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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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깎으며

승한 스님


행복나눔 대중견성공동체 빠리사선원장


매일 아침 나는 연필 깎기로 하루의 문을 연다. 매일 아침 의식처럼 되풀이하는 나의 연필 깎기는 자못 성스럽기조차 하다.
아침예불이 끝난 뒤 서재로 들어서면 나는 제일 먼저 필통에서 연필과 칼을 꺼낸다. 그리고 정성들여 연필을 깎기 시작한다. 왼손 엄지와 검지로 연필자루를 쥐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칼날을 밀면 연필 나무결 밀리는 촉감이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전해진다. 참 평화로운 느낌이다.
사르륵 사르륵 연필 깎기는 소리는 마음도 참 청아하게 한다. 그 안엔 어떤 잡념이나 소리도 끼어들 틈이 없다.
콧구멍으로 파고드는 은은한 나무 향도 마음을 참 푸근하게 한다. 개울물처럼 졸졸졸 흘러드는 향내가 마음의 샘으로 번져 들면 내 마음은 어느새 평화의 샘물이 되어 비단길을 흘러간다.


매일 아침마다 내가 깎는 연필은 모두 열 자루다. 두 서너 자루만 깎아놓고 하루를 시작하면 좀 불안하다. 한참 글을 쓰다 연필심이 부러지면 곧바로 대체할 연필이 없다. 그럴 경우 일손만 멈춰지는 게 아니다. 생각도 멈춰지고 일의 리듬도 끊긴다. 그렇다고 달랑 두 자루만 깎아놓으면 하루 일을 다 마치는데 좀 부족하다. 그래서 좀 넉넉하게 열 자루를 깎아놓으면 아주 매끄럽고 편안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연필의 종류는 경도硬度와 농도에 따라 9H, 8H, 7H, 6H, 5H, 4H, 3H, 2H, H, F, B, 2B,
3B, 4B, 5B, 6B로 구분한다. H, F, B는 각각 Hard, Firm, Black의 약자로써 연필심의 굳기와 짙은 정도를 나타낸다. 따라서 숫자가 높은 H연필일수록 단단한 반면 흐리게 써지고, 숫자가 높은 B연필일수록 부드럽고 진하게 써진다.


이 가운데 우리들이 흔히 쓰는 필기용 연필은 HB다. 9H~7H는 금속이나 돌 등 단단한 면에 주로 쓰고, 6H~3H는 정밀제도나 설계용으로 많이 쓴다. 2B~3B는 속기용으로 많이 쓰고, 4B~6B는 미술용으로 많이 쓴다.


나는 주로 B연필을 쓴다. HB는 심은 좀 단단하나 글씨를 쓸 때 촉감이 좀 거칠고, 2B나 4B는 촉감이 좋은 대신 심이 너무 빨리 단다. 그러나 B는 빨리 달지도 않으면서 종이에 기름칠한 듯 글씨가 아주 매끄럽고 부드럽게 잘 써진다. 원고지를 밀고나가는 그 부드러운 촉감이 나를 참 행복하고 평화롭게 한다. 만년필과 볼펜으로 글씨를 쓸 때는 맛볼 수 없는 쾌감이고 즐거움이다.


매일 아침마다 한 자루 한 자루 온 정성을 들여 연필을 깎다 보면 우선 머릿속이 아주 맑고
깨끗해진다. 생각도 고요하고 가지런히 정돈된다. 또한 정성스럽게 칼로 연필의 나무 결을 밀어내고 연필심을 다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의 마음이 연필 촉처럼 하나로 모아지고 맑은 집중력이 생긴다. 그리하여 내가 깎은 연필이 예쁜 원뿔형으로 잘 다듬어졌을 때 그 연필이 주는 가지런함과 섬세함의 미학에서 나는 삶의 성스러움을 맛본다.


그러므로 연필을 깎는 동안 나는 참 행복한 티베트 수도승이 된다. 연필 열 자루를 깎는데
고작해야 10분도 채 안 걸리지만, 그 10분 동안 나는 지상에서 최고의 열락과 행복과 고요와
평화를 맛본다. 아무런 잡념과 잡생각 없이 그저 느리고 단순하게 칼날로 연필의 나무를 밀어내고 심을 다듬는 동안 내 마음의 혈관은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해인海印의 바다가 되어
있다.


그래서 그럴까. 연필이 잘 깎인 날은 일도 더 잘 되고, 글도 술술 더 잘 풀린다. 원뿔형으로 초점이 가지런하게 잘 모아진 연필 촉처럼 내 마음의 초점도 그렇게 촉이 잘 모아진 탓이리라.
그러기에 마음의 촉이 잘 모아진 날은 지우개도 필요 없다. 감사하지 않아도 저절로 감사하고, 기뻐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뻐지는 충만의 하루가 된다. 만년필과 볼펜으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연필만의 힘이다. 연필만이 갖고 있는 여성성 속의 남성성이다.


그 연필의 힘으로 나는 오늘도 나의 하루를 밀고 나가고, 글을 밀고 나가고, 나의 생을 밀고
나간다. 그리고 그 연필의 힘으로 오늘도 나는 나의 마음을 가지런하게 가다듬고, 나의 영혼을 정갈하게 정돈하며, 때로는 나의 영육에 티베트 수도승처럼 맑고 아름다운 연필 같은 시를 베껴보기도 한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어도
그의 영혼은 길가에 핀 풀꽃처럼 눈부시다


새는 세상을 날며
그 날개가 세상에 닿지 않는다
나비는 푸른 바다에서 일어나는 해처럼 맑은
얼굴로


아침 정원을 산책하며
작은 날개로 시간을 접었다 폈다 한다
모두가 잠든 밤중에
달 피리는 혼자 숲나무 위를 걸어간다


우리가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새처럼 가난하고
나비처럼 신성할 것


잎 떨어진 나무에 귀를 대는 조각달처럼
사랑으로 침묵할 것
그렇게 서로를 들을 것


- 이성선의 「티베트의 어느 스님을 생각하며」


그런 마력 때문에 나는 오늘도 이른 아침 연필 깎기로 기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서재에도, 필통에도, 가방에도 전부 연필 부자로 산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나도 그 누군가의 연필이 되어주기 위해 내 마음의 연필심에 힘을 기르고 나무결을 가지런히 다듬는다.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연필이 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