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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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들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우연찮게 알게 된 한 재가불자모임이 있습니다. 은행에서 일하다 명예퇴직·정리해고된 이들이 매달 한 차례씩 모여 전국의 좋은 사찰을 순례하는, 꽤 오래된 모임입니다. 회원들은 전세버스로 오가는 길에 모임 회장 등으로부터 강연도 듣고, 운이 닿으면 절 집 큰스님을 뵙고 법문도 얻어 듣습니다. 그런데, 20년 넘게 이 모임이 이어져온 힘은 부처님 말씀에 대한 갈증 못지않게 같은 상처를 지닌 이들끼리 나누는 따뜻한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아픈 이들끼리 한 데 모여 서로에게서 위안을 얻고, 그 힘으로 더 큰 사랑과 이해, 수용과 성찰의 시간들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이 모임에는 철칙이 하나 있습니다. 형편이 좋든 궂든, 회비는 똑같이 분담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살림이 넉넉한 이가 있어 ‘오늘 내가 한턱 낼게’하고 제안하더라도, 또 그것이 부의 과시나 모임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염두에 두지 않은 순수한 마음의 발로라 하더라도, 정중히 사양한다고 합니다. 부담에 차별이 생기면 불화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의도와 무관하게 존재감에도 우열이 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 이제 그 전통이 굳어져 그런 제안을 하는 이도, 기대하는 이도 없다고 합니다. 그 덕인지 어쩐지는 모를 일이나 어쨌건 그 모임은 여태 부자든 빈자든 오직 ‘하루 출가’의 도반으로 동등하게 어울리며 수양한 뒤 각자의 삶의 공간으로 되돌아가는 고요한 일상을, 108배 올리며 염주 알 굴리듯, 반복하고 있습니다.
혹시 ‘너무 각박한 거 아냐? 왕년의 직장 동료들끼리 형편에 맞춰 할 수도 있는 거지’라고 불편한 심정으로 반문할 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그 모임 구성원들이 고집해온 전통이 전적으로 옳은 판단이라고 편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돈의 힘, 그 부작용의 가능성에 대해 철저히 경계하고 스스로 삼가자는 마음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들은 왕년의 은행원들입니다. 어쩌면 돈의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운동논리를 누구보다 속속들이 들여다봤고, 그들 스스로가 돈으로 환산되는 경쟁 논리에 의해 좌절한 이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은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고, 우리가 원하는 표정으로만 바라봐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은 우리의 희망을 배반할 때가 훨씬 많죠. 흔히들 말하는 “우리 사회에서 돈 가지고 안 되는 게 어디 있냐”는 말처럼 속되고 천박한 말도 없지만 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원리를 적나라하게 담아내는 말도 드물 겁니다. 돈이 권력이 된 지는 자본주의의 역사보다 훨씬 오래됐습니다. 앞서 돈은 우리의 희망을 배반한다고 했지만, 그 배반이란 곧 결핍입니다. 결핍은 욕망을 잉태하고, 욕망은 번뇌를 낳지요. 부처님이 인생은 고해(苦海)라 하시며 탐욕의 본능과 경계(警戒)의 어려움을 안쓰러워 하신 것을 우리는 무겁게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최근 잇달아 불거진, 속된 말로 ‘아싸리판’을 방불케 하는, 종교계의 돈과 권력 추문 때문입니다. 서울 신사동 소망교회에서 벌어진 목사와 부목사간 폭행 사태, 또 다른 교회 목사의 여신도 성추행 파문, 교회 자금 횡령 사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회장 금권선거에 따른 갈등과 내홍, 세계 최대 교회라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 일가의 교회 사유화 논란과 고발 사태…. 공교롭게 최근 불거진 것들이 그러해서 개신교 사례들만 거론됐습니다만, 불교나 여타 종교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 추문의 파장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수년 전 참여불교재가연대가 발행하는 계간 ‘참여불교’가 1990년대 이후 사유화 세습화 권력화 보수화하고 있는 한국 종교계의 부정과 부패구조를 해부한 기획 ‘이제, 종교개혁이다- 종교의 권력화를 타도한다’라는 글을 보면 비판의 화살은 불교 가톨릭 개신교 교단을 모조리 겨냥하고 있습니다. 대문중의 종단 지배력 강화나 교구 본사내 핵심 그룹의 권력 과점화 양상, 세속 정당의 정치 세력화를 방불케 하는 종단 모임들의 권력화 경향도 마땅히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사찰을 사고 파는 과정에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해 관청에 민원을 넣어 건폐율 용적률을 높이고, 경관과의 어울림과 현실적 쓰임새에는 아랑곳없이 불사를 감행하는 절도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건 불사가 아니라 투자지요. 신도들의 헌금을 종자돈 삼아 탐욕의 성채를 쌓는 짓이고, 부처님 말씀을 호객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짓이지요. 최근 한 일간지에 ‘신도 OO명, 권리금 O천만원- 교인들도 놀라는 교회 매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개척교회 목사들이 교회를 키워 팔아 사욕을 챙기고, 그런 이들을 위해 교회 부동산 매매를 전문적으로 거간하는 인터넷 사이트도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불기 2555년 부처님 오신날(5월 10일)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에겐 가장 큰 축복의 날입니다. 전국 사찰 마당에는 울긋불긋 크고 작은 연등이 하늘을 가릴 만큼 내걸릴 것이고, 연등마다에는 각종 기원의 축문과 가족친지의 이름들이 조롱조롱 매달릴 것입니다. 제 이름자가 적힌 작은 연등도 어느 절 마당 한 귀퉁이에 걸려, 제가 마음에 품은 연등만큼 소박한 축원의 불꽃을 밝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선택할 보잘것없는 연등이 저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고, 마음으로 밝힌 등이 가장 밝게 부처님의 뜻을 밝힌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저의 축원이 세계 평화나 인류의 안녕과 같은 공동체적 차원의 기도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이나 일신의 안녕을 바라는 작은 마음에 머문다고 해서 많이 부끄러울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따금 부처님께 절을 올린 뒤 가부좌 틀고 앉아 잠깐 상념에 잠길 때도 마음 안의 자잘한 욕망들로 늘 어지러운 중생일 뿐입니다. 다만 저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이기적 기도를, 제가 다니는 절집 스님들의 큰 기도와 종단의 큰 뜻이 올바르게 이끌어주리라는 믿음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연등을 사면서, 또 부처님께 절을 올린 뒤 불전함에 넣는 작은 돈들이, 제 좁은 욕망의 담장 너머로 퍼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푸근한 얼굴로 다가가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부처님도 저의 이기적 기도를 너그러이 받아주시리라 여기는 것이죠.
어느 글에서 20세기 영국의 과학철학자 화이트헤드가 “나는 기독교 신학이 인류의 커다란 재앙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저 말의 참 의미가 뭔지는 모르지만, 그가 우려한 바가 어떤 건지는 혼자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또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종교는 대중들에게는 진실로 여겨지고, 현자에게는 거짓으로 여겨지며, 통치자들에게는 활용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 역시 전적으로 공감하진 않아도 현실의 어떤 맥락에서는 수긍할 수 있습니다. 저 거칠고 불편한 말들을 이해하고 수긍한다는 이가 갈수록 더 많아진다면, 그것은 종교의 불행이기 이전에 인류의 불행일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과연 부처님이 오늘 이 땅에 다시 현신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주실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마음으로 맞이하는 빈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모두가 참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들을 잠시 떠올려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