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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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날 선근인연善根因緣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원전법상鹿野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이로다.”


팔상성도八相成道는 석가여래 부처님께서 도솔천 내원궁에서 호명보살로 계시다 사바세계에 강림하시어 성도하시고 전법의 길에서 열반하시는 길을 상징적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2649년 전 음력 4월 초파일에 도솔천에서 사바세계에 오셨습니다. 바로 비람강생毘藍降生,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신 날입니다. 이후 80여 성상을 우리들과 함께 하시다가 2569년 전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 팔상성도에는 2649년 탄생하시여 29세에 유성출가하시기 전, 동서남북 성문을 통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실상을 마주하시고 고요한 사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출가를 결심하신 일이 곧 사문유관의 인연입니다. 이처럼 성곽의 사방에는 서울의 남대문, 동대문, 숭례문처럼 그 문을 통해 삶과 죽음의 진실을 직접 보신 것입니다. 6년 동안의 설산에서 고행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6년 내내 설산에만 계셨던 것은 아니라, 마지막에는 전정각산 밑, 니련선하 강가로 내려오셔서 수자타 소치는 소녀에게 유미죽을 공양 받으시고 지금의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정진을 하시며 마왕의 항복받으셨습니다. 45년 동안 전법傳法의 길을 걸으시다가 2569년 전 2월 보름날 사라쌍수 나무아래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내가 열반에 드는 것을 보고 그것을 죽음으로 알지 말아라. 열반은 죽음이 아니니라. 죽음이란 이 몸(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육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육신은 여기에서 죽더라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의 길에서 살아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나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지는 2649년 전이요, 열반에 드신 지는 2569년 전이라는 연대가 명확한데도 왜 부처님오신날을 열반일로 정해졌을까요?
오늘 축원문에서도 상기시켜드렸듯이 청정법신淸淨法身, 원만보신圓滿報身,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으로 바라볼 때 분명해집니다. 부처님의 열반은 단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진리의 생명이 꽃 피워진 날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 가르침을 통해 직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오신날을 단순한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삶과 열반을 통하여 우리 인생의 길잡이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진리의 깨달음, 그리고 자비의 길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면 늘 떠오르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꽃보라 휘날리는 룸비니 동산
한줄기 찬란한 빛이 우주를 덮고
거룩한 구담 고오타마 실달 태자 탄생하실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 큰 소리 온 누리에 퍼지네.
사뿐히 자욱 마다 비치는 연꽃
태양보다 밝은 등불 드높이 드옵시고
사생四生의 모든 고난 녹여 주신 님
이 세상에 오신 날, 4월 초파일.


이렇게 아름답게 남겨진 시 한 편이 있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은 많이 회자되는데,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 하도다.” 하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라는 아我자는 2인칭 복수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존귀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는 욕심과 물질, 비물질의 세상이며 그 모두가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계입니다.
그 안에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이라는 육도六道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생명의 발생지가 사생四生이라 하여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으로 나뉘는데, 그 중생들은 끊임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을 겪는 모든 중생을 편안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룸비니 동산에 태어나신 날이 바로 4월 초파일입니다. 부처님의 탄생성지 룸비니를 처음으로 순례했을 때는 83년 2월, 벌써 40여 년 전 일입니다. 단수 여권으로 홀로 인도 순례를 하며 룸비니 동산에서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맞이한 새벽, 수백만 평 숲속에서 들려오던 새들의 노래는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그 감흥을 글로 써보려 했는데 밤을 꼬박, 그 다음 날까지 써내려가도 글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이러다가는 정신적으로 무너질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 글 끝맺음을 “룸비니 동산은, 룸비니 동산은, 룸비니 동산이었다.”
그 끝을 맺으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 예찬의 문장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수십 장을 써도 끝나지 않았던 감정은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젊은 청년 출가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수행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무렵이었고, 그 길 위에서 부처님의 제자 된 것이 너무나 기뻤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을 덜고 깨달음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BTN 불교TV의 〈뜰 앞의 잣나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개국 30주년을 맞아 제가 95년부터 98년도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방송국 소임을 맡았던 인연으로 저를 조명하자는 취지로 방송하게 된 듯하였습니다. 절제된 언어로 회고했음에도 1부 2부로 나뉜 그 방송에서 제 삶의 자취가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방송에서도 부처님의 일이란 불사佛事라고 하였습니다.
절을 짓는 일만 불사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하셨던 그 일들, 곧 중생을 위하는 일, 그것이 참된 불사입니다. 언제나 모든 중생을 위하여 실천하셨습니다. 『무량수경』에서도 “한 부처님이 출현하시면 만 중생이 깨달음을 얻고, 한 도량이 이룩되면 사바세계가 곧 극락정토로 이루어진다.”
부처님의 출현은 단지 한 성인의 등장이 아니라, 온 생명의 깨달음을 이끄는 위대한 전환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 하나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함 이였습니다. 모든 중생의 마음의 눈을 맑고 밝게 열어주시고자, 모든 중생이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이끄시고자 이 땅에 출현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일러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합니다. 열어 보이시고, 깨닫게 하시고자, 그 깨달음으로 들어오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보여주신 것도 단지 인간의 삶을 따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중생들에게 구원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한 화신化身이셨던 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건강이 여의치 않으실 때에는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법문을 일찍 마쳐야겠다.” 이렇게 하신 적도 있었고, 가섭 존자나 사리불 존자, 혹은 목련 존자에게 법문을 청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삶을 함께하시며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것은, 우리도 그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근본 불사이며, 정진의 길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태어남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본성本性을 금金으로 비유 하자면, 우리 모두의 본성품은 순금덩어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또는 십업十業으로 인해 그 모습의 형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우리는 윤회를 할 때 스스로의 원력願力에 의해 환생하는 것이 아니라 업력의 인연으로 연기법에 따라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본래 금덩어리와 같은 본성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불구부정不垢不淨이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한 자리입니다. 거기에는 생멸이 없고, 증감이 없으며, 아름다움과 추함이 없고, 크고 작음도 없고, 길고 짧음도 없고, 앞과 뒤가 없고, 좌우가 없는, 그야말로 청정한 본성의 자리입니다.
부처님 몸에는 태어남이 없습니다. 우리도 본질적으로는 태어남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늙음이 있으리요? 단지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 육신, 이 몸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부처님께는 복덕과 지혜, 공덕功德이 가득할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노쇠한 모습을 보여주신 것도 세상의 관례를 따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중생들은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지 않고 방종하며 두려워할 줄 모르면 온갖 고통과 괴로움이 몸을 얽어매어 결국 재앙만 만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탐욕을 여의어야 성내지 않게 되고, 어리석지 않아야 화내지 않게 됩니다. 차라리 불구덩이에 들어갈지언정 탐욕을 즐기며 사는 삶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품 안에서 따뜻한 가정을 발원하는 것도 복덕과 지혜가 구족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좋은 도량을 가까이하고 있을 때, 하루라도 더 신심을 내고 발심하는 불자의 길을 함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