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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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의 행복

승한스님 / 봉담선원장


얼마 전 처소를 경남 함양 천령산 기슭으로 옮겼다. 하안거를 하는 동안 불쑥 생긴 몸과 마음앓이를 다스리기 위해서다.
뒤쪽으로는 지리산이 어머니처럼 넓고 깊은 품으로 내가 있는 곳을 감싸고 있다. 앞쪽으로는 괘관산이 아버지처럼 근엄한 갓을 쓰고 내 우거寓居를 바라보고 계신다.
아침저녁으로 먼 산 중턱에서 모람모람 피어오르는 산안개와 이내는 나를 참 평화롭고 한적하게 한다. 똘똘똘 흐르는 산골물 소리와 그 소리 위로 방울방울 번지는 새소리 바람소리는 내 마음의 풀밭에 싱싱한 아침이슬을 내려준다.
이곳에서의 나의 하루는 퍽 단조롭고 적요하다.
우선 새벽 네 시면 여명과 함께 일어나 간단한 예불을 한 뒤 한 시간 가량 깊은 명상을 한다.
명상 주제는 매일 같다. 먼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위해 여태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명상을 통해 참된 나를 만나게 되면 이제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수심修心명상에 들어간다.
수심명상은 대개 내 마음의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痴를 중심으로 한다. 이를테면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의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잘 닦아 안으로는 명경지수처럼 맑게 하고 밖으로는 상선약수처럼 거스르지 않고 흐르는 물의 삶을 살 수 있을까? 그 어떤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지고한 행복과 맑고 밝음을 위하여 내 한 몸 온전히 바치는 바람의 삶을 살 수 있을까? 곰곰이 참구하고 곱씹어보고 되새겨본다.
그것이 끝나면 이번엔 그것을 바탕으로 내 주위 사람들과 어떻게 화합하고 잘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세상과 이웃에 꼭 보탬이 되고 이익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되새기고 다짐해본다.
명상이 끝나면 아침 산책길에 나선다. 밤 숲 우거진 산책길이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아침 밤 숲으로 들어서면 비릿하면서도 향기로운 밤꽃 냄새가 콧속을 파고든다. 처음엔 냄새가 너무 강렬해 진저리를 치기도 하지만, 이내 그 냄새 속에 파묻히면 밤꽃 향기가 그렇게 상큼하고도 매력적일 수 없다.
아침 산책길에 맛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산새 울음소리를 듣는 일이다. 귀 기울여 듣는 아침 산새 울음소리는 산책의 백미다. 찌르르 찌르르, 딱따그르르 딱따그르르, 쑥꾹 쑥꾹, 뻐꾹 뻐꾹, 초옥쪽 초옥쪽, ‘나 여기 이렇게 살아서 노래하고 있노라’고 한 산새가 이 나무에서 울면 다른 한 산새가 저 나무에서 받아넘기고, 저 나무에서 받아넘기면 저 산골짝에서 다시 받아넘기는 이른 아침 산새 울음소리는 참으로 명징하고 청아하다.
하루 세 번, 순 생 채식으로 먹는 공양시간도 참 맑은 시간이다. 양배추와 쑥갓과 당근과 오이와 방울토마토와 두부와 현미 등으로 영양을 채우고, 17년 묵은 죽염 된장에 풋고추를 찍어먹는 맛은 날마다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아침 공양 후 청소하는 시간은 적당한 땀이 돋아서 좋다. 진공청소기 대신 갈대꽃대 빗자루로 우거 구석구석을 쓸고 닦다보면 허리가 아프고 시간도 좀 걸려 느리고 불편하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나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어 참 좋다.
낮엔 울력을 하고 남은 시간엔 빨래를 하고 책을 읽고 또 다시 명상을 한다.
얼마 전엔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축축해진 마당과 잔디밭의 풀을 뽑았다. 잡풀 우거진 밭을 매고 콩도 심었다. 명아주, 바랭이, 며느리밑씻개, 쇠뜨기, 달개비, 쑥부쟁이, 쇠비름 등 햇볕 쨍쨍한 날엔 세상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그렇게도 안간힘을 쓰며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버티던 풀들이 쑥쑥 잘도 뽑혀 나온다. 단비를 배불리 먹은 탓이다. 큰 힘 주지 않아도 밑뿌리까지 몽땅 뽑혀 땅바닥에 내버려지는 풀들을 보면 좀 짠하기도 하고 미안한 생각도 들지만, 더 나은 공동의 세상을 위해 너도나도 우리 한 몸 기꺼이 바쳐 밑거름이 되자 거니 생각하니 뽑혀진 풀들에 대한 미안함도 조금은 줄어든다.
산속이다 보니 밤엔 불빛을 보고 날아드는 날벌레들 때문에 좀 성가시고 힘들다. 하지만 그들이나 나나 같은 목숨, 같은 생명이라는 생명의 등가성을 자각하면 힘없는 미물이라고 함부로 죽일 수 없다. 그래서 가능한 한 천명天命을 다하고 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방바닥과 창문틀에 수북이 쌓여있는 날벌레들의 시체가 무상한 인생살이를 절로 느끼게 한다.
장마철을 맞아 요즘엔 마당과 정원과 화단 여기저기에 보토補土 작업을 하고, 집중 호우에 흙 벼랑이 씻겨 내리지 않도록 물길을 내고 도랑도 친다. 그리고 태풍에 넘어지지 않도록 정원수마다 버팀목을 세운다.
그렇게 땀을 쏟고 난 밤이면 잠이 참 꿀맛이다. 날마다 그런 잠을 자다보면 내 몸과 마음의 물길도 상선약수가 되어 해인海印의 바다로 잘 흘러들겠지. 그 생각을 하며 오늘도 호미와 삽을 쥐고 비탈 밭에 서서 행복한 꿀잠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