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운
텃밭농부
설을 지나면 농부들의 마음은 일렁인다. 괜스레 논밭에 나가 어슬렁거린다. 논둑과 밭둑을 살피며 손봐야 할 곳을 가늠한다. 올해는 무엇을 심고 가꿔야 할지를 생각한다. 씨앗을 꺼내 바람에 말린다. 어느덧 봄은 다가와 문지방 앞에 와있다. 
10여 년 전 강원도 홍천에서 농사짓는 선배 집을 방문해 하룻밤 묵었다. 설 지난 즈음이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인데, 교회에서 잔치를 한다는 것이다. 종교에 관계없이 마을 사람들이 모이자 교회에서는 점심밥을 내왔다. 함께 음식을 나누고 한 해 농사계획을 얘기했다. 겨우내 삼삼오오 오가기는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만나는 것은 새해 들어 이날이 처음이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교회가 됐건, 절이 됐건 사람들이 모이는 공회당 같은 역할을 한다. 그날 사람들은 고깃국에 밥 말아 먹으면서 올 한해도 힘써서 좋은 결실을 만들어가자고 덕담을 나눴다. 그 마을만의 시농제를 치른 것이다.
우리 밭에서도 시농제를 올린다. 3월 첫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한다. 별거 아니다. 정해진 의식은 딱히 없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밭 둘레를 두루 살핀 후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을 같이 먹는 것이다. 나는 밭 가운데로 나가 사방을 향해 선 채로 합장 삼배를 올린다. 몸과 흙이 건강하고, 함께 재미있게 지내자는 마음을 다진다. 이로써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것인데, 이때부터 밭둑을 고르고, 씨앗을 나누기도 한다. 공동작업을 할 것이 있으면 날짜와 역할을 정한다. 작년의 공동작업은 허물어져가는 화장실을 수리하는 것이었다.
지난 겨울은 큰 추위가 없었다. 예년에 비해 푸근하게 보냈으니 다행이지만, 벌레 피해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밭에 사는 동물 중에는 작물에 도움을 주는 것들이 많다. 지렁이가 대표적이다. 그런가 하면 노린재와 배춧잎벌레는 큰 피해를 끼치는 해충이다. 겨울이 따뜻하면 이것들의 알이 얼어 죽지 않아 개체 수가 늘어난다. 농업진흥청에서는 각지에 예찰원을 두어 해충의 출현을 파악하고 있다. 특정한 벌레가 나오면 방제 예보를 발령하고 방제 방법을 알린다. 설이 지나면 농부들도 그렇거니와 농업 관련 정부기관도 바빠진다.
벌은 꽃의 빛깔과 향기를 손상치 않는다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연기와 중도에 있다. 연기는 모든 사건의 발생과 전개 과정이 무수한 연관관계로 얽혀 있고, 이 작용이 상호·중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을 가도록 이끈다. 중도는 정중앙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사안의 발생 원인은 다른 요인들에 비해 작용하는 크기가 다르다. 가령, 우리가 즐겨 먹는 상추를 생각해보자. 상추는 씨앗, 햇빛, 온도, 수분, 흙, 익충과 해충, 농부 등이 작용한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크게 작용할까. 누구는 씨앗이라고 할 것이고, 또 다른 이는 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모든 조건이 갖춰지더라도 발아와 생장에 적당한 상태, 그러니까 5~10도의 온도와 60% 정도의 수분, 햇볕이 비춰야 한다. 작물의 발아부터 생장, 수확에 이르는 전 과정은 미묘한 관계들의 연속이며, 적절한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므로 중도는 단순히 위치상 가운데가 아니다. 상추 한 뿌리를 키우는 데도 무수한 요인이 관여함을 아는 것이 연기이며, 중도는 그 요인들이 상추를 키워내는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연기와 중도의 가르침은 빛나는 진리이다. 그러나 생활에 적용되지 않으면 생명력이 줄어든다. 밭으로 나온 연기와 중도는 자연과학을 만나야만 비로소 이해되며, 그 내용이 온전해진다. 연기와 중도로 사회현상을 파악하고 바른길을 찾으려 할 때는 사회과학과 어우러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박제된 진리가 되고 만다.
근래에 생태와 생태학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기후위기가 이런 현상을 불러왔다. 지구는 거대한 생태시스템이며, 온실가스의 과다한 배출로 인해 기후시스템에 문제가 생김으로써 가뭄과 홍수, 더위와 추위, 태풍 등의 기상현상이 과거와 달리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불교에서는 조화로운 관계를 중시한다. 자연 자체도 그렇거니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도 조화로움을 으뜸으로 여긴다.
“벌이 꽃을 상대로 꿀을 얻을 때에 그 빛깔과 향기를 손상치 않듯이.”
『법구경』 중 「꽃의 품」에 나오는 게송이다. 탁발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을 일러주는 대목인데, 불교의 자연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게송이다. 자연에서 필요한 것을 얻되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된다. 인간의 태도가 이러하다면야 무엇이 문제가 될까.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한계를 알지 못해 꽃마저 꺾는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비유에서도 금을 얻으려는 욕심이 과해 아예 거위의 배를 가르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불교에서는 동물이나 미물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서재영은 「선의 생태철학 연구」에서 여러 경전과 어록에서 나타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물일지라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 이른다. 생태주의의 한 축인 심층생태주의도 이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 그래서 불교의 생명·생태 운동에서는 심층생태주의를 옹호한다. 그러나 심층생태주의도 생태주의의 한 부분이므로 이에 전적으로 매어서는 안 된다.
행하지 않으면 불교는 드러나지 않는다
심층생태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너무 제한된다. 심층생태주의는 먹이사슬로 얽힌 생명의 활동을 부정하는 반 생태에 이른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농사도 저어된다. 농사는 자연에 가하는 인위적 행위이다. 인간의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자연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자연의 일부를 해치지 않을 수 없다. 땅을 일구는 것은 토양 속의 생태계를 헤집어놓는 꼴이다. 인간은 농사라는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농사를 하되 자연생태를 유지하는 방법이 있을까, 그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도의 적용이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자연농, 유기농 등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소된 것이 아니다. 자연농, 유기농은 자연에 끼치는 나쁜 영향이 적다는 장점이 있지만, 소출이 적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 농가의 차원에서는 소출이 적은 것을 높은 가격으로 팔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농산물이 식량인 이상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팔십억 인구를 먹일 만큼의 생산이 있어야 한다. 많은 연구는 식량 생산이 소비량을 웃돌고 있는데, 공급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식량도 이윤을 추구하는 상품일 뿐이므로, 거저 제공되지 않는다. 굶주리는 사람에게도 먹고 싶으면 돈을 지불해 사라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국가 단위에서 식량의 생산과 공급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식량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하는 자리는 아니다. 앞에서 자연생태를 유지하면서 농사를 하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도라고 했는데, 끝이 아니다. 올바른 식량체계를 디자인하고 이를 이루려는 노력이 없다면, 중도는 하나의 논제에 머문다. 결국 중도는 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불교를 어렵게 여기는 이유 중의 하나는 행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행함을 주저한다면 불교는 언제나 어려운 무엇으로 남는다. 행이 이어질 때 불교는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