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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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오묘하고 위대하다

 



정성운
텃밭농부



씨앗의 자기보호 장치


겨울로 접어드니 텃밭에 나가는 일이 뜸해졌다. 서리태 터는 일만 남았다. 한 해를 돌아보니, 날씨와 병충해와 잡초 때문에 노심초사했지만, 작황은 그런대로 괜찮다. 텃밭 농사는 하늘이 내려준 만큼 거두어 먹는 것이니 늘 풍년이다. 올 한해도 나는 텃밭에서 즐거움을 누렸다.
내년에 심을 작물의 씨앗도 받아두었으니 든든하다. 씨앗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다. 입김에도 훅 날아갈 정도의 작은 씨앗이 움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가지를 뻗으면 자기 몸의 수만 배 이상의 몸집을 갖게 된다. 열매를 맺으면 수백 수천 배의 씨앗을 돌려준다. 씨앗에 어떤 힘이 내장되어 있기에 저리 큰 풍채를 이루는 것일까.
씨앗에는 해당 식물의 한 살이를 이끄는 정교한 메커니즘이 장착돼 있다. 외부환경에 대응해 자기보존을 하기 위함이다. 대개의 씨앗은 흙빛이거나 어두운 색을 띄는데, 이는 동물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또 바짝 말라 있어 곰팡이로부터 안전하다. 겉껍질, 속껍질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잎채소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물 씨앗을 식량과 기름으로 이용한다. 씨앗은 인간을 먹여 살리는 고마운 존재다.
씨앗이 과실을 맺기까지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몇 가지 활동, 즉 휴면기간, 타감작용 등을 살펴보면, 참으로 놀랍다. 경이로운 세계다. “씨앗은 힘이 세다”는 표현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씨앗은 타감(他感, allelopathy) 활동을 한다. 밭에는 수많은 잡초의 씨앗이 있는데, 이 속에서 잡초를 이겨내고 싹을 틔워내려면 특별한 활동을 해야 한다. 특유의 화학물질을 뿜어내 다른 씨앗의 활동을 방해하면서 자기의 영역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물질은 또 동물에게 먹히는 것을 방지하는 작용도 한다. 소나무와 잣나무 아래에는 다른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 소나무 아래서는 진달래와 키 작은 초본식물 외에는 잘 살지 못하는데, 갈로탄닌이라는 물질을 뿌리에서 분비해 다른 식물들의 생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식물마다 고유한 타감물질이 있다는 것에 착안해 유기농에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고추와 대파를 섞어짓기하는 것이 널리 알려졌는데, 파에서 내뿜는 물질이 고추의 생장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고추는 캡사이신(capsaicine), 후추는 피페린(piperine)이라는 물질 때문에 매운맛을 낸다. 매운맛을 내는 이 물질을 사용해 해충을 쫓는 방법도 있다.


씨앗도 잠을 잔다


휴면기간은 말 그대로 잠을 자는 것이다. 가을에 떨어진 씨앗에 휴면기간이 없다면 싹이 튼 후 겨울의 추위에 얼어 죽고 만다. 이를 막기 위해 휴면기간을 둔다. 이 기간을 지나 따뜻해지는 봄날에야 싹을 틔운다. 기온에 대응하는 생존 방법이다. 휴면기간은 식물마다 차이가 있는데, 상추는 휴면기간이 짧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며칠 지나지 않아 싹이 나온다. 가을에 수확하는 대개의 작물은 석 달 정도의 휴면기간을 갖는다. 추운 겨울에 싹 트는 것을 스스로 막는 것이다.
비닐하우스 같은 보온시설을 지어 겨울철에도 농사를 하려면 휴면기간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휴면기간을 단축시키거나 이 기간을 아예 없애는 방법을 쓴다. 이를 휴면타파 또는 춘화처리라고 한다. 휴면타파의 대표적이고 쉬운 방법은,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이다. 이때 젖은 수건을 감싸 씨앗에 수분을 공급하는 경우도 있다. 식물마다 처리 기간이 다르다. 더덕의 경우 1주일정도다. 사과의 경우는 섭씨 7도에서 씨앗을 40~60일 동안 두어야 발아한다.
식물에 따라서는 밝은 곳에서는 싹을 틔우지 않는 것도 있다. 이런 식물을 암발아 식물이라고 하며, 씨를 뿌린 후 빛을 가려주는 천을 씌워야 한다. 반대의 경우는 광발아 식물이다. 상록 열대우림의 어떤 나무의 씨앗은 부근의 나무가 쓰러져 빛을 차단하면 그때에야 발아를 시작한다.
한날한시에 뿌린 씨앗일지라도 움트는 시기가 모두 다르다. 씨앗의 상태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이는 종 보존을 위한 식물들의 고도의 테크닉이다. 싹을 내놓은 후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거나, 새 같은 동물에게 먹힐 수 있다. 그러면 낭패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씨앗을 남겨두어 2, 3차 움트기를 한다는 것이다. 씨앗들끼리 긴밀하게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씨앗은 불에 그슬려야 발아를 한다. 미국 남서부와 지중해성 기후 지역에 사는 떡갈나무가 그렇다고 한다.[이유, 식물의 죽살이] 산불이 나서 불모의 땅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린 후 싹이 돋아나 새로운 생태계를 이루는 것은 씨앗마다의 이런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연 씨앗은 껍질이 유난히 단단하다. 껍질을 깨주어 수분의 침투가 쉽도록 해주어야 발아한다. 


금보다 비싼 씨앗


씨앗은 대대로 농부들에 의해 보존, 개량되어 왔다. 처마 밑에 걸어놓은 옥수수와 수수는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 중의 하나였으나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금은 종자회사에서 채집한 씨앗을 사다가 파종한다. 우리나라의 1~4위의 홍농종묘, 중앙종묘, 서울종묘, 청원종묘는 모두 외국계 다국적기업에 넘어갔다. 종자주권의 상실이라는 한탄이 나오는 이유다. 종묘회사들은 씨앗을 상품화했다. 큰돈을 치러야 한다. 샐러드에 많이 쓰이는 파프리카 씨앗 한 알의 가격이 500~1000원인 때가 있었다.(지금도 비싸다) 네덜란드의 종묘회사가 개량한 것인데, 1g에 6~12만원으로 금보다 비싼 가격이다. 특히 어떤 종자회사의 씨앗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그 회사에서 만든 농약을 써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해당 농약에 적응하도록 개량했기 때문이다.
씨앗은 맺히는 모양도 여러 가지다. 상추, 배추, 무 등은 꽃의 암술과 수술이 만나 맺은 결정체로서 씨앗을 맺는다. 토마토와 가지 같은 경우는 과실 속에 씨앗을 남긴다. 쪽파는 씨앗이 아닌 종구種球를 이용해 번식시킨다. 종구는 뿌리 위에 둥글게 형성한 영양체인데, 이를 잘 말린 후 심는다.


3년 걸리는 새 씨마늘


마늘도 종구로 번식하는데, 지난 10월 말 마늘을 심으면서 주아 1kg도 함께 심었다. 마늘 종구(종자)를 얻기 위함이다. 마늘은 대개 수확한 마늘 중 튼실한 것을 골라 심는데, 같은 종자를 계속 심으면 수확량이 줄어든다. 바이러스 감염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자가 퇴화하는 것이 원인이다. 그래서 새 종자를 만들어야 한다. 마늘의 종구를 만드는 일은 특이하다. 오랜 기간이 걸리는 일이다.
마늘도 씨가 있는데, 마늘종 꼭대기에 둥글게 맺히는 것이 씨앗이다. 이 안에는 20~30개의 씨가 있는데, 마늘의 모양을 하고 있고 크기는 2~3mm로 아주 작다. 이것을 가을에 심으면 이듬해 6월께 1cm 크기의 동그란 알이 한 개 맺힌다. 이것이 주아珠芽다. 다시 주아를 심으면 이듬해에 4~6쪽의 마늘이 된다. 비로소 새 씨마늘이 탄생하는 것이다. 3년이 걸린다. 내 밭에 완전히 적응한 씨마늘이니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내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배추와 무의 씨앗은 월동을 시킨 후인 4~5월 즈음에 채취한다. 배추와 무 중 튼실한 몇 개를 밭에 그냥 남겨둔다. 겨우내 싹이 말라 죽은 것 같았는데, 봄이 되어 기온이 오르면 새 싹이 올라오고, 조금 지나면 꽃대를 올려 씨앗을 맺는다.
조금 있으면 동지冬至를 맞이한다. 이 날을 지나면 밤은 짧아지고 낮이 더 길어지니 축일로 여겼다. 왕조시대에는 이날 새해의 달력을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 풍속이 지금은 절에서 이어지고 있다. 어디쯤에서는 봄이 움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