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도 다람살라를 다녀온 한국인으로부터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쬔디 스님이 많이 편찮으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번 생에서 그 분을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을 것이란 암시를 받고는 가슴이 훵하니 뚫렸다.
올해 여든 두 살인 롭상 쬔뒤 스님을 만난 것은 6년 전 신문사를 1년 쉬고, 히말라야로 떠났을 때였다. 티베트의 정신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존자께서 머무르고 있는 히말라야의 산간도지 다람살라에서 그 분들을 뵈었다.
쬔뒤 스님이 원래 사는 곳은 히말라야 최북단으로 인도의 티베트와 경계 지역 라닥이다. 라닥은 애초 티베트 땅이었는데 인도에 편입된 곳이어서 지금도 대부분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으며, 티베트 불교가 자리잡고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라닥을 가보고 <오래된 미래>란 책에서 그곳을 소개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라닥은 겨울에 온도가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가는데도 스님들이 사는 높은 산 위의 절엔 난방조차 없다. 그래서 다람살라에 머문 한국인 스님의 배려로 라닥의 노스님들이 다람살라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나는 쬔뒤 스님, 툽텐 왕걀(74) 스님과 함께 히말라야에서도 가장 오지에 속하는 히마첼을 순례했다. 히말라야에 있는 천년 고찰들을 함께 찾으면서 숱한 고생을 함께 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서 한 번도 고통스런 모습을 발견한 적이 없었다.
순례를 다녀와선 다람살라에서 두 노승과 한방에서 보름을 함께 지냈다. 그러니 인도에서 한 달 간을 그들과 함께 지낸 셈이다. 두 스님은 티베트 스님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달라이라마의 궁이 바라다 보이는 방에 자리 잡았다. 달라이라마궁이 10분 안 거리로 가깝고, 또 방 베란다에서 궁이 보이니, 스님들로선 만족스런 방이 아닐 수 없었다. 방엔 두 스님이 쓰는 두 개의 침대가 나란히 붙어 있고, 부엌과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나는 그 방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빌붙기로 했는데, 숙박비를 아끼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두 노승이 좋기 때문이었다.
“쥴레!”
“쥴레!”
내가 라닥말로 인사말을 하면, 두 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큰 목소리로 화답했다. 어려서 출가해 티베트 불교 고찰에서만 자라온 스님은 스님이 아닌 일반인과 한 방을 써 본 적이 없었다. 두 스님은 늘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곤 했다. ‘스님이 아닌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나’ 하며 그 스님들도 내가 사는 모습 하나하나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긴 공사다망한 내 삶이 어찌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두 스님의 삶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철학자 칸트는 매일 오후 3시라는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늘 산책했다고 한다. 결혼 안 한 것까지는 칸트와 같은 셈이다. 그런데 내가 칸트를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칸트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규칙적이다 못해 시계바늘이었다.
그곳은 절도 아니고,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 한 명 없지만 두 스님은 밤 9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들고, 정확히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물론 괘종시계 같은 건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침대에서 부처님께 3배를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앉아 경전을 읽기 시작했다. 정확히 2시간 동안. 이어 화장실과 세면대에서 아침 볼 일을 본 뒤엔 6시 30분에 짜이를 끓여 마셨다.
2시간 동안 경전을 읽고 6시부터 약 30분 동안 볼 일을 보고, 6시30분에 짜이 한 잔을 마셨다. 짜이를 마시고 나면 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라이라마궁 주변을 돌며 옴마니밧메훔이라고 적힌 마니윤차를 돌리면서 기도하는 ‘꼬라’를 나갔다. 30분가량 꼬라를 돌고 달라이라마궁 앞에서 노점상이 5개에 10루피(250원 가량)에 파는 빵을 사와 아침을 먹었다.
한번은 밖에서 식사를 하고 노승들을 먼저 집에 들어가도록 했다. 노승들의 취침시간이 밤 9시였기에 8시30분에 자리를 파하고 먼저 집으로 가 쉬게 한 것이다. 노구의 몸으로 히말라야의 고산들을 여행하느라 몹시 지친데다 작은 스님은 여행 내내 허리 통증이 도져 어서 빨리 자리를 펴고 눕는 게 급했다. 나는 한 시간도 더 늦게 거리에 머물다 집에 갔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보니 두 노승들이 방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눈발이 휘날리는 문 밖에서 추위에 떨고 있었다. 이미 노승들의 취침 시간은 1시간도 더 지체한 밤 10시가 넘어선 시간이었다. 그제야 난 외출할 때 방문을 잠근 뒤 열쇠를 내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황망해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지경인데, 노승들은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밤을 새지 않고 1시간 만에 왔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표정이었다.
난 두 노스님의 얼굴에서 알듯 말듯 흐르는 반가사유상 같은 미소가 떠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웃어야 할 때만 웃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상대가 실수를 했거나 잘못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스님들이 한 한국 스님의 초청으로 지난해 한국을 찾았다. 나는 그 분들을 경북 청도 운문사로 달려가 만났다. 6년만이었다. 두 노승은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노승들은 많이 쇠약해졌지만 해맑은 웃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가운데 한 달 동안 한방에서 함께 기거하면서도 조금의 불편도 느끼지 않았던 6년 전과 다름없이 온전한 마음을 담은 웃음으로 우리는 모든 대화를 다할 수 있었다.
운문사에서의 밤. 나는 6년 전처럼 쬔뒤 스님과 둘이서 한방을 썼다. 다음날 새벽 한 스님이 들어와 “무슨 꿈이라도 꾸었느냐”고 묻자 쬔뒤 스님은 “꿈에 모처럼 부처님을 뵈었다”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커피자판기를 보고 “이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느냐”고 묻던 그 순진한 스님을 보면서 내 마음도 환해졌다.
음식도 진한 조미료로 미각을 자극하지 않는 음식은 찾는 이가 없는 이 자극의 시대다. 음료수도 톡 쏘는 콜라엔 ‘바로 이 맛’이라고 하면서, 그냥 물맛은 제 물맛인 줄 모른다. 어둠 속에 빛나는 폭죽을 환호하고, 일출과 석양빛엔 감격해 하면서도 변함없이 밝게 빛나는 낮 동안 햇빛의 고마움은 잊기 마련이다.
늘 은근했던 두 노승은 아무리 마셔도 질리지 않는 물이었고, 여러 생을 함께 해도 지루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이었다.
<발문>
음식도 진한 조미료로 미각을 자극하지 않는 음식은 찾는 이가 없는 이 자극의 시대다. 음료수도 톡 쏘는 콜라엔 ‘바로 이 맛’이라고 하면서, 그냥 물맛은 제 물맛인 줄 모른다. 어둠 속에 빛나는 폭죽을 환호하고, 일출과 석양빛엔 감격해 하면서도 변함없이 밝게 빛나는 낮 동안 햇빛의 고마움은 잊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