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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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위를 살피는 삶의 시작은 보리심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봄비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감로수甘露水라고 합니다.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움츠렸던 생명들을 다시 일으키는 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긴 연휴를 맞아 지방으로, 해외로 떠나는 모습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뉴스에서도 그런 풍경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은 바로 삶의 현실적인 일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는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힘차게 일어나 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는 “오늘 밤이 마지막 밤이지~~~”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사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마음이 보리심菩提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옛 어른들의 가르침 중에 “물쐐기 같은 신심, 누에고치같은 인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농촌에서 논에 들어가 일을 하다 보면 물쐐기를 자주 만났습니다. 요즘은 기계 영농을 하고 장화나 작업 장비도 좋아져 직접 물속에 들어갈 일이 줄었지만, 옛날에는 물쐐기에 쏘이면 크게 고생했다고 합니다. 특히 물꼬를 트는 자리, 윗논에서 아랫논으로 물이 흘러가는 곳에는 물쐐기가 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쐐기에 쏘이면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할 정도입니다. 농부는 그것을 알면서도 삽을 들고 물꼬를 터주러 갑니다. 오히려 물쐐기를 잡으러도 갑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수행자의 신심信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고된 일을 감당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작은 번뇌와 유혹에도 쉽게 흔들리고 말 것입니다. 누에는 21일 동안 뽕잎을 먹으며 살다가 스스로 실을 뽑아 몸을 칭칭 감싸 고치를 만듭니다. 마치 스스로 궁궐을 짓듯 자신을 단단히 둘러싸지만, 그 누에고치는 뜨거운 물속에 삶아져 실이 뽑히고 비단이 됩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스스로 만든 욕망과 집착의 틀 속에 갇혀 살다가 결국 낭패를 겪는 일도 있습니다. 옛 어른이 전하고자 했던 뜻도 그것일 것입니다.
물쐐기처럼 남을 해치며 살아서도 안 되고, 누에고치처럼 스스로를 욕망 속에 가두고 살아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환경에 자신을 함부로 노출시키지 말고 바르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랴.”
출가 수행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이 글을 볼 때마다 오늘의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을 보면 정치를 소명으로 삼기보다 직업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이 적지 않습니다.
청문회나 국정감사 같은 자리를 보면 국민의 대표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국민을 향해 큰소리를 치고 윽박지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국민이란 이름 속에는 이름 없는 민초民草, 들풀 같은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민초들을 위해 존재해야 할 이들이 오히려 군림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서산대사는“편안함과 한가로움을 구하기 위함도 아니요,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기 위함도 아니며, 명예와 재산을 구하기 위함도 아니다. 오직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하셨습니다.
오늘의 현실정치에 비추어 본다면, 정치는 민초들의 어렵고 힘든 삶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곧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통받는 중생들을 건져주기 위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자신의 직분을 다하려는 사람들이 국민의 대표가 되고, 그 자리마다 올바른 책임과 양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서산대사가 수행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봄비가 조용히 세상을 적셔 생명을 살리듯, 우리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살리고 세상을 밝히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곧 수행이고, 그 또한 참다운 보리심일 것입니다.


등불은 스스로를 태워 주위를 밝힙니다. 그러나 수행 정진을 통해 얻어진 지혜의 등불은 단지 자신만을 위한 빛이 아닙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등불입니다. 나눌수록 더욱 밝아지고, 함께할수록 더욱 커지는 등불입니다.
수행은 결코 혼자만의 길이 아닙니다. 내가 밝아지는 만큼 세상의 어둠도 함께 걷어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힘은 곧 우리 사회를 밝히는 소중한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 또한 그러합니다. 신심信心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지혜와 자비를 담아내는 발우鉢盂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큰 자비와 가르침이 있어도 그것을 받아들일 그릇이 없으면 담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믿음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 삶 속에 받아들이는 마음의 그릇인 셈입니다.
보리심菩提心도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신심이 있어야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이 생기고, 자비심과 연민심도 피어납니다. 보살의 수행인 육바라밀六波羅蜜 또한 믿음이라는 근원 위에서만 온전히 세워질 수 있습니다.
육바라밀이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수행 역시 결국 신심이 바탕이 되어야 바르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수행이란 많이 가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고 욕심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욱 겸손하게 자신을 다듬어 가야 합니다. 연등의 불빛이 어둠을 밝히듯, 우리 또한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수행의 등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느 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정작 자신은 사랑할 줄 모르면서 사랑받기만 바란다면, 그것은 어쩌면 가장 이기적이고 편협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받기 전에 먼저 베푸는 데서 시작됩니다. 줄 줄 모르는 사람은 받을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세상은 받는 데에는 익숙하면서도 주는 데에는 인색한 모습이 많아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내가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에는 ‘누가 먼저 사랑했는가, 누가 더 사랑받는가’ 하는 이분논법적인 계산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 길어야 몇십 년을 살아갑니다. 지구의 역사가 40억 년이니, 그 시간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신 지도 2,600여년이 되었습니다. 그 긴 세월의 시간도 나누어 보면, 몇 십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부처님 당시의 인연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길면서도 짧고, 짧으면서도 이어져 있는 세월인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은, 우리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통도사 주지 소임을 맡은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 전 일입니다. IMF 시절 어렵게 시작했던 여래사 불사도 어느새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세월은 찰나와 같습니다. 지나온 20년, 30년을 돌아보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갈지 모릅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립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어린 시절 소풍 갔던 고향 절도 떠올려 보고, 예전에 인연 맺었던 사찰도 떠올려 보고, 지금 다니고 있는 절도 떠올려 보시라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정성이라도 좋으니 연등불 하나쯤 밝혀 주시라고 권해 드립니다. “어릴 적 뛰놀던 그 절에 등불 하나 밝혀 보면 어떻겠습니까? 구룡사에 오시기 전에 다녔던 사찰이 있다면 그 절에도 등불 하나 밝혀 보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인연 맺고 있는 사찰에도 가족과 이웃들에게 권선하며 함께 공덕을 짓는다면, 그것 또한 아름다운 수행이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악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며, 혹 허물이 있더라도 곧 참회하고 돌이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설령 알더라도 숨기고 감추려 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이는 지혜의 힘으로 무거운 업도 가볍게 받을 수 있지만, 어리석은 이는 작은 허물도 끝내 큰 고통과 괴로움으로 만들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선정삼매를 닦아야 합니다. 반야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곧 오온五蘊의 생멸하는 모습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늘 독송하는 『반야심경』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연못 속에 뿌리를 두고도 물 위에서 청정하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흔들어 놓도록 맡기고 사는 삶이 아니라, 내 스스로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버렸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집착이 남아 있다면 결국 마음은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망념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면 붙들고 있으려 하지 말고 조금씩 내려놓으며 살아야 합니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악업을 멀리하고 선행을 쌓아라. 그러면 그 마음은 항상 평안할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선지식의 가르침을 따르라. 그러면 모든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온다고 집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법회에 나오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 법당을 찾는 모습은 누군가에게나 큰 본보기가 됩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정명 백 세를 살아가다가, 때가 되면 잠들 듯 편안히 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수 같은 인생을 헛되이 흘려보낸 뒤 훗날 가슴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오늘 주어진 귀한 시간을 소중히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