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수연(無用秀演, 1651~1719)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무용 수연 스님은 불교가 쇠퇴했던 조선시대 불교에서 그 중흥을 위해 노력했던 스님들 가운데 한 분이다. 스님의 법명은 수연秀演이고, 자字는 무용無用이다. 속성은 오吳씨이고 용안龍安(현재 전북 익산군)에서 출생했다. 고려 때 태위太尉 벼슬을 지낸 문양공文襄公 오연총吳延寵(1055~1116)의 후손이다.
아버지가 어느 날 누런 무늬를 띤 호랑이(大蟲)가 꿈틀거리며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얼마쯤 지나자 다시 내려와서 집을 여러 바퀴 도는 꿈을 꾸고 난 뒤 어머니에게 태기가 있었다고 한다. 어린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특이하였으며 몸뚱이는 곱고 깨끗하였고 이마가 각이 진 것이 오뚝하게 생겼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고 말수가 적었으며, 나이 겨우 여덟 살에 경사經史를 배우기 시작했다. 열세 살 때 갑자기 부모를 여의고 오직 형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스님은 비록 곤궁하고 외로운 처지에서도 삼분오전三墳五典과 제자백가諸子百家 등을 모두 수집하여 열람하면서 글귀를 뽑아 글이나 짓는 작태는 조금도 없었으므로 이로 인해 이름이 원근에 널리 퍼졌다.
나이 열아홉이 되자 덧없는 인생이 순식간임을 살피고서 출가할 큰 뜻을 내었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형에게 알리지도 않고 빠져나와 남쪽 길을 향하다가 우연히 조계산 송광사松廣社에 들렀다가 혜관惠寬 노스님을 의지해 출가한 후 혜공慧空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가슴속이 쇄락灑落하고 남의 장단을 말하지 않았으며, 오직 도道만을 따르고 명리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문을 닫고 조용히 지내었다. 나이 22세 때는 “예로부터 대도大道를 통하고 심원心源을 깨닫는 자는 선禪과 교敎를 병행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선문에만 전념한다면 그것이 이치상 옳겠는가?”라고 하는 스승의 말을 듣고는 태도를 고쳤다. 처음에 침굉 현변(枕肱懸辯, 1616~1684)의 문하에 나아가서 한번 현음玄音을 듣고는 다시 일러 주지 않아도 통달하였으므로, 침굉이 “원돈圓頓의 법계가 온전히 너에게 있다.”라고 찬탄하였다.
26세에는 침굉의 부탁을 받고 조계산 은적암隱寂庵으로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 스님을 뵙고 경전의 어려운 부분을 물었다.  백암이 한번 보고는 크게 기특하게 여겨 문도에게 “이 사람은 고현古賢의 자리를 빼앗고 금선金仙의 문을 활짝 열 것이다.”라고 말하니, 문도가 모두 경외하였다. 선사가 이로 인해 여기에 주석하였는데, 경經을 가지고 토론할 때마다 의견이 합치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새로 깨닫게 되는 점도 더욱 많았다. 그래서 몇 년 사이에 장경藏經을 모두 섭렵하고는 용문산으로 이주하여 다시 내관內關을 수련하였다. 1680년(숙종 6) 금화동金華洞 신불암新佛庵에 먼저 거하고, 선교의 참학들이 매우 간절히 요청하자 선사가 그 인연에 응하였는데, 새로 참여한 자들이 또 많아서 그 장소가 비좁았으므로 1683년(숙종 9)에는 송광사의 미타전彌陀殿으로 이주하였다. 점차 배우고자 하는 자들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되자, 밤중에 희양산의 옛 거처인 백운암으로 몸을 피해 정혜의 수행에 더욱 힘썼다.
1688년(숙종 14)에는 송광사로 가서 백암 스님을 재차 참알參謁하고는 화엄소초華嚴疏鈔를 받아 자세히 탐구하고 은미한 뜻을 찾아내어 그 정수를 모두 터득하기도 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백암 스님이 징광사에서 화엄연의華嚴演義 및 대명법수大明法數·간정기刊定記와 정토서淨土書 등을 간행하여 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을 열어주려고 할 때 스님도 함께 그 일을 도왔다.
스님은 1704년(숙종 30) 봄에 갑자기 대중을 물리치며 말하기를, “부질없이 혀를 놀리기보다는 전심專心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고는, 옷자락을 떨치고서 용문龍門의 은봉암에 거하였다. 이로부터 가르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는 등 일정하게 따르는 기준이 전혀 없었는데, 학도가 추종하는 것이 마치 새들이 난 새가 날아가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과 같았다. 스님은 반야심경의 주석서에 대한 서문을 짓기도 하였다.
이 반 지紙의 경전은 글자 수가 적고 문장도 간략하지만, 대반야바라밀다경 600권의 핵심을 담아서 모든 반야의 뜻을 포괄하고 대장경의 이치를 다 포섭하였으니, 가히 모든 불타의 어머니이자 만행萬行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관음보살이 불타의 신력神力을 이어받아 넓은 뜻을 간략히 설하여 모든 세간에 남겨 두었으니, 7부의 대중(七衆)의 언설에서 항상 회자된다. 화엄경이 일체경의 으뜸 되는 근원일지라도 많이 수지·독송하는 것으로는 이 반야심경을 능가하지 못한다. 만약 뜻이 풍부하되 문장이 간략하지 않았다면, 상相을 쓸어 없애고 공을 밝히며 허공 꽃을 보는 백태를 긁어내고 나비로 변한 꿈을 깨움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돌 속의 온기와 습기에 대해, 이를 보는 자는 많아도 아는 자는 드물다. 이에 현수 법장의 반야심경략소般若心經略䟽와 옥봉 사회의 반야심경략소연주기般若心經略䟽連珠記가 어쩔 수 없이 지어졌다. 우리의 사형인 석실공石室公 명안明眼이 다행히도 약소와 연주기를 구하여 기꺼이 그 약소를 가지고 반야심경을 소통시키고, 연주기를 가지고 약소를 소통시켰으니, 바로 가지로 인해 줄기를 얻고 줄기로 인해 뿌리를 얻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연주기가 별도로 유행하여 보는 자들이 힘들어함을 개탄하였으므로 모아서 편집하였다. 장차 판각, 인쇄하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온 나라에 공개함으로써 심오한 경전의 오묘한 뜻이 활연히 단박에 마음의 눈에 나타나 불법을 경외하는 마음을 열게 할 것이니, 실로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연주기회편서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連珠記會編序」
1719년(숙종 45) 봄에는 마침내 호남과 영남의 여러 사찰에서 거의 3백여 명에 이르는, 남의 사범師範이 되고 이름을 내걸 만한 자들이 대거 이곳에 모여 화엄과 선문에 대해서 강의해 주기를 청했지만, 사양했다. “나 자신이 바르지 못한데 어떻게 남을 바르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양을 하면 할수록 더욱 독실하게 청하였으므로 법좌에 올라 불자拂子를 휘두르며 심오한 뜻을 설파함에 낙락한 원음圓音이 중중무진하게 서로 비치자 강회講會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스님은 그해 10월에 미타삼존상彌陀三尊像을 개금改金하게 하고는 69세에 입적했다. 문하로는 영해 약탄影海若坦과 두륜 청성頭輪淸性 등 모두 22명이 있다. 그 당시 유자儒者로서 스님과 교유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는데, 그중에서도 영상 이광좌李光佐, 대사성 최창대崔昌大, 참판 이진유李眞儒, 교리 임상덕林象德, 최계옹崔季翁, 김창흡金昌翕, 황익재黃益再 등과 친하게 지내었다.
1724년 제자 영해 약탄(影海若坦, 1668~1754)이 스님의 글을 모아 문집을 엮었다.
참선하는 여가에 또 곧잘 게송을 읊고 글을 지은 것들이 허다한데, 그중에서 정요精要한 것만을 약간 간추려서 판각하였다. 선사에게 수업을 받고서 각각 가죽(皮)과 살(肉)과 정수(髓)를 얻어 남의 사범師範이 되거나 암혈에 깊이 숨어 자기 한 몸을 선하게 하는 제자들이 또한 많은데, 그 이름은 여기에 번거롭게 나열하지 않는다. 소승 약탄은 일찍부터 선사의 문지방을 드나들며 자주 귀한 말씀을 듣고 이 도道에 들어올 줄을 안 자이니, 어느 것 하나도 선사께서 귀를 끌어당겨 일러 주시고 손바닥을 가리켜 보여 주신 가르침 아닌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그 은혜는 천지와 같았고, 그 정은 골육보다도 더하였으니, 은정恩情이 그러하다면 비록 금수라도 목숨을 바쳐서 그 덕에 보답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눈물을 훔치고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고 들은 자료를 모아 간행하려 하면서 삼가 이 행장을 쓰는 바이다.
옹정雍正 2년(1724, 영조 원년) 갑진 납월臘月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