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9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구룡사 한가족
    다람살라소식
    불교와 탱화
    금강계단
    불서
    경전이야기
    절문밖 풍경소리
    즐거움을 뿌려라
    영어로 배우는 법구경
    알아봅시다
    건강한 생활

과월호보기

기록적인 더위를 보내면서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기상청 발표를 듣지 않고도 몸이 먼저 일러줬을 만큼 지난 더위는 기록적이었습니다.
제 지인 중에는 ‘일단 살고 보자’는 절박한 마음으로 에어컨 매장을 찾아갔다가, 물건이 동이 났고 설치 기사의 일손마저 달려 일주일에서 열흘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곤 발길을 돌렸다는 이도 있습니다. 그는 “더위가 참기 힘들어도 ‘여차하면 에어컨 사지 뭐’ 하는 마음이라도 먹을 수 있을 땐 견딜 만했는데, 그 소리 듣고 나니 숨이 더 막히더라”고 했습니다. 피서를 겸해 동네 커피숍에 갔다가 에어컨 냉기에 추워서 1시간도 못 버티고 돌아온 일, 작정하고 가디건까지 챙겨 들고 갔다가 공교롭게 정전이 되는 바람에 커피 값만 낭비한 경우도 있다고 했습니다.
에어컨이 있다면 사정이야 낫겠지만, 체감 고통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 지인은 “끄는 게 힘들어서 켜기가 두렵더라”고 하더군요. 계속 켜두자니 전기요금이 걱정되고, 적당히 끄자니 금세 땀이 배어 나오고, 다시 켜자니 에어컨 앞에 묶여 있는 것 같아 내심 건강도 염려되고, 다시 끄자 싶다가도 ‘쓰려고 산 거니까 이럴 땐 써야지’ 싶어 망설이게 되고…. 차라리 에어컨 없이 살 때가 속은 편했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10여 년 전, 다자간 무역협상 취재차 카타르 도하라는 도시에서 일주일 여 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전형적인 사막기후여서 일교차가 섭씨 20도를 넘나들고, 낮 기온은 예사로 40도를 넘어서는 곳이었습니다. 하루 저녁 짬을 내서 일행들과 시내 구경을 나섰는데, 옷 가게 진열장마다 털 외투가 즐비한 겁니다. 저게 웬 거냐고 물었더니 가이드가 그러더군요. “여기도 밤에는 춥고, 겨울은 더 춥다”고, “심지어 노숙하다가 얼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요. 거기 연중 최저기온이 섭씨 20도 언저리이니 한반도의 포근한 가을 날씨 쯤 될 법한데 그 기온에도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는다는 말에 우리 일행은 아연했습니다. 카타르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첫 해 여름은 우습지만 두 해째부터는 더위로 고생하고, 첫 해 겨울은 기를 못 펴지만 두 해째부터는 그럭저럭 견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자연 환경에 얼마나 취약한지, 또 얼마나 빨리 적응하는지 새삼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제 경험담이 길어졌습니다만, 하고 싶은 말은 짧습니다. 에어컨도 있고 전기요금쯤은 걱정 안 하고 살만큼은 형편이 된다고 생각하는 ‘부자’들도 어차피 우리의 터전이 한반도인 한 이 기후에 적응해야 하고, 적응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루 24시간을 온실이나 냉방 안에서만 살 수는 없고, 또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몸의 가능성, 즉 생명의 내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게 될 테니까요. 정부 캠페인처럼 에너지를 절약하자거나 자연에 부담을 덜 주자는 의미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더위와, 또 금세 닥쳐 올 추위와, 우리를 둘러싼 이 환경과 살 맞대고 보내는 시간을 늘리자는 겁니다. 그 웅장한 교감의 시간 속에서 ‘나’의 자리를 확인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 역설적이지만 아득한 ‘무아’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도 있을 듯했습니다. 


연일 이어진 열대야로 인한 수면부족과 피부가 쉼 없이 뿜어내는 땀방울들을 대견스럽게(?) 지켜보는 데 지쳐, 휴가를 얻어 제가 찾아간 곳은 지리산이었습니다. 거기나 여기나 도시의 더위는 매한가지였지만, 폭염이 깊은 산그늘까지 들이닥치진 못하는 듯했습니다. 이따금 한 자락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맞이할 때의 감동이란 오직 경험으로써만 알 수 있는 느낌일 겁니다. 
저는 뜬금없이 한국의 오래된 사찰들이 주로 산자락에 터를 잡은 까닭, 그리고 가람 한 켠에 삼성각三星閣을 세워 전래 신앙의 대상인 산신山神을 부처 보살들과 함께 모신 까닭을 그 바람 한 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머문 마을 인근의 대가람에도 삼성각은 있었고, 거기 모셔진 탱화 속 산신령의 흰 수염도 살포시 불어온 바람에 흔들리는 듯 보였습니다.
그 시각, 이름난 바닷가나 문명의 휴양지는 인파로 북적댔겠지만, 산과 산의 품에 깃들인 사찰 경내는 저의 기대만큼 고즈넉했습니다. 제 몸이 균형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가장 느린 걸음으로, 열 개도 더 될 듯한 경내의 모든 전각들을 참례하며, 딱히 기원할 무엇도 없이, 부처 보살님들과 일일이 눈맞추며 합장하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여느 절처럼, 그 절의 극락보전 앞마당 한 켠에도 줄지어 세워진 기와들이 있었습니다.
‘경남 창원시 OOO XXX 합격 기원’ ‘서울 중랑구 △△△ 쾌유 바랍니다’ ….
불사佛事용 까만 기와의 등판에 쓰여진 하얀 소박한 소망들이 빼곡했고, 소망 없이 주소와 이름만 적은 기와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읽다가 저는 최근, 강원도 속초 보광사라는 절의 목조 지장보살상 복장(腹藏·부처나 보살상 복부에 공양물을 넣은 공간)에서 발견된 발원문을 떠올렸습니다.
발원문에는 한씨韓氏라는 여인이 죽은 남편 숭록대부 나업羅業이 “극락에 가서 환생하여 함께 아미타부처님을 뵈옵기를 빌”고자 그 목조상을 만들게 한 다음, 효종 5년(1654) 8월 29일 금강산 안양암安養庵이라는 암자에 안치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전한 문화재청 소속 문화재 감정위원인 최선일 박사는 나업이라는 이가 조선시대의 환관(내시)이었다며 “내시를 위해 불상 조성을 한 예는 처음인 것으로 안다”고 밝혔더군요.
아시겠지만, 조선시대의 환관들은 벼슬은 물론이고 사가에 머물며 결혼도 하고 양자를 들이는 등 일반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재산이 넉넉한 이들은 후처를 여럿 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대개 그 여인들과 양아들 양딸은 가난한 서민들이었고, 형식은 결혼이나 입양이었지만 실제로는 인신거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등 정·야사에는 환관의 아내들이 등장하는 성性에 얽힌, 추하달 수도 슬프달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고 합니다.
나업의 삶이 어떠했고, 어떤 연유로 죽었는지(아니면 죽임을 당했는지)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듯합니다. 어쨌건 아내 한씨는 먼저 간 불구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마음을 저리 남겼던 것입니다. 벼슬의 고하와 무관하게 천시됐던 육체적 결함 탓일까요? 아미타부처께 발원하는 마음을 협시보살인 지장보살의 복장에 담은 마음도 뭉클했던 것 같습니다.


기와의 기록은 부처님과의 만남의 한 형식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 나업과 한씨의 이야기처럼 먼 훗날 역사의 작은 기록으로, 또 이야기로 발굴될 수도 있습니다. 또 가깝게는 ‘나’의 기록입니다. 내 여정의 기록이고, 마음의 기록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한 순간 나의 모든 것을 거기 담는 드문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한없이 삼가며 가장 소박한 정보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은 물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저는 민원서류 발급받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듯, 주소와 이름을 기재하는 그 천편일률의 형식이 새삼 의아했습니다. 지금의 거처가 영원히 자신의 것일 수 없고, 이름조차 자신만의 독점물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또 부처께 정성을 바치면서도 신분을 증명해야 할까 싶고, 발원자의 주소와 이름을 몰라 부처님의 원력이 미치지 못할 일이 있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가족들의 생년월일을 빼곡히 적고 그래도 공간이 부족하면 종이를 덧대기도 하는 초파일 연등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름도 주소도 없고 사적인 발원의 문구도 없이, 여름 한낮의 한 줄기 바람처럼 자신이 그 순간 고맙게 여기는 대상이나 귀한 사람과 나눈 추억의 한 장소, 혹은 ‘어머니’처럼 익명이지만 누구에게나 사무치는 한 마디를 적어둔 그런 기와를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러면 부처님도 그 색다른 정성에 더 오래 눈길을 두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우선은 저처럼 일없이 여행하는 이들의 마음도 조금은 더 너그럽고 푸근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제가 사는 곳에는 연 이틀 폭우가 쏟아졌고, 이제 더위도 한풀 꺾인 것 같습니다. 남은 더위도 만만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곧 가을 겨울이 올 것이고 몇 해가 또 흐른 뒤 문득 지난여름의 ‘기록적인 더위’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산그늘에서 또 절 집 마당에서 맞이하던 그 서늘한 바람의 느낌을 함께 그려볼 수 있어서, 제겐 고마운 여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