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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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그 붉은 끈기

홍성범
숲해설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날, 시골의 어느 고택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붉은 꽃을 만개한 배롱나무다.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우아하게 피어난 그 꽃은 지나는 사람의 발길을 붙잡는다. 오래된 한옥과 배롱나무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란히 서 있다. 나무는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뽐내고, 고택은 그 꽃을 배경으로 품격을 더한다. 배롱나무는 이렇듯 조용하지만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무다.
배롱나무는 백일홍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7~9월에 진한 분홍색의 꽃을 피우는 데, 꽃이 피기 시작해 약 100일 동안 이어지기 때문이다.
꽃은 가지 끝에 원뿔모양의 꽃차례로 달리며 꽃잎은 모두 오글쪼글 주름이 잡혀 있다. 수술은 30~40개로 그 중 가장자리의 6개가 길고, 암술은 1개이고 암술대가 수술 밖으로 나와 있다. 암수 한 꽃이다.
붉고 선명한 꽃들은 여름에서 초가을까지 바람에 흔들리며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중국에서는 배롱나무를 ‘자미紫薇’라고도 부른다. 자미는 북극성을 일컫는데, 당나라 수도 장안 궁궐인 자미궁에 이 나무가 많이 심어졌다고 해서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일본에서는 줄기가 매끄러워서 원숭이도 미끄러진다고 하여 ‘사루스베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배롱나무는 특이하게도 잎이나 줄기를 만질 때 마치 몸 전체가 흔들리는 모습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춤추는 나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 모습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소박한 춤사위처럼 보이기도 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동작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나무와 함께하는 신선이 사람들이 나무를 건드리면 웃으며 나뭇가지를 흔든다고 한다.
배롱나무의 나이테는 느리게 자라지만 단단하고 병충해에도 강하다. 시간이 지나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끈기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특성은 자연스레 인간의 덕목과 연결된다. 인내와 겸손, 그리고 긴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진정한 아름다움. 배롱나무는 그 자체로 삶의 교훈이다.
배롱나무는 고사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그중 배롱나무 꽃의 지속성에서 비롯된 비유다.
한 유학자는 “백일 동안 피어 있는 꽃을 보라. 이처럼 인내와 끈기를 갖춘 사람이라야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배롱나무를 보며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 진리를 깨닫는 삶의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배롱나무는 사찰에도 자주 심어진다.
이는 나무의 긴 개화 기간이 끊임없는 수행과 지속적인 깨달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찰에서는 배롱나무 아래에서 수행한 스님들의 일화가 전해지며, 이를 통해 나무가 고요함과 참선을 돕는 나무로 여겨지기도 한다.
불교적 상징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붉은 꽃은 연꽃을 닮아 깨달음과 불심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이는 사찰 경내에 배롱나무를 심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가지를 만지면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에서 겸손과 순응의 미덕도 배운다.
옛날 중국의 한 고승이 배롱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던 중, 나무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와 꽃의 생명력에 감명 받아 배롱나무를 불로초로 여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전설은 배롱나무가 장수와 건강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지게 된 배경이다.
배롱나무는 100일 동안 꽃이 피어 있는 나무로 오랜 시간 사랑을 상징하기도 한다. 오래된 배롱나무 아래에서 만난 연인들이 서로의 사랑을 맹세하면 그 사랑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한다. 이는 배롱나무가 피우는 꽃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한 마을에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있었는데, 나무를 자주 보며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화합을 다졌다. 그러나 어느 날 나무가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이 고사는 자연의 소중함과 공동체의 화합을 강조하는 교훈으로 자주 언급된다.
배롱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는 지역에 따라 다소 변형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연과 사람 사이의 조화, 사랑, 그리고 지속성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다.
배롱나무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충청남도 이남에서만 안전하게 겨울을 날 수 있는 상록활엽수다. 높이 5m까지 크며 줄기는 굴곡이 심한 편이어서 여러 그루를 가까이 심으면 비스듬히 눕기 쉽지만 혼자 자랄 때는 비교적 곧게 자라 전체적인 나무 모양은 마치 세워 놓은 우산 같이 보인다. 나무껍질은 옅은 갈색이나 껍질이 얇게 벗겨져서 하얀 얼룩이 생기고 매끄럽게 보인다.
국내에서 배롱나무는 서원이나 향교, 절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명한 배롱나무 명소를 꼽는다면 담양 명옥헌, 안동 병산서원, 논산 명재고택, 대구 하목정, 밀양 표충사 등이 있으며, 충남 이북에서는 배롱나무를 보기 힘드나 서울 덕수궁, 창경궁에 가면 배롱나무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는 부산 양정 정문도鄭文道의 묘소에 있는 배롱나무다. 배롱나무로는 유일하게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중 담양의 소쇄원은 전통 정원의 곡선과 돌담 너머로 피어난 배롱나무가 정적 속에서 말없이 웃고 있다. 수백 년의 시간을 지켜온 고택과 나란히 선 배롱나무의 자태는 말보다 무겁고 아름답다.
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는 그 꽃이 단지 오래 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 인내가 있고 기다림이 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나무는 봄에도 조용히 침묵하다가 여름의 정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화려함을 드러낸다. 어떤 꽃보다 늦게 피고 어떤 꽃보다 오래 핀다. 그것이 배롱나무다.
안동 하회마을의 고택 마당에서 배롱나무 아래 책을 펼치고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풍경을 배경 삼아 조용히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가장 추천하는 배롱나무의 명소는 담양 명옥헌 원림이다. 수백그루의 배롱나무가 고택과 어우러져 마치 옛 선비의 품격을 보여주는 듯하다. 올 봄 방문한 명옥헌은 시기를 맞추지 못해 배롱나무의 꽃을 보지 못했지만 상상만으로도 천상의 화원이었다. 함께 간 동료들과 배롱나무가 만개한 올 여름 꼭 다시 방문하자고 자연스럽게 약속했고 그 고운 자태를 볼 기대에 마음은 벌써 명옥헌 정자에 가 있다. 꼭 가 보시길 추천한다.
하동 쌍계사와 영주 부석사의 배롱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 이곳 배롱나무는 오랜 역사를 품고 있다. 붉은 꽃이 고즈넉한 사찰과 어우러져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멀리 떠나지 못한다면 창경궁 궐내각사 지역에 홀로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배롱나무 한 그루도 좋다.
여름이 시작되면 가장 붉게 타오르는 꽃, 가장 길게 인내하는 꽃, 배롱나무의 만개한 모습을 만나러 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