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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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라, 그리고 고요하라

수덕스님
가평 대원사 템플스테이 관장



우리 인간은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와 종교적 공포시대, 과학적 탐구시대와 아날로그시대를 지나 디지털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다시 바꾼다면 소달구지로부터 제트여객기까지 물질적으로는 발전을 이루며 살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2500년 전 대정각의 위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붓다를 보라.
사람의 마음은 에너지를 가진 인지력으로서 순간순간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자비와 연민과 같은 적극적인 가치로 계발할 수 있다. 이러한 가치는 세상에 기여하도록 이용될 수 있다. 붓다의 마음처럼 완전히 계발된 위대하고 강력한 마음은 주위를 정화시키고 살만한 세상으로 바꾸기까지 한다.
그런 반면 탐욕과 증오, 시기와 악의 같은 부정적인 것으로 전락되고 남용된다면 잠재적인 파괴세력이 된다. 그렇게 인간의 마음은 모든 인류를 유익하게 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반면 말할 수 없는 고통의 근원도 될 수 있음이다.


천재 과학자로 일컬어지는 아인슈타인은 마음이 가진 엄청난 위력을 설명하면서 ‘과학은 원자를 분열시킬 수 있으나 마음을 조절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력은 원자력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다. 이 강력한 힘을 선용하고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붓다와 같은 성인이 오래 전에 계발한 마음 수련법인 명상의 이용이다.
불교는 마음의 작용과 기능, 계발 방법을 분석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그것은 마음의 수행에 관한 적절한 지도를 받으면 마음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어떻게 유익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대가 인생의 끝 쯤 어디에 서서 생각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 ‘아차’하고 알아차리지 말라.
이미 때가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생각하면 몇 장의 사진으로 그대의 인생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짧다. 단지 며칠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한 사실대로 말하자면 단 몇 순간조차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며칠뿐이 아닌 우리내 인생에서 지혜와 자비심을 발휘하고 베풀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대가 행복하려면 이 사실을 잊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결국 그 사람도 불행하며,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면 결국 그 자신도 행복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두가 업이 가져다주는 진실이다.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제 그만 멈추어 서서 그대를 바라보라.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말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걸어왔으니 그대는 그렇게 갈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멈추어 바로 보라. 그것이 팔정도의 정견(正見)이다.
그대 존재의 심연에 있는 자아는 고요함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대의 이름이나 겉의 형상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 존재하는 그대의 실체가 거기에 있다.
그대가 모든 것을 멈추고 고요해질 때 그대가 바로 거기에 있음을 볼 것이다.


그러니 그대여 그저 보고 들어라.
그 이상은 필요 없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고요하다는 말은 유가(儒家)의 고전인 예기(禮記)에서도 말했을 뿐 아니라 회남자(淮南子)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본성은 고요함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고요하니 이것이 자연적인 본성이다.
외물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 그 고요함이 흔들리는 것이니 흔들리면 인간의 본성을 해치는 것이다.
불교의 참선수행에서도 마음의 고요함 즉 청정심을 지키려고 수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본성은 고요함으로 유교나 불교를 막론하고 고대 동양인의 사유를 지배하는 보편적 생각임을 알 수 있다.


회남자에서는 인간본성의 이런 선천적인 고요함을 물에 비유했다.
“물의 본성은 본디 맑지만 진흙이 이를 흐리며 인간의 본성은 본디 안정되고 고요하지만 탐욕이 이를 어지럽힌다.”


생명의 고요한 본성을 흩뜨리는 요인은 희로애락에 얽힌 감정의 변화이다.
격렬한 분노와 슬픔은 몸 안의 기의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에 급격한 감정의 변화는 양생에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
지나치게 기뻐하는 것도 건강을 해친다하였으니 너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고요한 가운데 그저 바라보라. 고요함의 상태를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즐거움도 화냄이나 근심함과 별 차이가 없음이다. 그러니 그저 보고 들으라.
욕심을 없앰으로써 정신을 고요하게 하면 천하가 저절로 바르게 된다는 노자의 말은 또 어떠한가?


우리는 잠재의식에 통제되고 있다. 그것을 넘어서라.
그러기 위해선 마음의 속도를 늦추고 고요함을 맞이하며 계획된 사고를 하여야 한다. 마음을 늦춘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단위시간 당 “마음을 가로지르는 생각의 수”를 줄인다는 것이다. 마음의 속도는 부정적인 감정과 스트레스에 빠졌을 때 높아지나니 마음의 속도가 높거나 마음속이 엄청난 양의 생각들로 분주하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약하고 제어되지 않은 마음의 징표이다. 마음은 본래 찬란히 빛나는 것이건만 오관과 더렵혀진 정신작용을 통해 들어온 외부대상이 이를 오염시키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마음이 움직이는 속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마음처럼 빨리 움직이는 어떠한 현상도 나는 알지 못한다. 마음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적절한 비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인간의 마음은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다. 경험과 사색을 통해 풍요로워져야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마음이 얻는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소중한 보물이다.


명상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평온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보통사람들에게 이 평온은 매일 일어나는 수천가지 생각에 묻혀있다. 그러니 멈추어서 그대를 바라보고 명상을 통해서 빛나는 보물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대여 그저 보고 듣고 알아차리라.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까지 자기의 생각과 감각을 놓친다는 것은 알아차림의 상실이다. 생각의 문지기가 문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까닭이다. 그대가 그대 몸을 통치하는 왕이라면 마땅히 체계를 바로 세워야할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느끼고 싶어 하는지 귀를 기울여라.


내면에 있는 느낌에 충실하게 따르면, 그대가 되고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어떠한 방법이나, 가르침 혹은 어떤 실체도 염두에 두지마라. 지금 얻는 느낌이 그대의 중요한 전부이다.


그대여 고요하라
그리고 바라보라
그대여 행복하라.


그것이 우주의 전 존재가 그대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것이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