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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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정신과 우리 시대

심준보
백화도량 지도법사, 동국대 인도철학과

출가란 용어는 범어로는 pravrajana, 혹은 pravrajya이고, 팔리어로는 pabbajja로, pra 는“앞으로”라는 뜻이고, vrajna는“나아간다” 라는 의미이다. 그래서“앞으로 나간다”, 즉 “전진(前進)”의 뜻이 있다. 앞으로 나간다는 것 은 속박을 떨치고 나가는 것으로, 이것을 출가 로 표현한 것은 집을 속박의 상징으로 본 것이 다. 가(家)는 가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家는 사회, 정부, 국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출가란 이전에 내가 살던 환경, 작게는 가정, 크 게는 국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내 가 살던 사회체제, 사회의 윤리를 초월하여 새 로운 체제, 새로운 윤리로 나간다는 말이다. 이 체제가 승단이고, 그 윤리가 바로 계율이다. 부
처님 당대의 출가자들은 당시 사회의 어떤 점에 불만족하여 새로운 체제와 윤리를 추구하였을 까. 생산 기술이 낮은 시절에는 공동체가 합심하여야만 더불어 공존할 수 있었지만, 생산 기술 이 발전하면 잉여생산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공동체가 아니더라도 개인은 삶을 영위할 수 있 게 된다. 이런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인간은 개체화되고, 이기적인 윤리가 대두한다. 부처님 당 대는 철기 문화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경작지가 개척되어 잉여생산물이 발생한 시기이다. 이에 따라 카스트 제도가 공고해지고, 강력한 중앙집권 형태의 국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원래 카스트제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개념보다는 분업의 개념이 강한 제도였다. 그런데 철기문화 의 영향으로 잉여생산물이 늘어나면서 카스트제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고착화시키는 제도 로 변질되어 갔다. 자본의 축적은 더욱 욕망을 조장하여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기 위하여 폭력 을 불러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원시 사회의 공동체 윤리는 붕괴하고, 강한 부족이나 국 가가 소부족을 병합하여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사회가 전개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회는 피비린 내 나는 살육과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당대 사회의 욕망과 폭력을 부정한 세력이 바로 출가사문들이다. 불전에 따르면 이들은 6사 외도로 불리는데, 꼭 6 종만 존재한 것은 아니고 다양한 출가사문들이 있었을 것이다. 부처님 역 시 사문에 속한다. 출가사문들의 가장 대표적인 세력은 자이나승단이다. 이 승단의 핵심적인 윤 리가 불살생이다. 이들은 흙 , 물, 불, 공기에도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여, 물도 그냥 마시지 않았 으며, 불도 함부로 끄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사고는 원시 사회의 물활론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 다. 이런 점에서 당대 사문들은 고대 원시 사회의 가치들을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이 나교의 전통이 새롭게 발흥한 것이 아니고, 고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을 교주인 마하비라가 개혁 했다고 자인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요즘 극장가에서 흥행하는 아바타라는 영화는 자원을 침탈하려는 지구인 기업가들의 용병들과 이에 대항하는 자연주의적이고 공동체적인 사회를 가진 외계인 사이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어떤 면에서 사문들이 추구한 윤리는 아바타에서 나온 외계인들의 자연친화적이고 공동체적인 윤리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작정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원시 사회만을 추구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잉여 자본 을 만들어 내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그 기반으로 한다. 인간 이지의 발달에 따른 과학기술의 발 전과 자본주의 심화 현상은 역사적 필연이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확장되는 인간 욕망의 외화 가 바로 자본주의이다.

기독교 역시 욕망의 팽창을 악으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 발전에 이런 사 고는 걸림돌이 되었다. 막스 웨버는 근검절약을 통한 자본의 축적은 죄가 아니라는 청교도 윤리 를 주장함으로서 자본가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또 마르크스는 사회체제의 변혁을 통해 인위 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재화가 넘쳐나면서도, 이것이 소수 에게 소유되지 않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되는, 공동체 윤리를 기반으로 한 이상사회를 꿈꾸 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 윤리는 자본가들에 면죄부만을 주었을 뿐, 자본이 소수에게 집중되 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바라보지 못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실험 역시 20세기 말에 실패하고 말았다. 인간의 욕망을 사회 체제로만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는 너무나 낙관적 사고였던 것이다.

이에 편승하여 자본가들은 더욱 기승을 부려 자본축적의 무한 욕망을 추구하였다. 장부상에 만 존재하는 가치가 뻥 튀겨져 무한 가치가 창출되는, 마술 아닌 마술인 신자유주의의 환상이 판을 쳤다. 이런 실체 없는 욕망의 거품이 꺼지면서 발생하는 고통을 현 인류는 전 지구적으로 목도하고 있다. 2년 전 미국 금융의 파산 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출가사문들은 속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할까. 이미 출가하였으니 속가 와는 완전히 절연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마도 사문의 정통적 입장은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것 을 부처님 당대 사문의 대표 격인 자이나승단의 입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의 사문집단인 불교승단의 입장은 다르다. 불교의 핵심적인 윤리는 중도이다. 출가자는 속가를 기반으로 유지될 수 있다. 또 속가는 출가자들의 윤리에 의해 더욱 맑은 사회를 이룰 수 있다.

두 사회는 둘을 하나로 묶어서 세운 볏단처럼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도 유지되지 않는 관계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의 법칙이다. 출가승단은 속가사회에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주 는 수행자의 사회이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불교 윤리의 핵심인 중도적 관점이다. 불교는 사 문전통에 속하기 때문에 출가를 찬양하지만, 무조건 출가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문 전통과 불교 전통을 예리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당대 브라만 사회도 비판하셨지만 사문들의 비사회적 행태 역시 또 하나의 극단으로 보았다. 불교는 이런 유연한 사상으로 인해 훗날 대승으로서 만개하고 보편적인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속가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다면, 승가에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 연기의 법칙 이다. 그렇기 때문에 속가 사회가 잘못되었을 때는 엄히 꾸짖어야 한다. 그러나 직접적 정치 발 언보다는 먼저 승단은 속가의 사표로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조계종 중앙 종회의 정치적 행태를 사표로 삼는다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래서는 승단의 충고가 속가사 회에 먹힐 리가 없다. 또 승가의 청정을 회복하는 자정 노력과 더불어 구체적인 정치 발언도 필 요하다. 무엇보다 정치 발언은 특정 정파에 쏠리지 않는, 불교의 근본정신에 입각하여야 한다.
이번 정권이 주장하는 대북정책, 기업친화 정책, 4대강 정책, 세종시 정책들이 불교정신에 합당 한가를 날카롭게 판단하여, 협조할 것은 하되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지난 20년 이상을 불교와 인도사상을 공부한 필자의 입장에서, 효율과 속도를 통해 인간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기 입장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일고의 망설임 없이, 가차 없이 쳐내는 이번 정권의 이념과 행태는 불교정신에 합당하지 못하다. 특히 신영철대법관의 재 판 관여에 대해서는 탄핵을 극구 반대하다가, 하급 재판관들의 판단에 대해서는 자기 입맛에 맞 지 않다고 사법개혁을 들먹이는 거대언론사들의 아전인수와 용비어천가 앞에서 어떻게 자라는 아이들에게 진실과 정의를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경제발전의 미명하에 재벌에게 면죄부를 주 면서, 어떻게 국민들에게 법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경제 발전인가. 인간 과 정의가 빠져버린 경제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후안무치한 일이다.

정파에 따라 이런 정치적 이슈들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우리 불자들의 기준이 되는 것은 불교정신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출가정신을 사회적으로 파악한다면 욕망과 폭력에 대한 거부이고, 새로운 윤리와 사회로의 전진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욕망의 팽창 과 자본주의 심화 현상은 역사적 필연이라 할지라도, 욕망의 팽창 속도는 인간의 이성 하에서 제한되어야 하고, 자본주의의 개인적 윤리는 공동체 윤리를 통해 보완되어야만 한다. 기업과 효 율과 속도를 부르짖는 이 정부의 이념이 과연 불교의 출가 정신에 합당한 것일까. 아마도 물질 과 쾌락이 넘치고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미국식 천국 건설에는 합당한 이념인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이 천국에 이르는 문은 좁은 문이기 때문에 참으로 소수만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속 도와 효율이 뛰어난 소수의 기업가들만이 느리고 효율 없는 자들을 제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