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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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화신 월하대종사

월하대종사 탄신 100주년 특집

이달 25일은 현대 한국불교사에 큰 획을 그으셨던 노천당 월하老天堂 月下대종사께서 탄생한 날입니다. 노천당 월하대종사는 1915년 음력 2월 25일 충남 부여군 군수리 파평 윤씨 집안에서 태어나서 1933년 7월, 18세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차성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 득도했습니다. 그리고 1940년 4월,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한 후 오대산 한암스님 회중에서 하안거를 성만했으며 1944년 4월, 철원 심원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1950년부터 1980년까지는 불보종찰 통도사 전계화상으로 후학양성에 힘쓰셨습니다. 50년대부터 종단일에 매진해오신 큰스님은 1955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1956년 통도사 주지, 1958년 조계종 총무부장 권한대행,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0년 중앙종회 의장직을 수행하시며 불교의 현대화에 체계화에도 힘쓰셨습니다. 또 1970년부터는 통도사 조실로 통도사에 주석하며 1975년 동국학원 재단이사장, 1979년 조계종 총무원장, 1980년 종정 직무대행 등을 역임했으며 1984년에는 영축총림 방장에 추대되시었고 1994년 종단개혁 때는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같은해 조계종 제9대 종정으로 추대되시어 한국불교의 수행가풍을 세우는데 전념하시다 2003년 12월 4일, 통도사 정변전에서 제자들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우리 곁에 오셨던 자비보살, 영축산의 보름 달, 통도사의 도인으로 후세인들에게 각인을 시키시고 열반에 드셨으니, 세수는 89세요, 법랍은 71세였습니다.


이에 월하대종사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윤청광 선생님이 글을 쓰고 도서출판 중도에서 편집과 제작을 맡아 노천문도회에서 편찬한 탄신 백百주년 기념출판/노천 월하老天 月下대종사大宗師 행장 《영축산에 달 뜨거든》의 내용을 중심으로 월하대종사의 행장을 재조명 해보고자 합니다.


구하 큰스님과의 만남
1933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명근이라는 법명을 받고 출가하여 사집과四集科와 사교과四敎科까지를 배워 마친 월하대종사는 더 큰 공부를 위해 선수행을 하고 싶어 강주스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이에 강주스님이 양산 통도사의 구하대종사를 찾아가라고 권유를 해주었는데, 이때가 1940년 3월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을 《영축산에 달 뜨거든》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삼대대찰三大大刹이 있으니 첫째는 경상도 양산 영축산에 불지종가 통도사佛之宗家 通度寺가 있네.” “하오시면 그 세 군데 종찰 가운데 어디를 먼저 가는 게 옳겠는지요?” “통도사로 가시게. 거기 가면 큰 선지식이 한 분 계시는데 윗자는 아홉 구九자요, 아랫자는 강 하河자, 구하큰스님이시네.” “구자‥하자‥‥큰스님이시라구요?” “황하같은 큰 강 아홉 개가 하나로 합쳐져 흐른다면 얼마나 큰 강인지 짐작하시겠는가?” “아 예, 그토록 큰 스님이 계신다면 해동되자마자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사옵니다.”


가장 아꼈던 제자 홍법弘法스님과의 인연
월하대종사의 문하門下에서는 기라성 같은 수많은 후학들이 배출되었는데, 수많은 후학들이 월하대종사의 드넓은 품안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가르침과 큰 은혜를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홍법弘法스님인데, 홍법스님과의 일화는 특히 유명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영축산에 달 뜨거든》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 홍법은 일찍이 1948년에 월하스님을 은사로, 통도사에서 출가 득도한 후, 1952년 동산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고, 가야산의 해인사, 팔공산의 동화사, 금정산의 범어사, 조계산의 송광사, 계룡산의 갑사, 덕숭산의 정혜사, 태백산의 각화사, 오대산의 범어사, 설악산의 신흥사 등 명산대찰에서 참선수행하고 교학을 탐구하여 종회의원과 강주를 역임한 뒤 통도사 주지로 선임되어 오로지 가람을 외호하다가 갑자기 병마가 닥쳐 투병하고 있었다.


이때 경봉스님을 비롯한 많은 어른 스님들이 “통도사를 팔아서라도 홍법스님은 살려야 한다”고 발을 구를 만큼, 통도사 모든 대중들이 아끼고 존경하며 장차 통도사의 대들보가 될 스님으로 첫손가락에 꼽고 있던 스님이 바로 홍법스님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홍법은 “사사로운 병에 귀중한 사중寺中의 돈을 쓸 수 없다”고 버티면서 병원치료도 거부하고 투약마저도
거절하고 있었다.


월하스님이 이토록 간절하게 제자 홍법의 입원치료를 당부하고 또 당부했으나 홍법은 끝내 병원으로 가지 않고 약 먹는 것조차도 사양한 채 통도사 큰 절 뒷방인 화장찰해 방안에만 앉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제 홍법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월하스님은 제자 홍법의 용태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자 곧바로 제백사하고 통도사로 달려갔다. 월하스님은 허겁지겁 원통방 앞을 지나 홍법이 앉아 있는 화장찰해 방으로 가시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잣말로 한탄했다.
“바보 같이… 제 몸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스승 월하스님이 그토록 아끼고 촉망받으며 통도사의 모든 것을 다 맡기고자 했을 만큼 철석같이 믿었던 제자 홍법은, 결국 1978년 6월 27일 오후 5시,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 정우, 지용, 상경, 현근, 현기, 영재, 상윤을 남겨둔 채 통도사 전재중이 애도하는 가운데 자비보살의 숨결을 거두고 49세의 젊은 나이로 입적에 들었으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아니했으랴.


하심下心의 화신
월하대종사는 또 하심의 화신으로도 널리 알려진 시대의 큰 스승이셨습니다. 끝없이 하심하고, 하심하고 또 하심하는 하심의 화신이었다고 《영축산에 달 뜨거든》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월하스님이 영축총림 방장스님이 되신 이후, 제자들은 스님의 바쁜 일정과 건강을 염려해서 월하방장스님의 면회를 제한하기로 했다. 그전에는 남녀노소, 승속을 불문하고 누구나 월하스님을 아무런 절차와 수속 없이 직접 찾아가 만나볼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사람을 가려서 꼭 친견해야할 용무가 있는 사람만 스님을 뵐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이 친견 통제를 시작한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 월하스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날벼락이 떨어졌다.


“검문소 당장 없애라고!” “검문소라니요 스님?” “이 월하를 만나려고 불원천리하고 찾아오는 분도 있고, 이 늙은 중 만나려고 제백사하고 오신 분도 있는데, 이 월하가 뭐라고, 방장이 뭐라고, 검문소까지 차려 놓고 검문을 해서 누구는 만나고, 누구는 안 만나고, 이런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당장 때려치우라고!” “그건 스님, 스님의 일정도 대내외적으로 복잡하고 또 스님 건강도 걱정이 되고 그래서….” “듣기 싫다고! 내가 뭔데? 월하가 뭔데? 방장이 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도, 월하도, 방장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나 만나러 오는 사람, 누구도 막지 말라고!”


서울 구룡사 정우스님과의 각별한 인연
서울 구룡사 회주 정우스님은 홍법대종사의 상좌이자 월하대종사의 손상좌인데, 특히 월하대종사의 사랑과 배려를 가장 많이 받은 제자 중의 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975년, 정우스님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그날 큰방에서 대중공양을 했는데, 월하노스님을 비롯해서 벽안, 우송, 일암스님까지 통도사의 노스님들이 다 함께 한자리에서 공양을 마친 후에 느닷없이 월하노스님이 색다른 분부를 내리셨다.
“이번 관음재일 법회 법문은 정우스님을 청하도록 하세요.”
월하스님의 이 말씀 한마디에 아직 나이가 어린 정우스님이 대 통도사 법당에서 감히 법문을 하게 되었다. 이 날의 법회에는 월하노스님을 비롯한 벽안, 우송, 일암스님은 물론 통도사의 내로라하는 중진스님들, 그리고 수백 명의 신도들이 법당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는데, 월하노스님을 비롯한 노스님들이 맨 앞줄에 앉아계시니 그 앞에서 감히 법문을 하려니 황송하고 죄송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월하노스님의 분부에 따라 법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니 정우스님은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


“노스님께서 이렇게 앉아계시는 앞에서 감히 말씀드리게 되어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렇게 말문을 연 정우스님은 이 날 옛날 진묵스님과 박복한 진묵스님의 여동생 이야기를 바탕으로 법문을 마치고 노스님들께 죄송스럽다는 인사를 올리자 월하노스님이 먼저 말씀하셨다.
“오늘 법문 좋았다고.”
그러자 옆에 계시던 벽안노스님도 한마디 거들었다.
“법문 듣다가 박수치는 것 처음 보았네요.”
두 노스님은 아직 젊은 정우스님의 첫 법문 데뷔를 이렇게 칭찬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 다음해 정우스님이 서울로 올라와 봉천동의 초라한 토굴에 있었는데, 당시 동국학원 이사장을 맡아 서울에 자주 올라오신 월하노스님이 봉천동 토굴주소를 들고 묻고 물어 찾아 오셔서 격려를 해주셨다. 정우스님은 월하노스님의 격려에 용기백배해서 구룡사 건축불사에 매진했다. 구룡사 건축불사 당시 어려웠던 사정을 정우스님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노스님께서는 구룡사 신축불사를 위해 몇 번이나 친히 오셔서 법문을 해주셨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이 구룡사는 월하노스님이 지어주신거나 다름이 없지요. 월하노스님은 저에게는 부처님이셨습니다. 땅만 사두었지, 빈손으로 시작한 신축 불사라 정말 재정적으로 어려웠습니다. 하도 어려워서 제가 통도사에 모시고 있는 부처님 금란가사를 서울 구룡사로 모시고 와서 금란가사 친견법회를 열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지요. 모두들 반대했어요. 1천 4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절 밖으로 나온 일이 없는 부처님 금란가사를 감히 어떻게 서울까지 내보내느냐, 당연히 반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월하노스님은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이 귀중한 금란가사를 어떻게 모셔가겠느냐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금란가사가 걸려있는 상태 그대로 헬리콥터로 모시겠다고 그랬지요. 그랬더니 월하노스님께서 아이디어를 내셨어요. ‘금란가사를 눕혀서 모시면 될 것 아니냐?’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오동나무 상자를 짜고 한지를 정성으로 깔고 금란가사를 눕혀서 모신 뒤, 르망 승용차로 서울까지 왔지요.”


아름다운 황혼… 거룩한 열반
월하대종사는 이렇게 보살의 화신으로 100여 년 전 우리 곁에 오셔서 평생을 한국불교의 중흥발전과 승풍진작을 위해 헌신하시다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한 제자가 울음을 삼키며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다음에 또 통도사로 오실랍니까?” “그거야… 자작자수自作自受하는 긴데 내가 어찌 알겠냐고….” 스님은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그리고 스님의 숨소리가 점점 사그러져 가고 있었다. “스님!” “스님!” 제자들이 고개를 떨구며 스님의 손을 움켜잡았으나 스님의 손은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 서기 2003년 12월 4일, 통도사 정변전에서 제자들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우리 곁에 오셨던 자비보살, 영축산의 도인, 영축산의 보름달, 노천 월하老天 月下 큰스님이 열반에 드셨으니, 세수는 89세요, 법랍은 71세였다. 이윽고 불보종찰, 국지대찰 영축산 통도사 월하대종사의 열반을 알리는 장중한 범종 소리가 서른세 번 울려 영축산을 뒤흔들고 구만리장천까지 번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