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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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전통의 형이상학과 실천이론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이번 호에서는 ‘불교의 지각이론’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한국불교’의 핵심 철학 개념 중에서 ‘진여’ 또는 ‘본래면목’ 등으로 표현되는 소위 ‘일심’에 대하여 변증하기로 한다. ‘전통적인 한국불교’는 대승을 믿는 불자인데, 그들 중에는 출가자도 있고 재가자도 있다. 이하에서는 재가와 출가를 모두 포섭하여 논하기로 한다.
대승 불자들은 부처 소위 법신불法身佛을 믿고, 또 법신 부처님이 설했다고 하는 경전을 읽는다. 이들이 읽는 대표적인 경론으로 『화엄경』, 『대승기신론』, 『범망경』 등이 있다. 소위 대승의 3장藏인데, 이들의 3장에 등장하는 중심 용어 중의 하나가 소위 ‘법계法界’, ‘진여眞如’, 내지는 ‘일심一心’ 등이다. 남종선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또는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지만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사태를 지칭한다.
위에서 필자는 ‘지각이론’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여기에 말하는 지각知覺에는 ‘명상 수행을 하는 사람의 직관’에 의해서 알려진 ‘지각 내용(=지식)’의 하나로 중생들 각자의 마음에 (또는 마음 속에) 실재하는 ‘그 무엇’에 관한 지식을 꼽을 수 있다. ‘그 무엇’이란 ‘법성’ 또는 ‘진여’ 등을 지칭한다. 즉 명상 수행자들은 직관이라는 ‘지각 방법’을 사용하여, 제 마음에 실재하는
‘그 무엇’을 ‘체험해 얻는데’, 이것을 한자로는 증득證得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게 체험되는 ‘그 무엇’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에 본래적으로 항상 존재한다. 『대승기신론』에 따르면 ‘그 무엇’ 속에는 ‘지혜롭고 (스스로를) 정화하는 기능(智淨相)’과 ‘불가사의한 업의 기능(不可思議業相)’이 있다고 한다. ‘그 무엇’을 화엄학자들은 ‘법성法性’이라고 부르고, 남종선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 등으로 부른다. 신앙적으로는 그것을 법신불法身佛이라 부르는데, 줄여서 ‘부처’ 또는 ‘부처님’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불교도들이 믿는 부처님은 그런 법신부처님이다.


2.
이 ‘법성法性’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문맥 속에서 사용되는데, 생명체(衆生)들이 사는 공간을 설명하는 문맥에서는 ‘법계法界’로 표기하고, 생명체(衆生) 그 자체를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문맥에서는 ‘진여眞如’로 표기하고, 생명체(衆生) 중에서도 특별히 인간을 설명하는 문맥에서는 ‘일심一心’으로 표기하며, 한편 남종선에서는 ‘주인공’ 또는 ‘부모가 낳아주기 이전의 본 면목’ 등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긴 불교의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지시하는 내용은 동일하다. 이렇게 언어적 명칭은 붙이지만, 그 언어에 상응하는 ‘실체성(有實)’도 ‘형상(相)’도 없다.
이것은 ‘일심사상一心思想’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화엄경』에 의하면 ‘일심’ 위에서 소위 12지支 연기緣起가 펼쳐진다고 한다. 12연기의 각 지支 하나하나는 모두 공空하고 무상無常하지만, ‘일심’은 본바탕이므로 영원하다. 『원각경』에서는 그것을 ‘원각圓覺’으로 표기한다. 이것이 다양한 갖가지 중생들의 근본이며, 또 중생들이 사는 온갖 세계의 근본이며, 깨달음의 근본이다. 소위 3종種 세간世間이 모두 ‘일심’ 또는 ‘원각’ 위에서 펼쳐진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것을 중생들의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진여眞如’라고 했다. 이 ‘진여의 마음(眞如心)’에 ‘생-주-이-멸하는 마음(生滅心)’이 수반隨伴하여, 우리 인간들의 다양한 생각을 지어내고, 또 우리에게 행동하고 말하게 한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당송시대의 남종선南宗禪에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일찍이 이런 입장을, 당나라 시대 선어록에 나타난 지식이론은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에 입각한 불성사상佛性思想’으로 정리하여 발표한 적도 있다. ‘진여연기론’은 선종만이 아니고 당나라 시대에 이미 중국화된 불교사상인 천태·화엄·선종이 모두 ‘진여연기론’을 수용하고 있다. ‘진여연기론’의 기초가 된 논서는 물론 『대승기신론』이다. 이 논서가 중국에서 만든 작품이라고 논의되는 것도 이 논서의 이러한 내용과 관계있다. 이 논서를 기반으로 성기설性起說을 개발한 중국의 불교사상은 역사상의 인물인 인도의 석가모니의 연기설緣起說에 모순이 된다고 비판하려는 시도도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언급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다른 호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기로 하겠다. 한편, 필자는 우리의 전통적인 수행이론을 ‘돈오무심頓悟無心’으로 정리했다.
‘진여연기설에 입각한 불성사상’이란 진여를 기본으로 해서 연기설을 설명하는 것이고, 한편 ‘돈오무심사상’이란 그 자신의 ‘불성’을 단박에 자각하여 무심하게 그 본래성에 내맡겨 사는 것이 수행자의 궁극적 삶이라는 사상이다.


3.
진여가 무명을 만나 삼라만상으로 전개하는 ‘기틀’을 아리야식이라고 하는데, 법상종 계통에서는 이 아리야식을 생멸하는 ‘망식妄識’으로 간주하는 한편, 진여연기설을 주장하는 법성종 계통에서는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으로 정의한다. 진여에는 인연과 결합하여 변화하는 작용과, 어느 경우에도 변화하지 않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인연과 결합하여 변화하는 진여의 작용 때문에 중생들의 번뇌의 차별상이 현실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변하는 진여의 작용성은 불생불멸한다. 이 불생불멸하는 진여의 작용을 단박에 자각하는 것이 ‘돈오’이다. 그리고 진여를 가리는 번뇌는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므로 그 자체는 무상하다. 그것은 결코 자기동일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무심無心’의 방법으로 번뇌로서의 기능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선종은 진리론으로는 진여연기설을, 수행론으로는 돈오무심 사상을, 이렇게  두 축으로 전개된다. 진여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선불교의 이런 태도는 여타의 불교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 역시 간단하게 비판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다.
진여(眞如 tathat.)의 말뜻은 “있는 그대로의 그 무엇”이다. 매우 난해한 말이지만, 이것은 언어나 사유로 그리고 행위를 매개로 하여 뭐라고 규정하기 이전에 우리 앞에 즉자적으로 주어지는 그 무엇을 말한다. 이것은 말을 바꾸면, 행위·언어·사유 등의 ‘규정방식’에 따라 우리에게 인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타자絶待他者라기 보다는 연기에 의해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규정방식’에 의존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데 ‘규정방식’이 무수한 만큼 진여가 드러나는 양태도 무한하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의 선사들은 진여를 몸소 체험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수행의 당사자가 자기만의 주체적 행위·언어·사유로 그 것을 손상 없이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진여는 있기는 있지만, 수행자의 체험과 그 체험을 드러내어 규정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 이런 진여에는 수연성隨緣性과 불변성不變性이 공존한다. 이것을 『대승기신론』에서는 ‘심진여心眞如’와 ‘심생멸心生滅’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여기서 말한 ‘심心’은 곧 다름 아닌 ‘중생의 마음’을 지칭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표상되는 ‘진여(眞如: 있는 그대로의 그 무엇)’를, 생멸변화를 속성으로 하는 무상한 행위·언어·사유(身·口·意)로 드러내라는 것이다. 그것도 반드시 당사자가 몸소 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드러내는 만큼 실재한다. 선사들의 기상천외의 행동이나 언어도 이러한 그들의 지식이론에 기초한다.
‘돈오무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이번 호에 필요한 부분만 설명하기로 한다. 필자가 사용하는 ‘돈오’는 ‘진여’ 또는 ‘일심’ 또는 ‘본래면목’을 ‘단박에 체험하는 행위’이다. ‘무심’이란 본래면목을 단박에 체험하는 행위를 함에 있어, 일체의 심리적인 조작을 중지함을 뜻한다. 
요약하면, ‘진여’란 ‘본바탕’이 있고, 그 ‘본바탕’ 위에서 다양한 ‘업業 현상’이 인연 조화에 따라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또 생기는 일이 쉼 없이 계속된다. 한국의 전통적인 불교 사상에서는 바로 이런 연기의 소산인 ‘업 현상’에 휘둘리지 말고, ‘본바탕’을 몸소 체험하여, 그 ‘본바탕’에 갖추어진 ‘불가사의한 기능’과 ‘지혜롭고 정화하는 기능’을 꾸밈없이 사용하면서, 태어나는 세상마다 형편 것 자신의 ‘업 현상’을 소멸시키고, ‘긴 생명의 길’ 속에서 마침내는 한 톨의 ‘업 현상’마저도 없애서, ‘본바탕’ 그 자체만 남기라는 것이다. 이리 되면 더 이상 윤회에 들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ananda@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