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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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밭과 좋은 씨앗의 조건

 


정성운
텃밭농부



반갑지 않은 가을비
농사에서 비는 여러 얼굴로 다가온다. 씨앗을 뿌리는 시기에 내리는 봄비는 농부들을 벙긋 웃게 만든다. 옛사람들은 봄비를 우삼 또는 천삼(雨蔘, 天蔘)이라고 불렀다는데, 오죽 반가웠으면 저런 표현을 생각해냈을까. 봄비는 겨우내 얼었던 흙을 풀리게 한다. 씨앗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대개의 씨앗은 따뜻한 기온 조건에서 수분을 만나면 움을 틔운다. 지렁이를 비롯한 동물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도 활동을 시작한다.
장맛비가 내리면 걱정스럽다. 큰물에 밭이 잠기면 한창 크는 작물들이 죽고 만다. 큰물이 아니어도 습한 날씨가 이어지면 온갖 병이 번지는데, 풋마름병과 탄저병은 고추를 비롯한 여러 작물에 치명적이다. 잦은 비로 흙이 물을 많이 머금고 있으면 수박, 참외, 토마토는 과실이 터지기 일쑤다. 그러니 장마철은 한 해 농사의 풍흉을 가름하는 고비의 시기이다.
가을에 내리는 비는 두 얼굴이다. 배추를 기르는 농부에겐 반갑지만, 콩 농부에겐 걱정을 안겨줄 뿐이다. 지난 10월엔 비가 잦았다. 잠깐 내리는 게 아니라 온종일 내린 비 때문에 밭이 물러졌다. 물러지면 뿌리를 잡는 흙의 힘이 약해진다. 서리태 몇 그루는 비스듬히 누웠다. 옆 그루의 가지에 기대어 그나마 아예 눕지는 않았다. 그냥 놔두는 게 좋다. 세워주다가 자칫 뿌리가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의 태풍도 이겨내고 결실을 향해 가는 시기에 뿌리가 상하면 단단하게 여물지 못한다. 쭉정이가 되는 것도 있다. 지금은 쨍쨍한 햇볕과 물기를 뺀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야 흥겹다.
장마 때나 9월 태풍으로 누운 콩들은 서둘러 세워주어야 한다. 살살 어린애 달래듯 붙잡아 일으켜 지주대에 기대게 해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줄기를 뻗는다. 서리태를 비롯한 콩과식물은 덩굴성이어서 누우면 줄기를 뻗는다. 꼬투리를 만드는데 에너지를 쏟는 시기인데, 이걸 중단하고 줄기를 뻗는 것이다. 새 줄기에서도 꽃을 피우고 꼬투리를 만들지만 기온이 내려가니 여물지 못한다.
콩을 깊이 심으면 넘어짐을 방지할 수 있을까? 뿌리가 깊어지니 효과가 있을 것이다. 비닐 포장을 하지 않았을 때 농부들은 콩밭에 김매기를 하면서 흙을 북돋아 주었다. 더 많은 뿌리를 나오게 해서 지탱하는 힘을 키워준 것이다.


물 빠짐을 좋게 하는 방법
밭의 물 빠짐을 좋게 하는 방법은 여럿 있다. 배수로를 잘 만드는 것이 첫째 처방이다. 물이 도랑으로 흐르도록 하려면 기울기를 맞춰야 한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비 오는 날 밭에 나가 빗물이 고이는 곳을 확인해 물길을 만들어야 한다. 밭이 넓으면 큰 노동력이 들어간다. 밭고랑의 기울기가 도랑을 향하도록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밭이 물러지는 원인은 또 있다. 진흙 성분이 많은 점질토이면 물 빠짐이 나쁘다. 모래를 넣어 사질토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농촌을 지나다보면 덤프트럭으로 흙을 부리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객토를 하는 것이다. 큰 농사를 짓는 이들은 늦가을이나 이른 봄에 객토한다. 큰 작업이다. 텃밭을 가꾸는 이들은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다. 객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낙엽이나 작물의 가지, 왕겨, 볏짚 등 유기물을 넣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낙엽, 왕겨, 볏짚을 넣어주는 일도 쉽지 않다. 이것들을 구한다 해도 옮기는 것이 작은 일이 아니다. 재작년에 낙엽을 담은 자루를 승용차 짐칸에 실어 옮겼는데, 벌레와 부스러기를 치우느라 애를 먹었다.
녹비작물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밭에 풀을 길러 그것을 거름으로 삼는 것인데, 귀리, 호밀, 자운영, 헤어리베치 등이 널리 재배하는 녹비작물이다. 10월 말~11월 중순 사이에 수확을 마친 밭에 녹비작물 씨앗을 뿌린다. 이듬해 날씨가 따뜻해지면 싹이 올라온다. 4, 5월쯤에는 사람의 키 높이 이상으로 자란다. 이걸 베어 두둑 위에 올려놓으면 썩으면서 좋은 거름이 된다. 녹비작물은 5월이 되어 기온이 오르면 자연 고사한다. 뿌리도 썩어 흙에 섞이니 뿌리를 걷어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녹비작물은 뿌리를 깊게 내리므로 흙의 통기성을 좋게 하며, 잡초의 생장도 막아주니 여러 이점이 있다.
농업진흥청은 녹비작물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토양 내 유기물 시용, 토양수분 조절 기능, 토양 개량 및 비옥도 증진, 공중 질소의 생물학적인 고정, 화학비료와 제초제 사용 절감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다.[두과 녹비작물의 재배와 이용] 녹비작물이 토양 내 유해 세균의 활동을 억제해 고추와 토마토 등에 나타나는 풋마름병을 예방하는 효과를 보았다는 농부들의 경험담도 회자되고 있다.
이번 겨울엔 녹비작물을 키울 계획을 세우고 호밀 씨앗 1kg을 주문했다. 호밀이 자란 밭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바람이 불면 너른 호수나 바다에 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초록이 출렁인다. 내년 봄 호밀로 뒤덮일 초록의 밭을 떠올리니 절로 즐겁다.


나의 겨울 농사-마늘
나의 이번 겨울 작물은 마늘이다. 3년 전 마늘을 심어 1년 내내 먹은 적이 있었다. 고춧대와 지주를 뽑아내고 거름을 주었다. 내가 주는 거름은 지난해 만들어두었던 은행 액비와 음식물 액비다. 큰 통에 재료를 넣고 물에 잠기게 두어 삭히면 액비가 된다. 여기에다 농자재센터에서 구입한 석회고토를 뿌려주었다. 우리나라의 토질은 화강암 기반이어서 산성을 띤다고 한다. 대부분의 작물은 산성토양보다 알칼리성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를 중화하기 위해 석회를 넣어주어야 한다. 특히 마늘은 산성을 싫어한다.
농사의 고수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밭 만들기다. 즉 땅을 거름지게 하라는 것이다. ‘거름지다’는 말이 재미있다. 식물을 잘 자라게 주는 것이 거름인데, 거름에서 파생한 형용어다. ‘기름지다’는 말이 표준어다. 사전에서는 영양 상태가 좋아서 식물의 잎이나 줄기가 싱싱하고 윤기가 있다고 풀이한다. 거름을 주어야 흙이 기름지게 된다.
밭 만들기는 농사의 기초를 단단히 다지는 것이다. 집을 짓는 데도 첫 번째는 기초基礎를 놓는 일이다. 자갈을 넣고 지반을 다진 다음 콘크리트로 초석을 짓는다. 이 과정이 반듯하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집은 수평을 잃고 기울어진다. 기초를 잘 놓은 일은 농사와 집짓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세상사가 그렇다. 예외인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다음은 좋은 씨앗을 심는 일이다. 농부들은 자기가 심을 씨앗을 스스로 생산했다. 잘 여문 알곡을 골라 씨앗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도 옛말이 되었다. 종묘상에서 씨앗을 사다 쓰는 일이 많아졌다. 씨앗을 받는 일이 번거롭다는 이유이다. 좋은 씨앗의 첫째 조건은 자기 밭에서 얻은 것이다. 내 밭의 기후와 토양, 농법에 최적화되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난 씨앗이 아무리 좋기로서니 기후와 토양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좋은 씨앗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내가 이번에 심은 씨마늘은 의성과 서산 마늘로 골랐다. 내가 가진 종자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의 마늘 산지는 의성, 창녕, 남해, 군위, 영천, 서산, 단양, 고흥 등지에서 많이 재배한다. 이 가운데 의성과 서산은 씨마늘 산지로도 유명하다. 의성과 서산은 내 텃밭이 있는 인천과 기후와 토양이 다르다. 소출이 적을 수도 있다. 씨알이 작을 수도 있다. 잘 적응할 것인지 지켜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