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범
숲해설가
청계산 자락의 드넓은 품에 안긴 서울대공원은 흔히 ‘동물의 왕국’으로 기억되지만, 그 이면에는 시간을 견뎌온 거대한 초록의 연대기가 흐르고 있다. 이곳의 식물원은 단순히 조성된 공원을 넘어,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진 여정을 고스란히 품은 역사의 산실이자 도심 속에서 가장 단단한 생태계의 뿌리를 내린 공간이다.
서울대공원 식물원의 역사는 1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뿌리는 1909년 일제에 의해 창경궁 내에 조성되었던 ‘창경원’ 식물원에 닿아 있다. 그 후 창경궁의 식물들은 창경궁 복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곳 과천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여기에 남산 제 모습 가꾸기 사업으로 2006년 철거된 ‘남산식물원’의 식물들까지 합류하여, 서울대공원은 근현대사를 함께 해 온 식물들의 거대한 피난처이자 박물관이 되었다. 수십 년 전 남산의 온실에서 자라던 선인장과 야자수들이 지금도 서울대공원 전시온실 천장을 향해 뻗어 있는 모습은, 이 공간이 가진 역사적 무게감을 묵묵히 증명한다.
1984년 5월 동물원부터 개원한 서울대공원은 동물원과 식물원, 그리고 광활한 숲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 공간이다. 여기에 더해 서울대공원의 성격을 완성시키는 또 하나의 축이 있으니, 바로 대공원 둘레 길과 산림욕장 길 그리고 치유의 숲이다. 이 길과 숲은 관람의 공간을 넘어 ‘머무르고 회복하는 자연’으로 서울대공원을 확장시킨다.
먼저 서울대공원 식물원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새로 조성된 공간이 아니라, 서울 남산식물원과 창경궁 대온실에서 옮겨온 식물들이 뿌리를 내린 한국 근현대 식물 전시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은 장소다.
전시온실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서울대공원은 거대한 캔버스가 된다. 잘 조성된 수목원이다.
5월과 6월, 테마가든에는 수만 송이의 장미가 뿜어내는 향기가 진동한다. 세계 각지에서 온 진귀한 장미 품종들이 저마다의 색을 뽐내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다.
화려한 장미만큼이나 마음을 끄는 것은 길가에 무심한 듯 서 있는 나무들이다. 대공원 호수를 따라 길게 늘어선 왕벚나무들은 봄이면 연분홍빛 터널을 만든다. 서울대공원 벚꽃은 여의도 윤중로 등 여타의 벚꽃 명소들보다도 화려하다.
여름에는 느티나무와 참나무, 팽나무가 짙은 녹음을 드리우며 그늘을 만든다.
여름의 서울대공원 숲은 짙고 깊지만, 그 속에는 의외로 가벼운 장면들이 숨어 있다. 조성된 정원에서는 꼬리풀이 곧게 꽃대를 세운다. 보랏빛 꽃이 위로 차곡차곡 이어진 모습은 단정하면서도 당당하다. 작은 꽃들이 모여 하나의 선을 이루는 꼬리풀은 여름 정원에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 옆에서는 가우라가 바람에 흔들린다. 가늘고 긴 줄기 끝에 달린 꽃들은 마치 공중에서 잠시 머무는 나비 같다. 가우라는 가만히 서 있지 않고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그 흔들림 덕분에 서울대공원의 여름은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풍경은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살아 움직인다.
가을이 되면 은행나무의 노란 잎과 단풍나무, 복자기, 화살나무의 붉은 색감이 대공원을 하나의 거대한 색채 정원으로 바꾼다.
겨울에도 대공원은 비어 있지 않다. 소나무와 잣나무, 향나무 같은 상록침엽수는 계절의 공백을 메우며 풍경의 중심을 잡아준다. 바닥에는 맥문동이 남아 있다. 여름에 보라색 꽃을 피웠던 맥문동은 겨울이 되면 꽃 대신 잎으로 존재를 이어간다. 차갑고 단단해진 공기 속에서도 짙은 초록을 유지하는 모습은, 계절을 견디는 식물의 태도를 보여준다.
눈이 내린 날, 맥문동 잎 위에 살짝 쌓인 흰 눈은 겨울 대공원의 가장 조용한 장면이 된다. 화려함은 없지만,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처럼 서울대공원은 계절마다 다른 빛깔로 우리를 즐겁게 한다. 동물원보다도 식물을 보러 서울대공원을 철마다 자주 방문해야 하는 이유다.
서울대공원 식물 탐방은 공원 안에 그치지 않는다. 대공원을 품고 있는 청계산의 원시림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둘레길과 산림욕장길은 인위적인 식재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숲 생태계가 잘 보존된 곳이다. 서울 근교라 접근성도 좋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서울대공원이 ‘공원’이기 이전에 하나의 숲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계절마다 초본식물의 꽃들도 빠지지 않는다. 봄이면 숲 바닥에서는 복수초와 노루귀, 현호색이 짧고 강렬한 시간을 보낸다. 이어 한국 특산종인 변산바람꽃이 가냘픈 줄기 끝에 하얀 꽃잎을 피워내는데, 이들을 만나는 것은 대공원을 찾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행운이다. 여름에는 원추리와 벌개미취, 산수국이 숲길에 색을 더하고, 가을에는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마지막 계절을 정리하듯 피어난다.
이 꽃들은 화려함보다 ‘자연스러움’으로 기억된다. 계획된 전시가 아니라, 숲의 조건이 허락한 자리에서 스스로 피어난 풍경이기 때문이다.
서울대공원에는 치유의 숲이라는 특별한 공간도 있다.
치유의 숲에 들어서면 공기의 밀도가 달라진다. 편백나무와 잣나무, 소나무가 섞여 만들어낸 향은 깊고 부드럽다. 이 숲은 걷기보다는 머무르기에 더 어울린다. 나무 사이 간격이 넉넉해 숨이 막히지 않고, 빛은 잎 사이로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활엽수와 침엽수가 함께 어우러진 이 숲에서는 계절의 변화가 과장되지 않는다. 봄에는 조용히 잎이 돋고, 여름에는 짙은 그늘이 생기며, 가을에는 서서히 색이 바랜다. 그 느린 속도가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킨다. 서울 가까이에서 치유의 숲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대공원 숲길은 걷는 이에게 특별한 목적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걸으면 충분하다.
숲은 언제나 말을 아낀다. 대신 바람 소리와 잎의 마찰음, 멀리서 들려오는 새 소리로만 존재를 드러낸다. 그 조용함 속에서 사람의 생각도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창경궁과 남산에서 시작된 식물원의 역사, 과천으로 이전하며 다시 짜인 숲의 구조, 그리고 숲길과 치유의 숲에서 경험하는 느린 걸음은 이 공간을 단순한 관람지가 아닌 ‘머무는 자연’으로 만든다.
서울대공원을 자주 방문해 보자.
동물을 보고, 식물을 관찰하는 일을 넘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흐르는 시간 속에 잠시 자신을 내려놓아 보자.
이곳은 지금도 계속 자라고 있는, 살아 있는 숲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동물들의 포효 소리 너머, 고요히 자리를 지키며 매년 꽃을 피우고 잎을 틔우는 나무와 꽃들. 그들이 전하는 위로와 생명력은 이 거대한 공원을 지탱하는 진정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