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원한다. 요즘은 더구나 모두가 행복을 좇는다. 바야흐로 행복열풍시대다.
그런데 몇 년 전 그 행복열풍을 주도하던 행복전도사가 남편과 함께 모텔에서 자살해 큰 충격을 주었다. 국민들의 가장 사랑 받던 여자 탤런트도 자살을 해 가족들의 연쇄 자살로 이어졌고, 국내 굴지 그룹의 총수가 빌딩에서 떨어져 자살하고, 한국 최대 재벌 회장의 딸이 외국에서 자살했다. 또한 전직 대통령까지 자살을 해 충격을 더했다.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인기와 권력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그들이 가졌던 것을 갖기 위해 정신없이 달리고 있다. 그런데 남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이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해 생을 마감할 때, 사람들도 길을 잃는다. 그리고 묻는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돈과 인기와 지위와 권력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과연 무엇이 행복을 결정한다는 말인가라고.
이런 연구를 무려 70여 년 간 해온 사람이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대 교수인 조지 베일런트다. 저자는 하버드대학교 2학년생 268명과 서민 남성 456명, 여성 천재 90명 등을 수십 년 간 관찰해 《행복의 조건》이란 책을 펴냈다.
그는 1934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대공황 시기에도 부유한 생활은 계속되었으며, 부모님은 이상적이고 낭만적이었다. 베일런트의 아버지는 고고학자 조지 C.베일런트다. 아버지는 현장을 누비는 고고학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뉴욕 자연사박물관장으로 자리를 잡아 사회적 명망을 얻으며 성공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조지 베일런트가 열 살 되던 해 44세의 나이로 갑자기 권총 자살을 해 충격을 던져주었다.
베일런트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 보다는 ‘그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결국 삶의 황혼기까지 행복해지는 행복의 7가지 조건을 간추렸다. 성숙한 방어기제와 교육, 안정된 결혼생활, 금연, 금주, 운동, 알맞은 체중이었다. 이 가운데 1번이 바로 고통에 대응하는 성숙한 방어기제였다. 그래서 그가 삶의 핵심적 열쇠로 제시한 것이 이것이다.
‘인생의 고통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삶은 무상하기에 건강할 때가 있으면 아플 때도 있고, 행운이 있으면 불운도 있게 마련이다. 궂은 일 없이 평생 햇볕만 내려쬐는 일은 현실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1년 사시사철 햇볕만 내려쬐는 것이 최상이란 법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곳은 사막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궂은 날과 맑은 날을 거쳐 가면서 바람과 눈비를 맞아가며 나무는 더 깊게 뿌리를 내리고 강해진다. 그래서 점차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 고통을 견딜 힘이 없어, 자신의 삶에도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것으로 치부하며 양지를 좇는다. 그렇게 무지개를 좇아 평생을 허덕이며 달린다. 그런 갈애 속에서는 여유와 자족이 스미기 어렵다.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자기 속에만 빠져 있으면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보다 자신의 작은 고통을 더 극심한 아픔으로 여기기 마련이다.
현실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다.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왔고, 지금도 고통 받고 있다.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현생에도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보는 것이 성숙이다. 오직 내 고통, 내 속에만 빠져 있는 것이 미숙이다. 그런 미숙함이 신을 만들고 신화와 영웅과 스타와 교주를 필요로 한다.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이나 몰핀처럼 달콤한 것이다. 꿀과 치즈의 달콤한 유혹을 이기지 못한 쥐가 쥐덫에 갇히고 마는 것처럼 그런 달콤함의 갈애를 이겨낼 힘을 갖지 못할 때 인간의 고통은 갈수록 가중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달콤함이 주는 행복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힐링 열풍이 말해주듯이 현대인들은 상처에 의해, 일단의 고통에 의해 전 일생을 지배당한다. 그 노이로제와 상처가 동굴 밖으로 나가는 통로를 막는 바윗돌이다.
삶은 궂은 날과 맑은 날이 반복되는 날씨와 같다. 누구나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친다. 삶의 파고는 크든 적든 경험하게 되어 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지 않아도, 변화무쌍한 삶에서 궂은 일과 좋은 일이 있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것이 삶의 본질이다. 여기서 벗어나 온전한 양지만을 추구하고, 온전한 행복, 온전한 평화에 대한 추구가 삶을 더 온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진정한 명상은 평화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로움과 불안, 맑음과 궂음, 명징과 번뇌, 기쁨과 슬픔, 행운과 불행, 장애와 건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완전히 수용하는 것이 진정한 자애이자 사랑이다. 명상은 삶의 파고와 함께 동반하는 능력이다.
행복은 완전한 평화나 기쁨이나 자유로 이야기 된다. 그러나 그것이 큰 오해를 불러온다. 인간은 생각, 혹은 마음을 가진 존재다. 바위나 탁자, 장난감과는 다르다.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큰 느낌이든 작은 느낌이든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뇌를 통해 끊임없이 반응하며 일어나고 사라진다. 이를 일시적으로 초월하는 절정 체험은 명상에서 아주 소중한 단계다. 그러나 그 체험조차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그 또한 무상하다. 따라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과 하나가 되어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이를 바라보고 수용하고 자비의 물을 줄 수 있는 자가 될 때 그는 생각과 감정에 결박되지 않는다. 따라서 번뇌와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부자유스런 상태가 아니며 자연스런 상태다. 그러므로 번뇌와 감정이 우리를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를 거부하고 부인할 때 우리는 구속되며, 이를 바라보고 놓아주고 수용할 때 자유롭게 된다.
그렇기에 잠시의 기쁨을 얻기 위해 쥐는 쥐약을 먹고, 달콤한 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해 덫에 결박되고 말지만 그것의 고통을 아는 이들은 잠시의 단맛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잠시가 아니고 그 기간이 좀 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성공과 외모, 멋진 차나 집, 직위와 자신을 동일시했을 때, 그것이 사라지면 그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생각과 감정이 자신이 아니듯이 그것들 또한 자신은 아니다. 그것에 결박되기보다는 그것을 누리면서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대범함과 자유를 지닐 때 그가 강해질 수 있다.
나도 삶의 장애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목숨을 버리려던 젊은 날이 있었다. 이를 극복한 것은 장애가 사라진 때문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장애를 내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자신의 장애를 혐오할 때는 어떤 외적인 상처도 이겨내기 어려워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것이라는 것을 내가 품어 안았을 때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없었다.
삶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것은 관계 맺기다. 특히 자신의 내적인 상처와 아픔과 장애와 문제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가 결정적이다. 그것을 증오할 때 그것도 끝내 복수심을 거두지 않고 삶을 괴롭힌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그것은 온전히 나의 우군이 되고, 나의 에너지가 되어 생채기에서 진주가 태어나게 된다.
사람들은 삶의 장애가 없는 행운만을 좇으며, 장애를 거부하지만, 〈보왕삼매론〉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숙해지고 강해짐으로 삶의 파고에 휩쓸리지 않는 법을 전한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 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고난이 없기를 바라지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교만하고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 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