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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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불경은 어려우니, 법문을 들어야 한다

신규탁(연세대 명예교수, 철학 전공)



1.
불교는 참 어렵다. 경전의 내용도 어렵고, 그 내용을 생활 속에 실천하기는 더욱 어렵다. 과연 이 어려운 것을 누가 배우고 실천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기로 한다.
석가모니불 살아생전 당시 직접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어려웠을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공유하던 현실이 있다. 상황 속에서 한 대화이므로,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더라도 부처님께 다시 여쭈면 궁금함이 풀렸을 것이다. 설사 당장에 이해가 안 되더라도, 나중에 다시 뵈었을 때 다시 여쭐 수 있었다. 게다가 부처님은 지혜로운 분이니 상대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눈높이에 맞추었을 것이다. 훌륭한 교사이셨다. 또 듣는 이도 존경심을 가지고 또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한 처지에서 생각하면, 사진이나 영상이라도 찍어두었더라면, 또는 녹음이라도 해 두었더라면. 그러나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부처님 당시에는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적어둔 기록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걸 읽어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문서가 있을까? 있다.
지혜로운 제자들은 석가모니불 입적하신 후, 자신들이 들었던 부처님 말씀을 기억하고 남들에게도 전했다. 물론 그런 일을 혼자만 해서는, 한 개인의 기억만으로는 빠지거나 틀릴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제자들은 지혜를 모았다. 집단적으로 기억하자. 그리고 기억한 것을 집적으로 검증하자.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결집結集’이다.
현재 남겨진 경전의 형식으로 보면, 아난阿難 스님이 기억을 더듬어 들었던 내용을 소리내어 말하면, 나머지 제자들이 자신이 들었던 내용과 같은지 다른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불경의 첫 시작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이 평생에 하셨던 이야기이니 그 분량도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


2.
그런데, 그렇다면 그렇게 제자들이 기억을 더듬어서 집단적으로 남겨놓은 이야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어려웠다. 한 스승께 함께 들었지만, 듣는 이의 처지에 따라 ‘해석’이 같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런 일은 지금의 우리들도 세상을 살면서 경험했다. 문서로 작성했는데도 서로의 해석 차이로 심지어는 법정 다툼까지 생긴다.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복하여 헌법재판소에서 헌법소원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있다.
부처님께 들은 이야기를 집단이 기억하고, 나중에 그것을 문서로 만드는 과정에서도 이견異見이 생겼다. 문서를 해석하는 과정에도 분분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런 사연들은 불교의 역사가 증명한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전문 학승들이 노력했다.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제자들 사이에 견해가 달라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교단은 분열되어 무리별로 갈라졌다. 불교의 역사에서 이를 부파部派라 하는데, 대표적인 부파가 ‘상좌부’와 ‘대중부’이다.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상좌부’ 스님은 보수적이었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던 제자들이 ‘대중부’였다. 양쪽의 스님들은 긴 세월 지내오면서 자신들의 스승들이 부처님께 들었던 말씀들을 암송해서 제자들에게 전승했다.
세월 속에서 부처님 말씀을 바라보는 해석의 관점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 한 사례를 들면, 상좌부에서 갈라진 <설일체유부> 계통의 스님들이 전승한 󰡔장아함경󰡕과 󰡔중아함경󰡕에서는 ‘연기緣起’를 강조하지만, <대중부> 스님들이 전승하던 󰡔잡아함경󰡕에서는 ‘공空’이 강조된다. 서북 인도 캐슈미르 지역에서 대승 불교 운동을 일으키던 스님들은 대중부의 입장을 좋아하고 설일체유부의 입장을 멀리하였다. 이러한 대승 불교의 발생 배경으로 인해, 경전 속에서는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라도 해석에 차이를 보인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법망경󰡕만 해도 그렇다.
반야부의 전통을 계승한 󰡔법망경󰡕은 <대중부>의 󰡔잡아함경󰡕 전통을 수용했고, 그런 전통으로 ‘12인연설’을 비판하고 공을 강조하는 대목이 여러 곳에 등장한다. ‘연기’ 사상이나 ‘공’ 사상, ‘무아’ 사상은 비슷한 듯하지만, 경전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약간씩 설명한 결이 다르다. 점점 어려워져 간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부처님 입멸 후 제자들이 전한 ‘부처님의 말씀’은 어려웠다.


3.
󰡔법망경󰡕에서는 대승을 실천하는 수행자로서 보살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 보살이 살면서 기르고 가꾸어야 할 덕목을 10가지로 요약하여 ‘10장양長養’으로 묶었다. 그중에서 첫째가 가진 것을 버리라고 한다. 󰡔법망경󰡕의 용어로 ‘사심捨心’을 실천하라고 했다. 󰡔법망경󰡕 본문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①그대 불자여. 첫째, ‘사심捨心’이란 일체를 버리는 것이다. 국토와 성읍과 전답과 집과 금은과 밝은 구슬과 아들·딸(男女)과 자기 몸과 유위有爲에 해당하는 물건 일체를 버리되, 인위적 조작도 없고(無爲) 티 없이(無相) 실천하느니라. ②‘나(我)’와 ‘남(人)’이라는 지견知見은 ‘임시 모임(假會)’으로 합성된 것이다. (외도들은 말하는) ‘주재자(主者)’와 ‘조작하는 자(造作者)’와 신아(神我, Puruṣa·Ātman)와, ③(성문승과 연각승들이 말하는) 12인연 등등은 ‘모여서 만들어진 것(合)’도 아니고 ‘흩어져서 사라지는 것(散)’도 아니며, (모이거나 흩어짐을) ‘받을 자(受者)’도 역시 없다.
④12입入과 18계界와 5음陰 등 모든 법은 일합상一合相일 뿐이니, 거기에는 ‘나(我)’와 ‘내가 마주하는 대상(我所)’으로서의 기능(相)이 없으며, 임시로 만들어진 여러 법에 불과하니라. ⑤만약 안의 일체 법과 밖의 일체법을 버리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면, 보살은 이때 이름하여 ‘임시 모임(假會)과 같다고 보는 관찰’이 눈앞에 나타나니, ⑥그러므로 ‘버림의 마음(捨心)’ 수행으로써 ‘공삼매空三昧’에 들어간다.”


설명을 위해서 필자가 본문에 ①~⑥의 번호를 붙였다. ①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까? 인도의 출가자들은 이렇게 했다. 당시 스님들은 일체를 버리고 수행자 공동체도 들어가 그렇게 살았다. 그 대표적인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불교의 실천이 어렵다는 것은 어쩌면 근본적으로 이런 데에 있다. 이런 말을 따르고 실천할 사람이 요즈음 세상에 있을까? 이런 문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너무 많이 갖지 말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일체를 버리라니 스님들도 불가능하고 신도들도 그렇다. 그런 심정으로 인생을 살라는 뜻일까? 참으로 어렵다.
②번 이하는 일체를 버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나’라고 할 게 없으니 ‘내 것’이랄 게 있겠는가는 뜻이다. ③번처럼 ‘12인연’의 각 조항 즉,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각각이 모두 무상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말은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일까?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는 ⑥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공삼매空三昧란, 일체법이 공한 줄 아는 삼매이다. ‘일체법’ 속에 ‘12인연’도 들어가니 이것도 12개의 조항(支) 각각도 결국은 공하다. ‘일체법’이란, ④에서처럼 󰡔잡아함경󰡕 등 소위 아함부 경전에 많이 나오는 5온, 12처, 18계를 말한다.


4.
불교 경전에 담긴 내용은 어렵다. 첫째는 내용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고, 둘째는 실천하기가 어렵다. 그러면 어찌해야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대로 불교를 믿고 실천할 수 있을까? 필자의 대답은 이렇다. 훌륭한 스님의 법문을 듣고, 훌륭한 스님의 행동을 본받아 나도 실천하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훌륭한 스님이 계시는 사찰을 다녀야 하고 사찰에서는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어 불경을 읽어가며 대중들에게 구절구절 설명해 주어야 한다.
불경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어려우므로 전문적으로 그 방면을 연구한 스님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모든 절에 그런 훌륭한 스님을 모시기는 어렵다. 모든 스님이 불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도 없다. 그 방면에 재능 있는 분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종단적으로 그런 분들께서 해설해 놓은 경전을 선택하여, 꾸준히 읽고 생각하고 나아가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이 소위 소의경전所依經典이다. 중심적으로 의지하고 따라야 할 경전이라는 뜻이다.
불교나 기독교나 경전은 어렵다.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그래도 ‘정해진 󰡔성경󰡕’이 있어서 그것을 기준으로 거기에 의지해서 신부님도 목사님도 설교한다. 현재 한국의 불교는 아쉽지만 그렇게 ‘정해진 불경’의 역사가 짧다. 원래는 긴 세월 조선시대부터 󰡔화엄경󰡕이 그 역할을 했고, 일제강점기에도 그 영향은 남았었지만, 대한민국 시절에 바뀌었다. 해방과 더불어 1962년에 출범한 ‘대한불교조계종’은 종헌을 통해 소의경전을 󰡔금강경󰡕으로 바꾸었다. 역사적으로 긴 세월 쌓인 이 지역의 불교 신앙의 축이 변한 것이다. 그러잖아도 불교는 어려운데, 소의경전마저 바뀌어서 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승이 아닌 일반 스님들이 불교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이 방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연구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화엄경󰡕을 근간으로 했던 우리의 불교 전통에서, 긴 세월 불자들의 행동 강령으로 존중받았던 󰡔범망경󰡕을 정확하게 읽고 실천하는 일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