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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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움의 계율정신 실천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종교란 신앙의 체계이고, 체계에는 최소한의 규칙과 법도가 필요합니다. 종교에도 계율이 있습니다. 계율은 종교의 안과 바깥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계율의 힘이 미치는 범위나 강도는 종교마다 차이가 있어, 그 자체로서 해당 종교의 대중적 친화력의 정도를 가늠하게도 됩니다. 가령 아무나 또 언제나 절에 갈 수 있고, 스님이든 누구든 있든 없든 법당의 부처님 앞에 무릎 꿇고 절하거나 기도할 수 있고, 기도의 형식과 법도도 부차적이라는 점은 불교가 지닌 커다란 친화력의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어떤 종교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포교의 가능성일 것입니다. 다만 계율이 느슨하다 보면 저변은 확대될 수 있지만, 세속적 의미의 조직력은 부실해지기 쉽습니다.
이슬람교는 계율이 엄격한 종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직자가 아닌 일반 신도도 반드시 지켜야할 계율이 있습니다. 전 세계 약 14억 명이 믿고 따르는 거대 종교인 이슬람교의 교인들은 5대 의무라는 걸 집니다. 첫째가 shahadat(샤하닷)입니다. 유일신 하나님인 알라를 믿겠다는 맹세입니다. 둘째는 sholat(숄랏)이라 해서 하루에 다섯 차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슬람이라는 명칭도 다섯 번 기도 시간(Isha : 20:30, Subuh : 05:30, Lohor : 13:00,  Asar : 16:00, Magrib : 19:00)의 첫 글자를 딴 것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Ikut Puasa(이쿳 푸아사), 곧 라마단 금식에 참여하는 것이고, 넷째는 금전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Zakat(자캇)입니다. 다섯째는 우리가 잘 아는 성지순례, 즉 Naik Haji(나익 하지)입니다. 종교가 국가와 민족 정체성과 한 몸처럼 엮여 있어 문화뿐 아니라 일상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이슬람 사회에서 저 다섯 계율은 때로는 세속의 법보다 강력한 장악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극소수 이슬람 원리주의자 가운데 특히 폭력적인 일부 테러집단 때문에 무슬림 전체가 경계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다수의 무슬림은, 적어도 종교적 의미에서 보자면, 신의 선한 의지에 근접하기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임하는 신앙인들일지 모릅니다.
이슬람 금식월인 라마단은 천사 가브리엘이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알라의 말씀인 ‘꾸란’을 전한 성월聖月입니다. 약 한 달에 걸친 이 기간 동안 이슬람교도는 일출 이후 일몰까지 낮 동안 금식해야 합니다. 음식은 물론이고 물이나 차도 마실 수 없습니다. 성관계도 안 되고, 흡연 음악 청취 향수 등 온갖 세속적 쾌락의 요소들을 일상에서 멀리해야 합니다. 금식이라고 했지만, 엄격히 말하면 금욕입니다. 라마단도 ‘더운 달’이라는 뜻으로 줄여 말하지만, 아랍어에 능한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타는 듯이 덥고 건조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 어원인 라미다ramida나 아라마드arramad가 태양의 열기에 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져버린 땅바닥 같은 상태를 설명할 때 쓰는 단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라마단은 자신의 영혼이 마른 땅바닥처럼 버석거릴 때까지 자신의 욕망과 싸워 정화하겠다는 신과의 약속, 자신과의 약속인 셈입니다. 무슬림은 금식을 하며 꾸란을 읽고 기도합니다.


일전에, 이 지면에서 잠깐 언급한 적도 있습니다만, 라마단의 끝은 르바란Lebaran이라는 무슬림 연중 최대 축제입니다. 금식의 고행을 함께 한 이들끼리 음식을 나누며 정화된 몸과 마음으로 거듭남을 축하하는 행사입니다. 우리의 추석처럼 멀리 사는 친지들도 한 자리에 모여 조상을 찾고, 이웃들과 많든 적든 가진 것들을 나누고, 오해를 풀고 서로의 무례를 용서하며 신의 축복 속에 새로운 유대관계를 확인한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무더운 여름 뒤 곡식이 익으면 그 결실을 나누는, 인류 공통의 세시기歲時記적 약속을 연상하게도 합니다. 결속력과 조직력, 그리고 규모 면에서 기독교의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을 능가할지 모르는 가장 웅장한 종교 의식인 이 라마단이 올해에도 7월 20일 께 시작됐습니다.


불가에서는 스님들이 여름 겨울 석 달간 안거安居를 합니다. 하안거(음력 4월15일~7월15일)가 6월초 결제에 들었으니 지금쯤 전국의 각 선원에서는 노소의 스님들이 참선과 수행으로 용맹정진 중일 것입니다. 각 사찰들도 재가불자들을 위한 토요일 철야기도 등 단기 안거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안거는 원래 인도 몬순기후의 우기雨期에는 탁발 수행이 어렵고 초목과 벌레가 성하게 활동하는 계절이라 오가다 살생을 할 위험이 커서 시작됐다고 합니다만, 그 기간 동안 스님들은 수행납자로서 스스로를 넓히고 심화해 안거가 끝난 뒤 세속으로 나아가 펼쳐 보이게 될 것입니다. 종정 스님과 각 총림 방장 스님들의 결제법어도 잇달아 발표됐습니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6월 초 하안거 결제 법어로 “오늘 있다가 내일 가는 것이 인생이다. 잡담과 시비장단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인가’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수행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설하셨습니다. 수행의 결핍으로 ‘참 나’를 잃고 방황하고 일탈했다면, 일탈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근원적으로 결핍된 수행을 채우라는 말씀인 듯합니다.
영축총림 방장 원명스님의 결제 법어도 마음에 와 닿습니다.
“궁핍한 불제자가 입으로는 가난하다 하지만(窮釋子口稱貧) 사실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하지 않다네(實是身貧道不貧) 가난하여 항상 몸에 누더기를 걸치고 있지만(貧則身常被縷褐) 마음에는 무가의 보배를 감추고 있도다(道卽心藏無價珍)”
스님은 저 말씀 뒤에 이렇게 그 의미를 풀어 설명했습니다. “출가수행자가 넉넉한데 익숙해져 버리면 이미 수행은 요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빈도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소욕지족하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안락하고 따뜻한 것은 유한하지만 부단한 정진 뒤에 찾아오는 희열은 무한합니다.”
종정 스님의 짧은 말씀의 핵심을 방장 스님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듯합니다. 그리고 사부대중에게도 반성과 자계를 당부하셨습니다.
“물은 굽이굽이를 거쳐야만 넓고 깊은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벼 이삭도 여러 날을 뜨거운 햇볕을 견디고 이겨낸 다음이라야 가을에 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참 보배를 위해서 매진하고 있는지 아니면 형식만 갖추고 소일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크든 작든 모든 자정과 쇄신은 말이 아니라 실행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한국 불교가 처한 딱한 지경에 대한 타개의 지혜이고, 일상의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자성적 문제들에 대한 구제의 말씀이라 여겨졌습니다.


동국대 불교학부 김성철교수는 최근 펴낸 <불교하는 사람은…>이란 책에서 불교의 참여정신을 강조했습니다. 수행 종교로 머물 것이 아니라 실천 종교로, 믿는 종교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는 종교로서의 불교의 진면목을 더욱 부각해야 한다는 고언입니다. 권력과 권위, 1등이라는 세속적 가치에 순종하지 말고 자신만의 길을 갈 것을 주문하며 “거꾸로 살아갈 것을 강조하는 게 종교 본연의 임무”라는 주장도 펼쳤습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디서든 주인공으로 살아가라는 뜻이다. (…)누구나 스스로 우주의 중심이 되어 깨어 있는 마음으로 기민하게 살피면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이 바로 선禪의 정신이다.”
그 주인공의 정신으로 모든 권력과 권위, 세속적 가치에 맞서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조언하는 것이 ‘비정한 시대의 종교의 역할’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스스로 먼저 지키자는 취지로 ‘재가불자 지계(일상수행준칙)’ 운동을 기획 중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슬람교의 엄격함 못지않게, 불교의 신자에 대한 느슨한 계율 강제력도 드물게 귀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계율의 강제성이 아니라 자율심과 자발심에 근거한 불도행이 더 유의미하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느슨함이 방치의 무기력함으로 여겨져 안타까웠던 적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그 두 가치 사이의 갈등을 적절하게 해소해줄 무엇인가가 있다면 종교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의미 있는 보다 많은 실천의 장을 한국 불교가 열어 보이는 것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