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중심에서 -
한성열(탄탄) /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Ⅰ. 서언
불교사에서 큰 획을 그은 인물을 보조 지눌(普照 知訥)이라고 하는데 있어서 반론의 여지는 없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 온 이후 불교 사상의 전반을 총 정리한 인물이 신라의 원효라면 이를 바탕으로 불교 사상이 화려하고 찬란하게 꽃피운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이 시기에 고려불교 선교일치(禪敎一致)의 통불교 면모를 정리한 인물이 보조 지눌이며 교학적으로 대단한 성과를 거둔 삼국시대의 불교를 더욱 풍요롭게 하여 불교를 우리 역사에서 뿌리 내리게 한 그의 업적은 매우 광범위하다. 그의 시대적 환경은 매우 불우했지만, 그가 있었기에 불교의 뿌리가 탄탄하게 제대로 자리 잡은 것이기에 그를 연구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근본을 고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Ⅱ. 화엄사상에 대하여
불교를 총체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의 종교이다.
이는 재가불자 또는 출가 수행자 이든 궁극적인 목표는 깨달음이고 깨우침이다.
그러하다면 깨닫고 깨우치는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대승불교에서는 선불교에 의하여 그러한 깨달음과 깨우침을 지향한다. 그러하기에 선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선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즉 자신이 본래의 부처임을 아는 것이라고 고승대덕은 말한다.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진정한 깨달은 이는 누구일까? 역사적 부처님이신 고타마 싯다르타 이외 우리는 누구를 깨달은 부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깨닫는 공부를 함에 있어서 중요한 가르침인 『육조단경』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신수 대사와 혜능 선사의 게송인데, 둘 중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말하기는 이르지만, 여기서 돈수에 대한 논의를 더욱 조성해 보자.
5조 홍인스님은 신수와 혜능의 스승이다.
홍인은 제자들의 그릇을 보고자 각자 보리심의 반야 성품을 담은 게송을 지어 보라는 과제를 준다.
이에 신수는,
身是菩提樹 / 신시보리수
心如明鏡臺 / 심여명경대
時時勤拂拭 / 시시근불식
勿使惹塵埃 / 물사야진애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면과 같구나
부지런히 털고 털어서
속진이 묻지 않게 할 지어다
혜능은,
菩提本無樹 / 보리본무수
明鏡亦非臺 / 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 / 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 / 하처야진애
보리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면이 아니어서
원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에 속진이 묻겠는가?
『육조 단경』의 편집자 하택 신회(668~760)가 남종선(南宗禪)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 두 수의 게송을 대비시켰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두 게송은 우열을 가를 수는 없다. 그것은 주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신수는 돈수를 노래했고 혜능은 점수를 논하였다면 오류가 아닐는지, 신수는 ‘선’수행을 노래하고 혜능은 ‘반야’ 지혜를 논하였다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양자를 비교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범주의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하는 것이다. 선종은 경전의 권위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깨달음의 객관적 표준도 인정하지 않는 풍토가 있다. 원칙적으로 깨달음에는 일정한 표준이 없기 때문에 성불을 어떻게 ‘입증하느냐’ 하는 것이 선종이 지닌 내재적인 모순이다. 그러하기에 명안 종사(明眼 宗師)에 대한 인가(印可)가 강조되기도 하며,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삼관을 돌파해야함이 강조되기도 한다. 진정한 깨달음에 이른 명안종사가 출현해야 간화선은 진정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고 명안종사가 부재하는 경우 간화선의 권유는 무지(無知)와 사견(邪見) 광선(狂禪)에 빠지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기에 선종이 흥행하게 되면서 선사들의 주관적인 깨달음에 의존하기보다 교종에서의 불경과 같은 객관적인 권위를 요구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근대 서양철학의 신(神)에 대한 절대적 권위, 즉 도그마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선(禪)에 대한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대중 불교화를 추구하려면 수행체계, 교리체계의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이는 불경의 권위와 언어를 부정하기조차 했던 선(禪)이 다시 언어(言語)와 논리(論理)에 의하여 체계화된 객관적인 간화선을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조사어록 조차 언어와 개념으로 구축된 이상 그 권위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 간화선의 내재적인 논리인데,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러하기에 화엄을 부정하던 간화선이 이제 화엄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화엄의 가르침은 불교의 어느 종파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장엄함과 현학적인 깊이를 지니고 있다. 화엄경을 보면 불성의 심원한 신비와 무한한 부처의 세계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최상의 가르침이요 최고의 통찰과 사상의 극치가 바로 화엄경이다. 그러기에 화엄은 꽃으로 둘러싸인 화환이란 원래의 의미는 대승경전의 이름 속에서 이원성을 초월한 최상의 깨달음으로 승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세계들의 완전한 융성과 몰입이 일어나고 시간마저 그 의미를 상실하고 하나가 전체 속에 전체가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해탈의 세계이고 상호 융성하는 세계이고 시공을 초월한 세계이다.
이것이 화엄세계이다
용수(Nagarjuna)는 말한다.
‘공하므로 모든 사물은 발생한다. 공하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서로를 포용하면서도 걸림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하여 일어 날 수가 있다.’
하나의 먼지 속에 우주가 담겨 있고 순간은 전우주의 역사이며 미시의 먼지는 작은 세계를 담고 거대하게 무한히 뻗어 있으며 시간은 화살의 의미를 상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로 녹아 있는 시공의 무한 법계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발문>
불교가 이 땅에 들어 온 이후 불교 사상의 전반을 총 정리한 인물이 신라의 원효라면 이를 바탕으로 불교 사상이 화려하고 찬란하게 꽃피운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이 시기에 고려불교 선교일치(禪敎一致)의 통불교 면모를 정리한 인물이 보조 지눌이며 교학적으로 대단한 성과를 거둔 삼국시대의 불교를 더욱 풍요롭게 하여 불교를 우리 역사에서 뿌리 내리게 한 그의 업적은 매우 광범위하다.
<사진설명>
송광사 국사전에 모셔져있는 보조국사 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