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상 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계율에서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였다. 대학시절 5계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계를 주시는 전법사스님께서 ‘불음주계’에서 자신 없으면 대답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친절하게 설명하셨다. ‘지키겠느냐’ ‘예’ ‘지키겠느냐’ ‘예’ 하다가 친구 몇 명은 실제로 불음주계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예’ 대답해놓고 자신의 5계를 받은 것은 전생으로 여겨버리고 기회가 되면 마시는 친구도 더러 많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필자는 필시 전생에 너무 많이 마셨던지 금생에는 술에 대한 집착이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잘 안합니다’ 하고 대답하면 ‘에이 잘하시겠는데’ 하는 얘기는 더러 많이 듣기도 한다. 그러나 대장과 소장이 알코올 냄새를 맡아도 흥분하거나 하지 않는 걸 보면 전생에 좀 마신 덕분이라고 위안 아닌 위안을 삼고
있다. 술자리가 포장마차에서 밤새 이어지면 술을 안 마시거나 술이 약한 친구들은 기회 봐서 술자리를 더러 탈출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컵에 맹물을 따라 마시면서 거뜬히 술 마시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다음에 만나면 자신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잊어버리고 나도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잊어버린다. 다만 밤새 뭐가 그리 애절한 일이 있었는지 이 얘기 저 얘기 풀어놓는 친구도 있고 ‘너는 왜 안 마시는 거야’ 하고 중간에 갑자기 사납게 따지고 드는 친구도 있다.
고문진보 전집에 이태백이 홀로 술을 마시면서 지어놓은 시가 있다.
天若不愛酒  하늘이 만약에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천약불애주
酒星不在天 주성(술별)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고
주성부재천
地若不愛酒 땅이 만약에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지약불애주
地應無酒泉 땅에 주천(술샘)이 없었으리라
지응무주천
天地旣愛酒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고 있으니
천지기애주
愛酒不傀天 술을 사랑하는 것 하늘에 부끄러운 일 아니라네
애주불괴천
已聞淸比聖 일찍이 청주는 성인에 비한단 말 들었고
이문청비성
復道濁如賢 또 탁주는 현인과 같다고 말하였다네
부도탁여현
聖賢旣已飮 현인과 성인을 이미 술로 마셨으니
성현기이음
河必求神仙 하필 신선을 구할 필요가 있으랴
하필구신선
三盃通大道 석잔을 마시면 대도에 통하고
삼배통대도
一斗合自然 한말을 마시면 자연에 합치한다네
일두합자연
但得醉中趣 다만 취중의 뜻만 얻을 뿐이니
단득취중취
勿爲醒者傳 술깬 사람에겐 전하지 마시게.
물위성자전
뒤의 두 구절에서 우리는 이태백이 취한 가운데 취하지 않는 세계나 경지에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술 깬 사람에게 전하지 말라는 말은 술에 취해버린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다.
누구나 경험이 있지만, 자신은 절대 술에 취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사람을 택시에 태우느라 얼마나 고생들이 지금도 많은가. 대부분의 택시기사님들은 멀리서도 이미 취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길 저쪽으로 빈택시를 몰고 지나가 버린다. 겨우 태우면 왜 그렇게 문 닫기를 싫어하는지 알 수 없다. 택시 문을 닫는데 또 한참 시간이 걸린다. 쭉 타고 가면 참 다행인데 조금 있다 택시에 탔던 사람이 어느새 나타나서 조금 더 마셔야 되겠다고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자신은 절대 취하지 않았단다. ‘아이고 나 취했어’ 하고 말하는 사람은 확실히 덜 취한 사람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어느 전문분야를 자신 있게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저 취한 사람이 절대 안취했다고 말하는 것과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한없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오묘해지는 세계를 어찌 쉽게 안다고 할 수 있으랴.
‘예 잘 마십니다’ 하는 사람은 글쎄 오래 안 마신다. ‘쪼금 마십니다’ 하고 나지막하게 말하는 사람은 2박 3일을 거뜬히 마신다. 그리고 조용하다.
모든 고전이 다 그러하고, 한문으로 되어 있는 고전의 세계도 한없이 깊다. 똑같은 내용인데 다시 읽을 때는 맛도 다르고 이걸 내가 미쳐 못 보았구나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태백의 「獨酌」도 전에 읽을 때는 호방한 스케일에 박수를 보냈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스케일도 스케일이고 취한 채로 멀쩡하게 깨어있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태백이 취한척한 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밤새 마시고 다음날 출근을 못하거나 출근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애주가이긴 해도 좀 더 단련이 필요한 사람이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밤새 마시고도 다음날 씩씩하게 출근해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도 있다. 실명을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태백은 술 이전의 술과 술 이후의 술을 한잔 술에서 다 마셨다. 그는 깨어있어도 취해 있었고 취해 있어도 깨어 있었다. 비몽사몽의 상태가 아니라 철저하게 취한 상태 그대로 철저하게 깨어있었던 것이다. 철저하게 취한채로 철저하게 깨어있지 못하면 석 잔 술에 대도를 통할 수 없고 한 말 아니라 오대양을 전부 술로 만들어서 마신다 해도 자연에 합치할 수 없다. 자연이 합치해주지 않는다. 애주가들은 참으로 철저하게 깨어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흠뻑 취할 일이다.
진묵대사는 오대양을 한 잔 술로 마셨다. 지구를 무대삼아 춤을 추었다. 달과 우주 허공의 별들이 춤추는 무대의 조명장치였다. 백두산맥은 무대의 한 켠을 막아주는 벽돌 한 장이었다. 진묵대사가 한 잔 마실 때 우주 허공의 별들도 안주를 먹었고 진묵대사가 춤을 출 때는 지구가 들썩이고 허공의 별들이 다 흔들렸다.
술 마신 사람이 잘못 흔들리면 맨 먼저 그 사람의 치아가 흔들리고 다음으로는 가족이 흔들리고 그 사람이 타는 지하철이 흔들린다. 술 마시고 흔들리는 사람이 많은 날은 유난히 지하철이 더 세차게 덜컹거린다. 선장이 술을 마신 세월호는 흔들리다 못해 아예 가라앉아 버렸다. 깨어있는 채로 취했어야 할 것을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어른들이 이 시대의 학생들에게 고전을 요약본으로 공부하게 인도하고 있다. 대입과정에서 요약본이 인기를 끈다. 고전을 요약본으로 가르치는 것은 술 마시고 치아가 흔들리는 것보다 못하다. 가능성이 무한한 학생들의 마음을 어설프게 흔들어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은 아예 안 읽는 것이 요약본으로 읽는 것보다 낫다. 이왕 읽으려한다면 우직하게 원본 전체를 한 권이라도 읽어야 할 것이다. 밥을 한 달에 한 끼로 요약해서 먹지는 않는다.
고전도 요약해서 읽는 것이 아니다.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고전 읽기가 안타까워서 취하지 않았는데도 그만 취한 것처럼 말이 길어졌다. 가을바람이나 시원하게 맞이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