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진리무상眞理無相이 미언설微言說이요,
일체만물一切萬物은 무비통無非通이니라.
무상지상無相之相이 실상實相이요,
유상지상有相之相은 허상虛相이니라.
염념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이요,
염념삼독심念念三毒心이면 처처삼악도處處三惡道이니라.
생각 생각(憶念)이 보리심이면 가는 곳마다 안락국이요, 탐·진·치 삼독심으로 살고 있으면 삼악도 아닌 곳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무상지상은 실상’입니다. 모양 없는 모양이 실다운 모양입니다.
우리가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으로 색·성·향·미·촉·법의 육경六境을 대하고, 이를 통해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모든 것은 한결같지 않습니다.
인연의 소치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한시적인 모습입니다.
진리는 본래 모양이 없습니다. ‘마음 없는 마음’을 참다운 마음이라 하는 것이나, ‘모양 없는 모양’을 실다운 모습이라 하는 것은 생멸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어 문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 진리와 통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부처님 전에 모여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인과를 믿으며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바세계에서 우리만큼 깊은 인연으로 만난 이들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성문의 가르침은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조금 쉽게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는 ‘고苦’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인생에 여덟 가지 고苦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보면 온갖 괴로움을 만나게 됩니다.
연각의 가르침은 십이연기입니다. 십이연기는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로 이어집니다. 이를 역설적으로 살펴보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왜 늙고 병들고 죽는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태어났는가?’ 그 원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보면 무명無明, 곧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화성유품化城喩品」의 핵심은 수행 과정에서 겪는 괴로움과 두려움을 어루만져 주시는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통지승불의 옛 인연을 설하시면서 ‘화성化城’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화성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완전무결한 성城이 아닙니다. 마치 연극무대의 무대처럼 방편으로 만들어진 성입니다. 앞에서 ‘무상지상은 실상이며 유상지상은 허상’이라는 것도 이와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멀고 험합니다. 수행자들은 그 길을 가다가 지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마침내는 “이제 그만 가야겠다.” 포기하고 돌아서려 합니다. 그때 지혜로우신 길잡이 부처님이 나타납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낙담하여 가던 길을 포기하려 할 때, 포기하지 않도록 중간에 한 성城을 만들어 잠시 쉬게 하려 하십니다. 그곳에서 피로를 풀고 마음의 편안함을 얻도록 합니다. 이 화성化城은 성문과 연각의 깨달음을 이루게 하려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곳은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깨달음을 이루신 뒤 펼쳐 보이신 높은 진리의 세계를 중생들이 이해하기 어려우니, 근기에 맞추어 성문과 연각, 보살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보살의 대승을 원효대사는 『기신론소起信論疏』 서문에서 아주 명료하게 펼쳐 보였습니다. “있다고 할까? 아니, 한결같은 목숨이 텅 비어 있고, 없다고 할까? 아니, 만물이 모두 여기에서 나오네. 그것은 광활한 것이다. 대허공과 같이 사私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평등한 것이다. 큰 바다와 같이 지극히 공평한 것이다. 그것을 일컬어 도리 아닌 지극한 도리라 하며 그것을 일컬어 긍정 아닌 대긍정이라 하는 것이다. 입을 굳게 다물고 그것을 목격한 대장부가 아니고서야 누가 언설을 넘어선 대승을 논하고 사려가 끊긴 대승에 깊은 믿음을 일으키게 할 수 있으랴.” 대승에 원효대사는 이렇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염송하다 보면 그 뜻에 취하게 됩니다. 앞에서 성문과 연각의 수행자들을 위해 부처님께서 임시로 성을 만들어 쉬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문승의 가르침으로 “이것이 고이며, 이것이 고가 모인 것이며, 이것이 고의 소멸이며, 이것이 고를 소멸하게 하는 길이다.” 성문승의 자리에서 보면 세상에 고苦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불승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세상에 도道 아닌 것이 없습니다. 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길입니다. 무슨 길입니까? 불자가 가야 할 길이고, 성불의 길이며, 보살의 길이고 수행자의 길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인연과 삶의 과정, 어느 것 하나 수행자의 길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십이연기 역시 역설적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며,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합니다. 명색이 멸하면 육입이 멸하고, 육입이 멸하면 촉이 멸하며, 촉이 멸하면 수가 멸합니다. 수가 멸하면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면 취가 멸하며, 취가 멸하면 유가 멸합니다. 유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마침내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과 근심·걱정이 사라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 “부모에게서 받은 이 몸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떠나감을 보고 그것을 죽음이라 말하지 말라. 열반은 죽음이 아니니라.”
대승경전인 『법화경法華經』을 보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열반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상락아정의 상常은 영원하고 변함없는 진리의 자리인 법신이며, 락樂은 번뇌를 여읜 참된 즐거움인 열반이고, 아我는 집착하는 자아를 넘어선 참된 진아眞我이며, 정淨은 번뇌와 오염에서 벗어난 청정한 법法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불성의 자리, 열반의 자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설을 넘어선 대승의 가르침이며, 법화살림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중요한 뜻입니다.
수행자들이 충분히 기력을 회복하게 되면 부처님은 다시 길을 나서게 하십니다.
『법화경』의 비유 중에 아주 부유한 장자가 전쟁 중에 잃어버린 아들을 오랜 세월 뒤에 만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한눈에 자기 아들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아들은 자신 앞에 있는 큰 장자인 아버지를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선근과 지혜를 냅니다. 처음부터 “네가 내 아들이다”하면 놀라서 도망칠 것 같으니, 우선 집의 허드렛일부터 하게 합니다. “얘야, 여기 있으면서 집안일이나 조금 하겠느냐? 밥은 굶지 않게 해 주마.” 그렇게 먹고 지내다 보니 차츰 그 집에 익숙해집니다. 문간에서 시작해 점점 안채 가까이까지 들어오게 됩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말합니다. “네가 바로 내 아들이니라.”
이것이 『법화경』이 말하고자 하는 가르침 가운데 하나입니다.
중생들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두려움이 가라앉았을 때 화성은 사라집니다.
그렇게 편안하고 부족함 없던 성이 사라졌는데도 이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목적지인 보배섬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일깨워 다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보배섬에 이르면 모두가 성불합니다. 그래서 「화성유품」의 핵심 가르침은 방편과 지혜에 있습니다. 성문과 연각의 가르침은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깨달음의 길을 걷다가 지친 중생들에게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위로와 안식을 위한 자비로운 방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일승一乘의 완성으로 나아갑니다. 작은 깨달음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모든 중생이 일승의 도리를 깨닫고 궁극적으로 불과佛果를 이루도록 하는 것, 그것이 「화성유품」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입니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했습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에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 가운데 모두가 총명하고 뛰어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리반특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를 가르쳐 주고 둘을 가르치면 앞에 배운 하나를 잊어버릴 정도로 기억력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리석은 바보라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주리반특이 부처님께 하소연을 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너무 어리석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바보라고 놀립니다. 어떻게 해야 저도 다른 제자들처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주리반특아. 스스로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미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니라.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어리석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니라.”
우리 주변에도 재물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고, 늙고 병들어 죽음이 가까이 와 있는데도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줄 것이 있으면 좀 나누어주고 사세요.
『선가귀감禪家龜鑑』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이 말을 재가자의 입장에서 바꾸어 말해도 좋습니다. “재가자가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근과 지혜와 보리심이 있음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십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보물섬이 저기 있느니라. 걱정하지 말아라.”
수행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무엇에 얽매이거나, 무엇에 빠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하지 않는 삶입니다.
수행은 깨달음을 향한 삶의 완성입니다. 죽음의 문제까지도 진정한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수행입니다.
셰익스피어도 햄릿에서 죽음을 잠에 비유한 대목이 있습니다. 잠을 통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끊어진다면 그것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열반도 단순한 소멸이나 죽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 해탈과 열반을 오히려 두려워합니다. 삶에 대한 집착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아야 합니다. 인과를 믿고 윤회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언제나 우리 곁에서 설해지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하고, 부처님 말씀에 비추어 말하며, 부처님 말씀에 비추어 행동하는 불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태양의 빛은 1초에 약 30만 킬로미터를 갑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의 속도의 거리는 약 8분 20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태양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1초도 안 걸립니다. 찰라지간, 생각하는 그 순간 이미 태양계에 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이렇게 광대무변합니다. 그 광대한 마음을 지니고 부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얻은 환희와 법열을 자신의 삶으로 이어지게 하고, 그 따뜻한 기운이 가족과 이웃에게도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법회 때만 불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진정한 불자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