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불교에는 경전의 수도 매우 많고, 그 경전 속에서 전하는 이야기도 다양하다. 예를 들면, 극락세계는 서쪽으로 아주 멀리 한 참을 가면 있다고 말하는 경전도 있고, 그런가 하면 극락세계는 자기의 마음에 있다는 경전도 있다. 또 어떤 때는 인도의 사라쌍수 밑에서 부처님이 열반하셨다고 하고, 또 어떤 때는 지금도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 항상 계시면서 설법을 하신다는 경전도 있다. 어느 말이 맞는지 도저히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렇게 갈피 잡기 어려운 상황은 불교를 전문으로 수행하거나, 또는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학문 내지는 인간 지성의 이런 특성들로 인하여, 어느 한 쪽으로 일관되게 학설이나 이론을 정리한다는 것이 어쩌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에, 스스로 각자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 한국의 불자들은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가? 결국은 역사적인 전통을 고찰해보아야 한다. 불교는, 분류 방법이야 어찌했든, 남방 불교와 북방 불교로 나눌 수 있다. 북방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법신法身 부처님이다. 법신 부처님이 중생과 세간의 상황에 맞게 몸을 나타내시는 것이 화신化身 부처님이고, 또 중생들이 수행을 깊이 함에 따라 그에 상응하여 체험되는 부처님은 보신報身 부처님이다.
대승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하더라도, 이 경우의 부처님은 법·보·화 3신을 한 몸에 지니신 분이다. 즉 북방 불교도들이 믿는 부처님은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갖추신 신통한 분이시다. 반면 남방 불교, 소위 상좌부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6년간의 수행을 거쳐 마침내 깨달은 존재인 부처가 되신 분이다. 그러다보니 남방 불교에서는 북방처럼 부처님에 대하여 신격화 된 요소가 비교적 적다. 그 결과 상좌부에서는 깨달은 후에 약 45년 동안 보여주신 석가모니의 인간적이고 성숙한 윤리적 삶을 중시하게 된다. 어느 쪽이 옳다는 식의 배타적 평가는 적어도 신앙의 당사자에게는 의미가 없다. 서로가 인정하는 역사적 가치가 다를 뿐이다.
2.
그러면 우리는 어떤 역사 전통 속에서 불교 신앙을 해왔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확인하고, 그 전통에 기초하여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믿는 부처님은 누구이고, 또 어느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여, 더 나가서는 어느 종단에 의지하여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할까를 선택해야 한다.
대승불교의 교파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반야의 공사상을 중심으로 삼는 공종空宗이다. 티베트의 불교가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제8아뢰야식 개념에 입각한 유식사상을 중심으로 삼는 상종相宗이다. 때로는 법상종法相宗이라고 부른다.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 일시적으로 이런 학파가 유행하기는 했지만, 현재는 학문적으로만 남았지 신앙적으로 특정 교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셋째로 불생불멸하는 청정한 자성을 상징하는 성종性宗이 있다. 많이는 법성종法性宗으로 호칭하는데, 이 종파에서는 청정한 자성을 때로는 ‘일심一心’, 또는 ‘본각진심本覺眞心’, 또는 ‘마음자리’ 등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한국불교의 전통은 바로 이 법성종이다. 의상스님의 『법성게』에 나오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서의 ‘법성’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불교의 전통에 여기저기 깊게 연관되어 있는 법성종의 중심 사상은 두 말 할 것 없이 ‘법성’이다. 중생의 몸과 마음의 작용에는 불생불멸하며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본바탕이 있는데, 이 본바탕을 법성(法性, dharmat.)이라 한다. 중생과 세계의 본바탕인 법성에는 불가사의한 업의 기능(불가사의업상不可思議業相)과 청정한 지혜의 기능(지정상智淨相)이 있다. 연기법에 따라 생성했다가 소멸하는 ‘번뇌’는 모두 공하고 무상하지만, ‘법성’은 본바탕이므로 영원하다. 연기의 산물인 ‘번뇌’에 휘둘리지 말고, 본바탕인 ‘법성’을 저마다 몸소 체험하여, 그 본바탕에 갖추어진 불가사의한 능력을 한껏 누리면서 세상살이하자는 것이 법성종의 핵심 철학이다.
3.
본래 청정한 ‘법성’을 간직한 인간이 힘들게 사는 원인은 ‘어리석음’ 때문이다. 이 ‘어리석음’을 우리는 번뇌라고 한다. 번뇌에는 크게 탐, 진, 치 셋이 있다. 때와 장소를 한정하지 말고 쉼 없이 저마다의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한다. 설사 금생에 안 되면 내생에, 그렇게 하기를 세세생생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법성종의 가르침은 철학을 넘어서는 종교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어리석음’이 제거 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교종과 선종이 갈라진다. 선종의 전통에 있는 당나라 선사들은 ‘반조返照하라’ 하고, 송나라 선사들은 ‘화두話頭에 집중하여 일체의 사량분별을 쉬라’고 한다. 반면 교종에서는 ‘관법觀法을 바탕으로 보살행을 실천하라’고 한다. 자신에게 본래 간직된 참마음을 알아차리면서 더불어 6바라밀로 상징되는 화엄의 보살행을 실천하라고 한다.
법성을 근본으로 하는 한국불교의 전통에서는 ‘법성法性’을 의인화 하여 ‘비로자나(Vairocana) 부처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부처님은 모양이나 색깔이나 음성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법(法, dharma)을 몸으로 하는 법신法身이기 때문이다. 이 법신 부처님께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해서 태어나신 분이 화신化身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법신을 믿는 불제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재가 불자’이고, 또 하나는 ‘출가 불자’이다. 법신을 믿는 점에서는 두 불자가 모두 같지만, 절에 살면서 보살행을 하느냐, 가족과 함께 살면서 보살행을 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다. 출가할 것이냐? 아니면 재가할 것인가? 이것은 자아의 인연에 따르면 된다. 어디에 있던 법성을 체험하고 보살행을 하면,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생명 운동의 긴 역사’ 즉 윤회 속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깨달음 그 자체 즉 ‘법성’과 하나가 된다.
4.
이상의 불교적 철학을 바탕으로 수행하는 것이 불자들의 할 일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신이 부처님과 똑 같은 지혜와 덕을 갖추었음을 철저하게 믿고, 저마다의 형편에 따라 보살행을 해야 한다. 그러는 속에서 차츰차츰 번뇌가 사라진다. 탐내고, 성질내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사성제四聖諦 진리에 대한 지혜가 생긴다. 만약 그게 안 되면 수행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이라고 알면 된다. 특히 ‘성질머리’가 줄어드는지를 잘 관찰해야 한다. 마음에 평화가 깃들어야 한다. 불교는 실존적이고 합리적인 종교이다.
절에서 불공할 때에 다음과 같은 ‘축원’ 소리를 듣게 된다. ‘세세상행 보살도, 구경원성 살바야’가 그것이다. 우리말로 새기면, ‘태어나는 세상 마다 보살도를 실현하여 끝내는 모든 지혜를 완성하겠나이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보면 알지만, 그게 잘 안 된다. 그렇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 이 세상에서 하는데 까지 하는 것이다. 임종에 즈음하여 번뇌가 남았더라도, 발원하여 수행하기 좋은 세상에 출생하기를 평소 기도 하면 된다. 수행하기 좋은 세상은 ‘극락세계’이다. 그곳에는 보신報身이신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면서 관음과 세지 양대 보살께서 보조하시면서 우리들을 지도하신다. 이렇게 믿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이다. 이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말씀대로 살아야한다.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가르침을 우리는 ‘유교遺敎’라고 한다. 이때의 ‘유遺’자는 ‘남길 유’자이다. 그것이 바로 불경佛經이다. 불경을 수지독송하여,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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