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인간들이 저마다 죽기살기로 뛰며 노력하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은 각자가 ‘나’살기 위함이다. 그런데 ‘나’가 없다니?
지금은 아비규환의 시대를 살아가느라 저마다 ‘나’를 위로받고, ‘나’를 힐링하는 게 무엇보다 절박한 시대다. 그래서 붓다의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의 가르침은 그 어느 때보다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시대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른 채 ‘이런 진리를 모르고선 불교를 모르고, 행복해질 수도 없다’는 주장을 거침없이 펼치는 분이 있다. 조계종 원로의원인 경북 봉화 금봉암 암주 고우 스님(75)이다.
그가 펼치는 사상의 핵심을 알기 쉽게 간추린 게 <연기법과 불교의 생활화>(효림 펴냄)다.
붓다는 대각을 얻은 뒤 ‘모든 중생이 지혜와 덕상을 갖추었건만, 오로지 망상에 집착되어 스스로 체득하지 못하는구나’라고 안타까워했다. 바로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 착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고우 스님은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지부터 얘기해준다. 어둠이 내린 밤중, 마당에 새끼줄 한 토막을 보고 뱀인 줄 알고 놀라는 사례를 들려준다. 그는 새끼줄의 본질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새끼줄을 만든 것은 짚인데, 짚으로는 새끼줄 뿐 아니라 가마니나 짚신이나 망태기나 멍석들을 다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본질은 같지만 우리가 남자, 여자, 노인, 젊은이, 큰 사람, 작은 사람, 예쁜 사람, 못 생긴 사람, 부자, 빈자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처럼.
“그런 현재의 모습에 집착해 갖가지 망상과 차별심을 일으킨다. 하지만 본래의 재료를 보라. 근본이 되는 본래의 재료에서 볼 때는 조그만 차별도 없고 다르지도 않다.”
이처럼 본래를 깨닫기 위한 붓다의 가르침이 연기법緣起法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과 조건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새끼줄도 짚과 기술이 있기에 만들어졌고, 짚도 농사짓는 이의 정성과 하늘의 비와 바람 등의 모든 조건이 있어서 가능한 셈이다. 그런 인연과 조건이 만들어낸 것이지 원래 짚이나 새끼줄이나 ‘나’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인연이 모여 생겨나는 것이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 속에서 수많은 구성 요소가 모이고 또 모여 형성돼 구성요소 어느 하나가 다하면 그 존재는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런 진리를 알아서 ‘나가 있다’고 집착했던 그 마음자리에 ‘나가 없다(無我), 공이다’는 것을 알게 되면 구름이 싹 걷힌다고 한다. ‘그 구름이 걷힌 상태를 공空이다, 무아다’고 하는데, 그 순간부터 해는 찬란한 내면에서 빛이 발하고 광명천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착각에 의해 구름을 가득 끼우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무아요 공임을 깨달아 구름이 걷히고 지혜의 해가 나오게 되면 우리는 굉장히 자주적이요 자립적으로 살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인이 되어 능동적이요 창조적으로 움직이며, 참으로 지혜롭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 된다.”
얼마 전 봉화 금봉암에서 고우 스님을 뵌 적이 있다. 공양을 마치고 스님이 홀로 지내는 암자에 마주앉았다. 마당이 훤히 내다보이는 유리문 밖으로 잔디들이 보였다.
“저 잔디만 보는 사람은 어떤 잔디는 길고 어떤 잔디는 짧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잔디밭에 불을 질러버리면 잔디가 길고 짧은 게 아니라 그 배경인 땅이 울퉁불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잔디엔 차별이 있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잔디에는 높낮이가 없다는 것을 직시하게 한 것이다. 그가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묻는다.
“손등이 있는가, 없는가?”
눈앞에 보이는 것은 손바닥뿐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이면의 손등이 없다고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보통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고 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한다. 손등이 없는 손바닥이 있을 리 없듯이 몸통이 없는 머리가, 머리가 없는 몸통이 있을 리 없다.
스님은 사람들 간에 ‘관계’의 상처와 내적인 고통도 ‘너’가 있음으로 내가 있다는 것을 망각해 ‘너를 부인한 채, 내가 있다’고 여기는 착각에서 비롯된다고 단언한다. 내가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니, 남을 무너뜨려서라도 나만 성공하고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해 이전투구를 일삼아 결국 모두가 불행한 세상을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립적이고 이원화된 생각을 떠나 본질의 세계에서 현상을 바라보면, 해와 달이 만물을 비추듯 차별의 눈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전혀 없음을 깨달으면 상대와 비교해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 무엇을 하든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부처님 당시 똥을 푸던 니제가 천하디천하다는 비하심을 거두고 당당한 주인공으로 거듭나 살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는 “양극단의 사고에 빠져 자기만 챙기면 유리할 것 같지만, 거기에서 벗어날 때 더 큰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왜 그토록 모르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며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내가 과거에 속이 좁아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이 꽉 막힌 사람이었다. 그런데 연기·중도를 안 이후부터 얼마나 마음이 편해졌는지 모른다.”
젊은 시절 폐의 반쪽을 도려내는 병고를 안고서도 흰 눈썹 휘날리는 선풍도골의 화기로운 모습이 그의 변화를 말해준다.
“ ‘나’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나, 불교를 제대로 이해해야 의식이 바뀌고 의식이 바뀌어야 바른 가치관이 정립된다. 바른 가치관이 서야 이기적이고 욕심만 챙기며 개인과 세상을 망치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야 자신과 세상을 동시에 살리는 불보살의 삶으로 회귀할 수 있다.”
혹자들은 화두를 깨쳐 깨달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면서 진리에 대한 ‘이해’를 폄하한다. 하지만
그는 ‘모 아니면 도’ 식의 극단에 찬동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본다고 하지만, 눈에 띄는 겉모습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붓다는 본질을 본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를 본다고 하지만, 중생이 보는 것과 부처가 보는 것은 천지 차이가 난다.”
스님은 차별화한 현상을 벗어나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이 불교라고 말한다. 극단의 구름을 벗어나, 해로서 만물을 차별 없이 비추는 것이 붓다가 깨달은 ‘중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나가 있다’, ‘나만이 고유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아가 ‘나’의 행복을 만들고, ‘나’를 내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애를 쓴다. 그 ‘나’는 자기중심적이요 이기적인 ‘나’다. 그 이기적인 ‘나’를 위해 우리는 참으로 힘들게 살아간다. 그 ‘나’가 있어야 잘 살 수 있고, 그 ‘나’가 있어야 발전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노력한다. 이것이 중생의 착각이요 중생의 삶이다. 그러다 죽음이 임박하면 후회한다. 고우 스님은 이런 중생의 삶을 안타까워하며 무아적 삶으로 이끈다.
“ ‘나가 없다’는 것을 알면 참으로 평등하고 기쁘고 위대한 삶을 살게 된다. 위대한 작용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본래 부처를 회복해, 구름 걷힌 하늘의 태양과 같은 빛을 발현하며 살
수가 있다. 만물을 살려주는 태양이 되어 참으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