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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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사(慈恩寺)

김지상
화광전통미술연구소
중국국가박물관수복연구원


서안(西安)은 중국의 고도(古都)로서, 우리나라의 경주와 같은 곳이다.
진시황(秦始皇)의 병마용(兵馬俑),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 자은사(慈恩寺)의 대안탑(大雁塔)과 소안탑(小雁塔) 등 볼거리가 아주 많은 도시이다. 이 중에서 현장법사(玄奬法師)와 연관이 있는 자은사 대안탑에 대해서 알아보자.
자은사는 황실에 의해 건축되어진 사찰로, 다른 사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당시 장안성 최대 사원 중 하나이다. 자은사는 당 고종(唐 高宗)이 어머니 문덕황후(文德皇后)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황실사찰이다. 
정면에 있는 대웅보전은 나지막한 건물로, 안쪽으로는 들어 갈수가 없고 밖에서만 참배를 할 수 있게 되어있다.
건축 당시에는 절 내에 승방(僧房)이 1,897칸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크기의 34.5배에 달했다고 한다. 건축물 역시 황실사찰답게 매우 화려하고 장엄하게 축조를 하였다. 전당(殿堂)과 탑원(塔院) 그리고 회랑(回廊)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급목재를 사용하였고, 주옥금취(珠玉金翠)와 오안육색(五顔六色)의 채회를 하였다. 오도자(吳道子), 윤림(尹琳), 염립본(閻立本), 정건(鄭虔), 왕유(王維) 등 당시의 저명한 화가들이 자은사에서 벽화를 그렸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그렇게 거대했던 자은사는 당나라 말 전란에 의해 모두 훼손이 되고 현재는 대안탑 만이 남아 자은사의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당말 이후에는 여러 번 중수의 과정을 거치기는 하였지만, 모두 당대의 규모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사원 건축은 당대의 서원(西院)에 해당된다. 지금도 자은사는 계속해서 복원 중에 있다. 대웅보전 뒤로 큰 탑이 보이는데, 이 탑이 서안에서 자랑을 하는 대안탑이다.
대안탑은 현장법사와 당 태종(太宗)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탑으로, 두 사람의 일화는 아직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현장법사가 불경 번역을 위해서 소림사(小林寺)에 가려고 하자 태종은 그가 멀리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대신 경성의 홍복사(弘福寺)에 머물면서 경전을 번역하게 하였다. 또한 태종은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를 지어 현장법사의 도력을 찬송하기도 했다.
대당삼장성교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명무익이장비(名無翼而長飛) 도무근이영고(道無根而永固)” 이름은 날개가 없어도 길게 날고 도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확고하다.
현장법사의 명성과 그가 전한 불법이 영원히 확고하다는 의미와 현장법사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을 것이다. 
현장법사는 당나라 때의 고승으로 중국불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경사(譯經師 경전을 번역하는 스승) 중 한 명으로, 법상유식종(法相唯識宗)을 창시했다. 서유기(西遊記)에 등장하는 손오공의 스승인 삼장법사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 속세의 성은 진(陳), 이름은 위(褘)로 낙양 동쪽에 있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언사시(偃師市) 출신이다. 10세에 낙양 정토사(淨土寺)로 출가해 13세에 승적에 올랐다.
불교 연구에 한계를 느낀 현장법사는 불교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627년 인도로 떠났다. 인도의 나란다 사원에 들어가 계현(戒賢 : 시라바드라) 밑에서 수학을 했고 641년 많은 불교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랐다. 645년 당나라 조정의 환영을 받으며 장안으로 돌아왔다. 태종(太宗)의 후원을 받아 74부 1,335권의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한 이외에도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을 저술했다.
태종은 현장법사와 함께 인도의 이야기와 불교의 법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당시에는 도교가 성행을 하였지만 태종은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불교 중흥에도 앞장을 섰다. 어릴 때 몸이 약했던 태종은 부친이 부처님의 가피를 입으라는 의미로 불상을 조성해서 사찰에 모신 것이 인연이 되어서 불법을 널리 홍포하는데 앞장섰다. 따라서 태종 때에 중국불교가 가장 번성했다고 한다.
현장법사는 17년이나 걸린 여행 끝에 인도에서 657부의 불경과 150과의 사리, 8기의 불상을 가지고 중국으로 왔다. 가져온 불경과 사리는 652년 건립 당시 인도식 양식의 불탑이었던 대안탑에 보관이 되었다. 대안탑이란 명칭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기러기 설화가 가장 신빙성 있다.
인도를 향해 가던 현장법사가 어느 날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렸는데, 그 때 어디선가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서 길을 인도해 주었다. 부처님이 기러기로 현신하여 자신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하여 훗날 인도에서 돌아와 탑을 짓고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해 안탑(雁塔)이라고 했다는 설이다.
현재의 모습은 7층의 누각식 전탑으로, 총 높이가 64m에 이르고 기단부의 둘레는 25m이다. 외부는 벽돌로 쌓아졌지만, 탑 내부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다. 탑 안의 계단은 284개이고 제일 높은 층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어있다.
탑 남쪽 입구 양쪽에 두 개의 작은 방이 있는데 우실(右室)에는 당태종 이세민의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 비석이, 좌실(左室)에는 당고종 이치의 “대당삼장성교서기(大唐三藏聖敎序記)” 비석이 안치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삼장법사의 공덕을 찬양한 것으로, 글씨는 당나라 때 유명한 서예가 저수량(遂良)의 작품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두보(杜甫) 등 많은 시인들이 대안탑에 올라와 많은 문구들을 남겼다고 한다.
진사에 급제를 하면 대안탑에 올라와 벽면에 글귀를 남기고는 했다고 한다.
당대의 시인인 백거이(白居易) 역시 진사에 급제하고 자은탑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자은탑하제명처(慈恩塔下題名處) 십칠인중최소년(十七人中最少年)” 자은탑에 친필을 새긴 17명 중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라는 글귀다.
처음 탑을 세울 때는 5층이었는데, 701년에 7층으로, 다시 당 대종(代宗) 때 10층으로 개축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높이 64.5m에 4각 7층탑으로 남아있다.
중국 사람들은 대안탑을 한 층씩 오를 때마다 수명이 1년씩 늘어난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대안탑에 오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