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9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다람살라소식
    생활의 지혜
    금강계단
    고전속의 명구감상
    불교설화
    반야샘터
    불서
    즐거움을 뿌려라
    건강한 생활

과월호보기

나의 근기根機는 어떠한가?

현재호
후애마이(Who am I)연구소 소장 / 여래사 거사림회 총무이사 /Blog.daum.net/hyun-jaeho


그 사람은 근기가 낮아서 스님의 말씀을 이해 못하는 것 같아 ~
인생이란 근기 따라 가게 마련이지 ~
근기라는 단어를 우리는 자주 사용합니다. 때로는 푸념하며… 때로는 다독거리며… 근기를 거론합니다. 그런데 위에 두 문장에서 사용한 근기라는 단어가 옳게 쓰인 것일까요?


이번 호에서는 근기根機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가볍게 풀어보고자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우선 죄罪라는 한자漢字를 풀어보도록 하지요.
1. 죄를 짖다… 할 때 ‘죄罪’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요?
한자는 풀어보면 거의 모든 자字가 태곳적부터 쌓여온 깊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 중에 죄라는 글자는 참으로 독특합니다. 단순한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글자입니다.
4개를 뜻하는 넉 사四와 아니라는 뜻을 갖는 아닐 비非가 함께 붙어있는데요, 어떤 한자 책에서는 아닐 비非 위에 있는 四를 四가 아니라 目(눈 목)을 뉘어 놓은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을 본 바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지경인 것은 죄罪이다, 라고 설명하는데요. 그것은 매우 단순한 풀이입니다. 냉정하게는 그릇된 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 해보겠습니다. 罪 = 四 + 非
결국 단순하게는 ‘네 개가 아니다’, ‘네 가지 모두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네 가지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4라는 글자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네 가지’를 뜻하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라는 뜻 같은데요, 과연 네 가지가 무엇이기에 네 가지가 아니면 죄라는 것일까요?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네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사四는 세상의 진리를 뜻합니다. 사四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최고(마루 종宗)의 가르침(가르칠 교敎)인 종교의 진리, 그 이전에 자연의 진리를 말합니다. 대 자연의 진리, 아니 진실 말입니다. 대 자연은 어떤 진실을 품고 있을까요? 그 어떤 종교, 어떤 교리이던 간에 대 자연의 흐름을 본 받아, 대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살기 위한 방안과 방편을 가르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인 것이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높은(마루 종宗) 가르침(가르칠 교敎)이니까요.


마루 종宗 가르칠 교敎 → 최고(마루)의 가르침 → 종교宗敎
결국 최고의 삶이란, 높은 명예와 부유한 재산이 아니라, 자연의 진리에 맞추어 사는 삶이 최고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열반하실 때 “나는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다”라고 일축했습니다. 무슨 의미겠습니까? ‘대 자연의 흐름을 우리가 다 보고 느끼고 있건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여 내가 한마디 했을 뿐, 내가 말한 것은 그저 대 자연의 숨결을 알려 줬을 뿐이니 그것이 어찌 내가 말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겠습니까?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진리를 몰라서, 자연을 배운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다람쥐는 그 어떤 교육도 필요 없이 잘 살아가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우리는 대 자연 앞에서 죄인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와 진리를 모르고, 자연의 법칙과 흐름에 위배된 일을 하면 그것이 ‘죄’이고 ‘업’을 쌓는 일인 것이지요.


자! 그러면, 본론으로 돌아와 ‘네 가지가 아니면 죄’라고 했으니 네 가지를 뜻하는 四의 의미만 알면 되겠습니다.
①유有, ②무無, ③비유비무非有非無, ④역유역무亦有亦無 이렇게 네 가지 입니다.
① 있기도 하고 → 有
② 없기도 하고 → 無
③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 非有非無
④ 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 亦有亦無


간단히 예를 들면 산천초목의 어떤 나무 한 그루가 앞에 있다면(有) 그것은 원래 있던 것도 아니므로(無) 그것을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非有) 그렇다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非無). 그러니 나의 근기根機는 어떠한가?
이러한 이치를 모르거나 지키지 않으면 → ‘죄罪’
나무는 내 눈앞에 있다고 볼 수 있으며(亦有), 또한 없다고 볼 수도 있다(亦無)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태초에 없었으나 언젠가 생긴 것이고 지금 이순간 있는 듯이 보여도 영원하지도 않을 뿐더러, 언젠가 없어질 것이라고 해서 지금 그 존재를 부정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는 것이 칼로 그은 듯 명확히 정의 할 수도 없으므로 법法이라 함은 정해진 것도 아니고 법이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그저 물(물 수水)이 흘러가듯(갈 거去)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살아야 할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법法이라는 한자漢字는 물 수水 + 갈 거去인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이치의 기본을 말하는 ①유有, ②무無, ③비유비무非有非無, ④역유역무亦有亦無를 지키지 아니하는 것(아닐 비非)은 죄罪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마음은 어디서 생길까요? 그것은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전세前世에서 현세現世에 이르기까지의 삶에서 얻은 경험으로 인하여 이치를 이해하는 정도가 틀려지거나 심지어 부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다람쥐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에게 다람쥐를 이해시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람쥐에 대한 설명을 듣는 사람은 막연하게나마 다람쥐의 형상을 상상하며 긍정의 마음으로 설명을 듣는다면 어렴풋이나마 다람쥐를 이해하겠습니다만, 설명을 듣고 있으나 자신이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마음에서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다람쥐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경험의 뿌리, 지식의 뿌리, 맛을 본 경험, 들었던 기억, 냄새에 대한 기억, 맛을 본 기억, 만져본 감촉 그리고 느꼈던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대상을 평가하는 것. 그것이 근기根機입니다. 그렇게 경험은 뿌리를 만들고 그 뿌리는 세상을 터득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을 돕기도 하고 무산시키기도 합니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전세前世 경험의 작용으로 인하여 그나마도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동일한 존재를 보는 이에 따라서 ‘있다’고 보기도 하고 ‘없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은 마음마저 흔들리게 하지요. 동일한 존재를 다르게 보는 이유는 그 사람의 ‘근기’ 때문입니다.


2. 안근 → 색경 → 안식
일명 18계라고도 부르는 ‘육육육’법에 있어서 육근六根 + 육경六境 + 육식六識은 근根으로 경境이라는 대상을 인식識 한다는 의미로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박스 내용 참조)
이중에 ‘안근眼根 → 색경色境 → 안식眼識’을 예를 들면, 어떤 모양(색)을 눈(안)으로 보고 인식(식)함에 있어서 예를 들어 봅니다. 양파 구입을 목적으로 낯선 재래시장을 갔을 때, 우리는 야채 가게를 찾습니다. 야채가 잔뜩 쌓여있는 가게를 연상하며(이때 이미 근을 만든 것입니다) 두리번거립니다. 이와 같이 비교치(안근)를 기준으로 유사하거나 같은 것을 찾습니다(색경). 야채가게를 발견하여 가까이 가서(양파를 생각하며, 근) 자세히 보니 양파가 없습니다. 없다는 것을 인식하거나, 혹은 있는 경우,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안식) 양파를 집어 들고 자세히 봅니다. 그 순간의 안근은 어디 무른 곳이 있는지 싱싱한지 판단하기 위함으로 가득 찹니다. 이때의 색경은 양파로 집중되어 세부직인 인식(안식) 작용이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시시각각 변하는 ‘근’은 삶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목적에 따른 ‘근’이 없다면 줏대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한가위’를 검색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인터넷에 접속하니 현란하게 번쩍이는 광고, 주위를 끄는 특종 기사 등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내 그것을 클릭하여 광고와 기사를 봅니다. 이 경우는 ‘한가위’를 검색하고자 하는 자신의 ‘근’을 망각하고, 순간 ‘근’이 변경된 경우입니다.


주위 산만한 사람일수록 근기가 약합니다. 끈기가 없거나 약하다는 말의 어원은 ‘근기가 약하다’는 말이겠지요. 근기가 약하면 목표설정이 어렵습니다. 설혹 목표를 설정하여도 쉽게 포기하거나, 목표가 흐려지기도 합니다. 반면에 극단적인 예로써 ‘무대뽀’는 의미 없이 근기가 너무 강한 형국이겠습니다.


무대뽀 : 일본어 ‘무텝포無鐵砲’에서 유래한 말. ‘무모한, 분별없는, 앞뒤를 안 가리는’ 이라는 뜻입니다. 無鐵砲(むてっぽう), 총 없이(무철포) 전쟁에 나가는 막무가내를 이르는 말. (무모한, 막무가내 등으로 한국어를 사용하여야겠습니다.)
이와 같이 근기란 모든 행동에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3. 길 건너편에서 아이를 보고 손을 흔드는 엄마
유치원 다니는 어린아이가 건널목 저편에 마중 나온 엄마를 보는 순간 엄마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합니다.(달려오는 차도 아랑곳없이 말이죠) 근기라는 단어에서의 ‘근’은 전세前世를 기반으로 견고히 뿌리박은 요소도 있지만, 한 순간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뿌리를 근간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기타 나머지 것은 모두 제외시키는 명분을 갖게 됩니다.


나의 근기根機는 어떠한가?
① 안근眼根 → 색경色境 → 안식眼識
② 이근耳根 → 성경聲境 → 이식耳識
③ 비근比根 → 향경香境 → 비식比識
④ 설근舌根 → 미경味境 → 설식舌識
⑤ 신근身根 → 촉경觸境 → 신식身識
⑥ 의근意根 → 법경法境 → 의식意識


한 순간 ‘엄마’라는 존재가 ‘근’의 역할을 하여 여타 감각을 모두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엄마라면 길 건너편에 예쁜 내 아이 얼굴이 보여도 못 본채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야 할지도 모릅니다.(수 초 후에 만날 것을 미리 손을 휘 저으며 아는 척하여 아이를 산만하게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 순간 아이의 근기를 흐트러뜨리게 되니까요.


4. 삼세三世를 초월하는 근기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법성게』 중에서
이 부분을 근기에 대입해 보면, 근기란 전세부터 이루어 진 부분도 있고, 현세, 이 순간에 만들어 진 부분도 있으며, 내일(미래)을 고려하며 만들어지기도 한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 이순간, 어떤 결정을 하기 위하여 머리가 복잡하거나, 느닷없는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이것을 처리 할 때의 내 마음가짐 또는 그 처리 또는 판단 기준은 모두 내 근기를 바탕으로 하되 그러한 근기는 삼세의 모든 조건이 어우러져 있음입니다.


이와 같이 혼잡한 근기로는 아무런 성과를 올릴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전세의 조건은 어찌 할 도리가 없다 하더라도 과거의 경험에 집착한 판단 기준이나, 막연한 내일(미래)을 상상하여 만들어진 기준, 그렇게 만들어진 근기를 마음 저변에 깔아 놓으면… 그 기준 이외의 것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5. 근기가 좋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인 남편, 아무리 법문을 들어도 비몽사몽이신 분, 운전을 비롯하여 사고가 잦은 분, 남들과 자주 시시비비를 가리는 분, 고집과 아집이 센 분, 어떤 사건에 집착이 심한 분 그리고 스토커 등 이런 분들은 근기가 약하거나 과하게 센 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근기가 약하거나 센 것은 바람직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근기가 좋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양파가 필요 할 때 양파가 없어서 절절 매거나 양파가 없음을 원망하는 행동은 자신의 근기에 노예가 되는 형국입니다. “양파가 없네~” 이것으로 끝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단맛을 내기 위하여 약간의 설탕이나 물엿으로 대치하고 대파의 흰 부분을 더 넣던지 해서 해결하는 유연성. 그것이 좋은 근기의 본보기입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면 빨리 분석하고 털어버린 후 다음 일을 해야 하건만, 그 기분에 하루
종일 저기압으로 모든 만남을 툴툴거리고, 짜증내고, 심술을 부리거나 누군가를 원망 한다면, 그것은 나쁜 근기 입니다.
오랜 세월 종교생활을 하며 무엇인가를 깨친 듯 하더라도 깨친 내용으로 지속적인 수행과 실천을 하여야 하건만, 자신의 깨침을 자랑하고 섣부른 행동으로 뭇 사람들에게 빈축을 산다면 깨침을 얻은 것이 아니라 깨침의 명분으로 오히려 근기가 나빠진 경우입니다.


6. 근기는 조절할 수는 없나?


삶에 변수가 되는 근기, 근기는 전세, 현세 그리고 내세로 나뉩니다. 내세는 미래의 일이므로
아랑곳 할 것 아니라고 생각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순간, 내일 또는 내년 벌어질 일에 들떠 있거나, 그렇게 될 것이라는 꿈이나 야망이 필경 이 순간의 근기에 영향을 줍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에 들떠 있는 것도 업業을 쌓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며 잠시 흥겨웠을 뿐인데 왜 업이겠습니까? 지금의 근기를 망칠 수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근기를 좋게 만드는 것과 선업을 쌓는다는 이야기는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를 논하는 것과 같은 급의 이야기로 보셔도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역시 악업을 쌓는 것과 근기를 나쁘게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법성게』에서 말하듯 지금 내 마음의 작용은 전세, 현세, 내세가 어우러져 현재 이 순간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작용은 새로운 근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의 근기는 좋고 나쁨으로 정리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순간순간 근기가 요동하기 때문이죠. 금방 깔깔거리고 웃다가 이내 얼굴을 찡그리지 않습니까? 화나는 순간, 근기는 바닥으로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다시 올리려면? 시간이 좀 걸리죠. 하지만 자주 화내면… 떨어진 근기가 올라올 기회가 없겠군요. 아니 더욱 떨어질는지도 모르지요. 근기란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근기는 시시각각 변합니다. 전세의 삶으로 인하여 기본 근기는 정해질 수 있겠지만, 현세의 감정과 미래의 들뜸으로 인하여 근기는 요동하게 되어있습니다.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
 『금강경』 중에서


『금강경』에서 말하듯 우리의 마음자리는 편할 틈이 없이 삼세三世를 넘나듭니다. 하지만 삼세의 그 어떤 마음도 가져올 수도, 정돈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집착과 미래의 꿈을 깊이 생각하는 만큼, 내 근기만 흐트러질 뿐입니다.(혹은 나빠지거나…)
모든 경전, 탈무드, 성경, 코란 등에서 항상 강조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지금 이 순간을 직시하고 이 순간의 삶에 열정을 쏟으라.
2. 반드시 선행善行을 하고 이타심利他心을 가져야 한다.
두 가지를 지키면 무슨 일이 생기기에 그토록 두 가지를 강조하고 주장할까요? 심지어 방대한
『묘법연화경』을 단 두 자로 줄인다면 <선행>입니다.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두 가지를 지키고 살면, 아니 지키려고 노력만 하여도 어떤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네, 바로 근기가 좋아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방법을 바꾸고, 순간순간을 직시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좋은 근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덕경』에 이르기를, 모든 것은 자연 흐름의 방편이니 인간은 대지의 법을 따르고(人法地) 땅은 하늘의 법을 따르며(地法天) 하늘은 도의 길을 따라가고(天法道) 도는 자연의 흐름을 따를 뿐이다(道法自然)라고 하였습니다. 세속에 묻혀 사는 우리의 피부에 닫는 ‘자연의 흐름’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관계입니다. 좋은 대인관계입니다.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일입니다. 그러한 마음자세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맑게 해줄뿐더러 ‘근기’를 좋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성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