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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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함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

얼마 전부터 ‘트위터’라는 걸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몇 가지 이유로 SNS라는 것 자체를
기피해왔는데, 일과 관련된 이유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 탓입니다.
평소 친분 있는 몇 사람을 ‘팔로우’ 하면서 그들이 짧은 글로 올리는 일상과 생각들을 읽는 것은 뜻밖에 흥미로웠습니다. 트위터 글들은 책이나 공적인 매체에 발표하는 정제된 글과 달리 덜 다듬어져서, 글에서 술 냄새 땀 냄새가 날 때도 있고, 침이라도 튈 것 같은 흥분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누군가의 표현처럼, 그 짧은 글들이 정말 말과 글의 중간 단계에 있는 언어인지 모르겠다 싶어지기도 합니다.
하루 이틀 그 공간의 문화에 젖어 들다 보니 제법 트위터 안의 이야깃거리에도 눈을 돌리게 되더군요. 특정 사안에 대한 논쟁이 있고, 특정인에 대한 비난과 성토가 있고, 대중매체에는 소개되지 않는 소소한 사연들을 찾아 읽게도 됐습니다. 거기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논쟁들을 때로는 구경꾼으로, 또 때로는 말 없는 심판자처럼 살펴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팔로우 숫자가 그 사람의 권위나 영향력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수만 수십만 명의 팔로우를 거느린 파워 트위터리안이 그 ‘파워’를 얻고 유지해온 요령이 어쩌면 다수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요령 있게 대신 잘 해주는 능력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건방진’ 생각을 해볼 만큼 익숙해졌습니다. 다시 말해 트위터 권력이란 내 편일 때에만 권력이라는 생각, 내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순간 여지없이 흔들리는 기반 위의 권력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과 무관하게, 트위터가 저를 감탄하게 한 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트위터 글을 통해 일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지적·정서적 순발력입니다. 둔한 저로서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내릴 수 있을까 싶은 어떤 논쟁적 사안에 대한 판단이나 선택을 즉각적으로, 또 확신에 찬 단정적 어조로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더라는 겁니다. 물론 그런 글과 정 반대의 주장을 담은 글도 있습니다. 그런 글들은 각기 동조하는 이들끼리 사이버 공간 안에서 진영을 이루게 하고, 더러는 수구와 진보, 야당과 여당, 야권 내 특정 정치인을 옹호하거나 배척하는 논리로 수렴돼 대립하기도 합니다. 그런 글들을 따라 읽다 보면, 우물쭈물하기 일쑤인 저로서는, 이 글을 보면 이게 옳은 것 같고 저 글을 보면 저게 옳은 것 같아 더 혼동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트위터에서처럼 익명의 구경꾼으로 남을 수 있을 때는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조직이나 집단의 일원으로 어울려 살다 보면, 스스로 원하지 않더라도 어떤 선택적 상황에 개입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특정 문제에 대한 견해나 조언을 요구 받을 때도 있고, 어느 한 편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편가름의 양상이 극명할수록, 대립이 격렬할수록, 온건한 중간지대는 협소해지고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남기 힘들어집니다. 그럴 때면 개인은 자석 위의 쇳가루처럼 음극과 양극으로 몰아가려는 자력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이 꼭 생사나 생계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와 결부되진 않습니다. 또 우리 자신의 이해와 직결되는 문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공인의 부적절한 처신이나 논쟁적인 언행, 정부 정책이나 국회의 입법활동, 영향력 있는 누군가의 특정 사안에 대한 색다른 관점, 직장 상사의 어떤 판단이나 태도에 대해서도 우리는 논평을 하거나 듣게 되고, 그 논평 자체를 두고 갑론을박하게도 됩니다.
난처한 것은 그런 판단의 대상이 늘 실정법이나 관습법의 심판대 위에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경계로 명백히 나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누구나 손쉽게 선악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문제라면 법으로 심판하고 도덕적으로 질타하면 될 터이니 논쟁 자체가 안 되겠지요.
그런 상황에 봉착하게 되면 우리는 각자의 가치관과 윤리적 기준, 취향, 또 부족하나마 관련 분야에 대해 대한 지식과 정보를 모아, 트위터 안의 영민한 논객들을 흉내내며 어설프게나마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런 수고는 어쩌면 공동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감수해야 할 도리일지 모릅니다. 특히 그 사안이 공적인 판단이나 정치적인 선택과 연루된 것이라면, 보다 나은 판단을 위해 애쓰는 것이 주권자로서의 의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학자가 식민지시대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를 담은 논문을 발표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됐을 때, 또 어떤 자리에서 그 문제가 화제로 떠올라 옳고 그름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누가 우리에게 ‘당신의 입장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떨까요.


“저는 그 내용을 잘 몰라 뭐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쩌면 “저는 그 문제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먹고 살기도 바빠- 입장이라는 게 없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두 번이면 모를까, 매번 저런 식의 답변을 하게 된다면 그는 그 모임에 구성원으로 환영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 문제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유신시대에 대한 평가처럼 보다 민감하고 논쟁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복지냐 성장이냐를 둘러싼 유서 깊은 갈등에서 파생된 정책적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매번 무관심하게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것은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깜냥대로 소신껏 판단하더라도 그 소신을 밝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다행히 자신의 소신이 다수의 견해와 같다면 모르지만, 그것과 맞설 경우 소신을 밝히는 것 자체가 힘들 수 있습니다. 고립적인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떤 판단과 선택을 강요 받고 그 선택이 강제하는 진영적 관점 안에 갇히기 십상입니다. 그런 논리 속에서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란 자신의 선택과 판단을 가장 선명하고 명쾌한 논리로 지지해주는 ‘우리 편’ 사람이기 쉽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고민하던 끝에, 가뭄 속 단비처럼, 트위터에서 강대권(@kangdk)이라는 분이 쓴 이런 글을 만났습니다.
“돌이켜보면 이제껏 내가 범했던 치명적 실수의 대부분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확실하다고 외쳤던 나의 주장이 주변에서 인정받거나 동조될 때 발생했다. 내가 가진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나에게 독이었음을 깨닫는데 꽤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무엇이든 배우고 나면 앎의 누적을 통해 자신감이 커지기보다는 과거 스스로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달으며 부끄러움이 커지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후회와 창피함이 가득한 순간에 그래도 조금이라도 한 발 나아가지 않았을까, 이 말이 희망을 준다.”
트위터는 ‘재잘거림’이라는 트위터 어원처럼 즉각적이고 짧은 담화의 형식을 띱니다. 그러다 보니 간략하게 빨리 전파할 수 있다는 장점이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낳기도 하고, 설익은 생각이 어설프게 표현돼 그 말의 감옥 안에 스스로 갇히기도 합니다.
저 분의 글을 읽으며 저는 성공회 신앙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포괄성의 원리(via media)를 떠올렸습니다. 진리는 두 상반되는 견해 사이의 긴장을 유지함으로써만 제대로 알 수 있고, 또 지킬 수 있다는 이해. 실체가 뭔지 끝내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모호함이 아니라(신학적으로조차)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이 서로 더불어 지낼 수 있고, 어떤 새로운 경험이 생기거나 복잡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열린 마음으로 그에 대한 온갖 해석을 대하는 한편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불확실함과 더불어 지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써의 모호함이라고 합니다. 존 웨스터 호프 사제라는 분이 쓴 ‘성공회 신앙의 특성’이란 글에서 인용한 저 모호함의 정신은 트위터의 장점을 살리면서 그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지혜일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생각했습니다.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 선명하고 단호한 대응은 대결의 문법, 전시戰時의 매뉴얼일지 모르지만 성숙한 시민사회의 운영방식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모호함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 불확실함과 더불어 지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