통해 남들에게 들려주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고요와 침묵 속에서 그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그리고 그 목소리의 인도를 받아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진정 우리의 삶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 L. 스미스, 『퀘이커 지혜의 책』


침묵을 제1의 지침으로 삼는 퀘이커는 매우 실천적인 종교단체다. 미국의 노예해방운동에 크게 기여했는데, 노예를 둔 신도들을 파문한다고 결정할 정도였다. 1·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전쟁 고아와 남편을 잃은 부인들을 돕는 데 앞장섰다. 1947년 영국 퀘이커봉사협회와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종교단체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세상을 구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신도 수가 30만에 불과한데, 신도 수를 늘리는 것보다 각자의 내면의 빛이 더 밝아지게 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고요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를 어쩌나
내게 밭은 침묵의 시공간이다. 밭에서 일을 하다보면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생각들이 머리 주위를 맴돌다가는 이내 사라졌다가 또다른 생각에 잠긴다. 돌아가신 어머니, 지금은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 고등학교 때의 친구,   
어느 날 아침 나는 어머니에게 미술 준비물을 살 돈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돈이 없으니 그냥 가라고 했다. 나는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어머니는 나를 달랬고 학교에 간 것 같다. 어떤 말로 나를 달랬는지 떠올리려 애썼지만 기억되지 않는다. 그때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또 맴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된다. 4.19묘지(지금은 4.19 국립묘지) 아래에 있는 우이동 솔밭으로 봄소풍을 가는 날이었는데 어머니가 주먹밥을 싸주셨다.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친구들은 모두 김밥을 가지고 올 텐데, 누런 ‘변또’에 들어있는 주먹밥을 보여준다는 것이 싫었다. 그날 나는 소풍을 가지 않았다.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심심하게 보냈다. 다음 날 선생님은 왜 오지 않았는지 묻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어머니는 김밥 재료를 준비하지 않았으며, 이유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몸이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어머니는 남의 밭일을 다니셨는데, 이른 아침에 나가 어둑할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일당을 매일 지급하지 않았다. 월정액의 소득이 없는 터라 어머니의 주머니에는 십원짜리 하나 없었을 수도 있다. 석유 한 되를 사는 심부름을 하면서 가게 주인에게 “엄마가 외상 하라고 했어요.”라고 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목수일을 했는데,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깜깜한 새벽에 집을 나섰다.
고등학교 2, 3학년 내내 내 짝이었던 재웅이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내 사랑 어디쯤에 있나”로 시작하는 민해경의 ‘보고 싶은 얼굴’과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제법 잘 불렀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을 부를 때는 몸을 앞뒤로 흔드는 춤까지 추면서 흥겨워했다. 그는 교회에 다녔고 구원 운운하면서 나를 몇 번 교회에 데리고 갔다. 나는 그때에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읽은 터라 교회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나도 대학에 들어갔고, 문학동아리에 재미를 느꼈다.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보고서는 기독교에서 더욱 멀어졌다. 그 친구와도 멀어졌다. 목사가 되었겠지. 수소문해서 만나볼 생각엔 이르지 않는다. 나도 그도 변해서 거리에서 마주쳐도 몰라볼 것이다. 우연히 어느 자리에서 만날 수는 있겠지. 반가울까. 너무 오래 떨어져 지냈다. 40년이나. 애틋함이 있어도 바래질 만큼의 세월을 지나왔다.
밭을 침묵의 시공간이라 했지만, 되짚어보니 침묵보다는 온갖 생각 속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겠다. 생각도 멈추고, 생명 자체의 모습을 드러내라 했는데, 내면의 빛을 보라 했는데. 나는 고요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구나. 이를 어쩌나. 법정스님이 들려주는 옛 노래 한 구절 들으며 마음을 달랜다.


성내지 않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그윽한 향이어라
마음속에 티 없음이 진실이요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실상이네
-‘참다운 공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