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구룡사 소임을 맡은 지 40년이 되었습니다. 가회동 적산가옥에 있던 구룡사를 85년도에 이곳 양재동으로 이전하면서, 2층집을 전세로 얻어 그 마당에 20평 남짓 천막 법당으로 시작했던 그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저의 출가 생활은 올해로 60년이 되었습니다. 열일곱 살 때,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찾아 길을 떠나듯 그러한 마음으로 완행열차타고 통도사로 향했습니다.
얼마 전 불교TV 개국 30주년 특집 프로그램 ‘뜰 앞에 잣나무’에 출연하면서 오랜만에 앨범 몇 권을 꺼내 보았습니다. 월하 노스님과 함께 찍은 사진, 90년 성운 대사께서 대만 불광산사에서 구룡사를 방문하셨을 때 사진, 성운 대사께서 통도사에 오셨을 때 모시고 설법전으로 향하던 순간들… 그 사진들을 보면서 ‘그 시절이 참으로 영원한 줄 알았는데, 유수같은 인생의 시간이 흘러서 많은 일들이 변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오래 머무르신 곳은 『금강경金剛經』을 설법하신 기원정사입니다. 그곳에서 21년간 법을 설하셨습니다. 또 최초의 설법은 사르나트 녹야원에서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 12연기十二緣起를 아약 교진여 등 다섯 비구에게 설하시며 시작된 교단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최초의 사원은 빔비사라왕의 시주로 지어진 영축산靈鷲山의 죽림정사竹林精舍인데,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8년은 『법화경法華經』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29세에 출가하셔서 6년 난행에 정각을 이루시고, 이후 45년 동안 법을 설하신 뒤 쿠시나가라 사라쌍수沙羅雙樹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저 역시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15세에 출가하고 20년이 지난 뒤 월하 노스님의 부촉을 받고 가회동 구룡사에 처음 오게 되었습니다.
음력 5월 초하루였는데, 한옥 보존지역, 산 비탈길을 오르던 나에게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날 초하루 법당에는 다섯 불자 가운데 한 보살님이 “오늘 새로 주지 왔다메? 얼굴 좀 보자.” 인자한 어머니 같은 모습이 아직도 마음에 생생합니다. 주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새로 오는 주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그 다섯 분 가운데 세 분은 돌아가셨고, 한 분은 연락이 닿지 않으며, 한 불자는 지금도 여래사에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인생이 참으로 유수 같은 시간의 만남과 헤어짐이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부처님 인생에 견줄 수는 없겠지만, 15세에 출가하여 20년쯤 지난 시점에 구룡사의 소임을 맡았습니다. 이후 40년 동안 총무원과 불교TV, 통도사 주지 소임까지 이런 저런 인연은 있었지만, 한 번도 구룡사를 떠난 적은 없습니다. 서울에 올라온 지 40년이 되었지만, 제 마음은 통도사를 떠나본 적 없습니다. 이는 단순히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된 것이 어찌 가벼운 일이겠습니까. 이 길은 편안함을 위하거나,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기 위한 길도 아닙니다. 명예나 재산을 탐하는 길도 아닙니다. 오직 생사生死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며,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함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잇고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길입니다. 이는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나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전생前生, 그 전생 동안 출가出家 수행자修行者의 길을 걸어온 인연이 지금의 정우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제 마음이 곱고 따뜻했던 것 같아 흐뭇합니다.
수희동참隨喜同參이란 유유상종類類相從처럼 닮은 사람들끼리만 함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의 아픔에 함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나 미얀마에서 일어나는 고통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된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는 모든 공양 가운데 으뜸이 법공양法供養이라 하였습니다. 법공양이란 단지 경전을 펴내거나 유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절을 짓고 수호하는 것만이 불사佛事가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법공양입니다. 중생을 위하고 그 고통을 함께 하려는 마음, 보살행菩薩行을 버리지 않는, 선근善根을 쌓고 보리심菩提心을 지키는 모든 행위가 법공양입니다. ‘본래 부처를 잃어버린 이가 중생衆生이요, 본래 부처를 찾고자 하는 것이 수행修行이며, 본래 부처를 찾으면 이름하여 부처님이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본래 부처의 성품을 지녔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에 중생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비심慈悲心과 연민심憐愍心입니다.
제가 30대 초반이었을 때, 월하 노스님께서 통도사에 살고 있던 동자승들을 서울로 보내셨습니다. 당시 우리는 2층 양옥집에 세 들어 살면서 구룡사 불사를 시작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가진 것도, 여건도 부족했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많은 걱정들을 했습니다. “돈도 없이 절을 짓겠다고 하니, 실패하면 땅까지 날아갈 것”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절이 완공되고 만불전 부처님 점안식까지 마친 날, 노스님께서 조용히 제 방에 오셨습니다. 노스님께서 아무 말씀 없이 제 방으로 오시더니 “나도 애썼다.”는 한마디를 남기셨습니다. 그 말씀에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던 2층 집은 겨울이면 연탄보일러가 자주 고장이 나서 방이 제대로 데워지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그 매서운 추위 속에서 지냈고, 노스님께서도 낡은 난로 하나에 의지한 채 며칠씩 머무르셨습니다.
우리를 곁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겠지요. 그것이 바로 어른의 자비심이고 연민심입니다. 말없이도 전해지는 깊은 사랑과 배려, 저는 그 마음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벽안 노스님께서는 제가 76년도에 서울로 올라와 있을 때, 보내주신 편지를 저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정우를 보내고 궁금하던 차 편지를 받아보고 반겨하였다.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니 착실히 공부하고 돌아와서 통도를 위하고 불교를 위해서 크게 활약하고 훌륭한 승려가 되어라.
우리 불교는 이 시대에 부흥하지 못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반성해서 구습을 타파하여라.
76년 10월 12일 노승 벽안 답서
이 제자들을 향한 연민심이 담긴 진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어른 스님들의 그러한 모습을 이어가야 하는데 부끄럽게도 이 시대에 와서는 그런 것들이 자꾸 소멸되어가는 듯하여 안타깝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 제도를 위한 것이지 자기 안락의 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과 정성은 서로를 치유합니다.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모두가 치료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인생을 정리하고 정립하며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기도란 결국 나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연민의 마음, 사랑의 실천입니다. 월하 노스님과 벽안 노스님께서 보여주셨던 삶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40년을 구룡사에 머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가회동에서 모셔온 부처님께서 저를 이끌어주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매일 새벽 인등실에 향을 사르고 삼배를 올린 뒤 새벽예불에 들어가는 그 일상이 바로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기쁜 날이든 슬픈 날이든, 혹은 그냥 평범한 하루든, 엘리베이터 타고 4층 인등실에 올라가셔서 부처님의 잔잔한 연민의 미소를 한 번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이렇게 구룡사와의 40년 세월을 돌아보며, 오늘 법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