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필
한국일보기자
“사는 거 재미없어, 형.”
“원래 그렇대, 사는 게.”
“그럼 왜들 산대?”
“재미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게 재미있나 봐.”
“뭐야, 그게. (큭큭)”
“(킥킥) 거봐, 재미있잖아.”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가볍지 않은 화제話題와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가령 직장 동료들과 저녁을 먹고 습관처럼 갖는 술자리 같은 데서 나누게 되는 저런 대화가 그렇습니다. 살아보니 별 것 없더라는 식의 진부한 ‘삶의 지혜’를 위안이랍시고 주고받고, 나잇값 해본답시고 주워들은 그럴싸한 말들을 건네보기도 하지만, 파장 무렵이면 말을 꺼낸 이나 대꾸한 이나 풀 죽기는 마찬가지. 처진 어깨들을 툭툭 치면서 히죽 웃어 보이는 표정으로만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그런 하루하루. 비단 제 주변 사람들의 일상만은 아닐 듯합니다.
그런 날이면 어쩔 수 없이, 산다는 게 참 진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재미있고 없고를 떠나, 흔히들 말하듯 잘 나가든 못 나가든, 다 고만고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겁니다.
누구를 만나든 나누게 되는 이야기가 대동소이합니다. 우선 건강 이야기가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별 뾰족한 내용도 없고 질릴 때도 됐지만 또 다들 귀를 기울입니다. 누가 어디가 아프다더라, 어디가 용하고 뭐가 좋다더라, 뭐니뭐니 해도 운동이 제일이다…, 그러다 보면 또 무슨 운동이 최고다, 걷는 것 만한 게 없다, 국선도라고 들어봤냐, 호흡이 가장 중요한데….
일찍 결혼한 친구들끼리는 자녀 대학입시가 뜨거운 화제가 되기도 합니다. 누구 아이는 이번에…, 걔는 수시모집에 벌써…, 누군 행복하겠고, 누군 힘들겠고, 또 누구 아이는 내년에 수능 치르는데 벌써 어쩌구 저쩌구…,  그러다 보면 사교육비 이야기 등록금 이야기… 슬금슬금 경제문제로 넘어갑니다. 서로가 조금씩 아는 주변의 이름들이 거론되고 그들의 조직 내 위상과 전망이 시기와 부러움과 연민과 두려움 등등의 감정 속에 버무려져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러다 또 ‘요즘 넌 어떠냐’, ‘네 회사는 어때’ 식의 불편한 관심들이 예사롭게 쏟아지기도 합니다.
가정사나 중장년의 성性이 화제가 되기도 합니다만, 그 역시 하나마나 하고 들으나마나 한 내용일 때가 많습니다. 요 사이엔 물론 어떤 자리에서건, 정치 이야기, 즉 각자의 대선 전망과 논평도 빠지지 않는 메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래저래 삶이란 진부하다는 생각, 언제나 새롭지 못했고, 또 언제 건 새로울 게 있겠냐는 생각이 하릴없이 드는 겁니다.
일상의 진부함이란 어쩌면 우리의 관심사라는 게 너나없이 뻔한 탓인지 모릅니다. 모두가 바라는 세속적 관심과 욕망 속에서, 조금 앞서거나 뒤쳐지거나 하는 작은 차이를 통해 잠깐 행복하거나 울적해졌다가 되돌아오는 나날들. 쉽게 ‘다람쥐 쳇바퀴’같은 인생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 우리가 겪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때로는 우리의 일상 전체를 뒤집어놓을 만큼 격렬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격렬함 역시도 시일이 흐르거나 또 작은 반전에 금세 무마되면서 진부한 삶의 한 단면을 채울 뿐이지만 말입니다.
종교적 이상향을 꿈꾸며 일상을 관념적으로 초월하거나, 문화적 허구 속에 제 영혼을 젖게 만드는 식의 도피가 아니라, 진부한 일상 속에서 진부함의 덫을 빠져 나오는 방법에 대한 각자의 고민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 선배 가운데 한 분은 ‘낯선 곳에 다가서기’를 권하곤 합니다. 이슬람 사원처럼 비교적 생소한 종교시설을 찾아가 예배에 참석해본다든가, 핑계거리를 만들어 가까운 구둣방이나 철공소에 가서 가게를 둘러보고 주인아저씨와 얘기를 나눈다거나, 대학 학생회관이나 구내식당 같은 곳에 앉아 두어 시간 동안 학생들의 일상적인 잡담을 엿듣거나 벽보를 읽는다는 겁니다. 평소에는 거의 생각하지 않던 상황과 대면하는 이를테면 정신적 여행인 셈인데, 그럼으로써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가능하다면 어떤 작은 공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자극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최근에는 서울 도심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농성이라는 게 대개는 외로운 이들의 싸움입니다. 그 분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최대한 많은 시민에게 알리고, 동조자를 만나기를 갈망합니다.
잠깐 주고받는 대화로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처지나 주장의 대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인물을 읽고, 또 집에 와서 그간에 보도된 내용들을 보충해서 읽다 보면 평소 나와 무관한 일이라 여겼던 그들의 문제가 새삼 관심의 자장 안으로 들어오기도 합니다. 대개 그런 시사적인 현안들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과 맥이 닿아 있기 마련입니다. 그 작은 끈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이 체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신문에서 찾아 읽을 뉴스를 또 하나 만든 셈입니다.
하지만 그 선배는 그런 사연 못지않게 자신이 보고 온 공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보도블록 위에 스티로폼 한 장 깔고 농성을 하더군. 겉에 비닐을 두르긴 했지만 잠깐 머무는 동안에도 추웠어. 그런데 거기서 잠도 잔다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추위에 그렇게 길바닥에 나서는 것 외에는 달리 어찌해 볼 길이 없는 그들의 처지 자체를 그는 연민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과 따뜻한 집, 고만고만하지만 어쨌건 마음 편히 앉을 수 있는 식탁과 사무실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과 감사, 그리고 잘 모르고 지냈던 이웃의 상처에 대한 이해와 공감…. 지난 가을에 사서 딱 한 번 써봤다는 거위털 침낭을 그 농성장에 전해주기로 했다며 겸연쩍게 웃는 선배의 얼굴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일상을 낯설게 한다는 것은 삶의 무게중심을 살짝 흔드는 일일지 모릅니다. 그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삶의 중심을 잡고 흔들림 없이 사는 이들도 존경할 만하지만, 굳건한 무게중심을 흔들어 조금씩 기우뚱거리며 나아가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히려 중심의 복원력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좌우로 흔들며(어쩌면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이, 속도는 좀 더디더라도 훨씬 인간적인 삶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세상과의 접촉 면적이 넓어질수록 삶의 저변도 넓어질 테고, 진부한 일상에서 오는 무기력한 피로감을 이길 수 있는 면역력도 커질 듯했습니다. 
실존의 세계 안에서 타인은 극복할 수 없는 벽 너머의 존재라고 합니다.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라는 게 불가능한 꿈이라면 우리 모두는 각자 하나의 섬일 뿐, 그 이상을 바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일지 모릅니다. 꼭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타자가 지옥’이라는 한 실존주의 철학자의 말도 그 의미의 바닥에는 저 스산한 인식이 깔려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실존 너머의 전망 없이 살아낼 수 없는 공간인 것도 사실인 듯합니다. 종교적 이상주의는 사회적 이념으로 확산될 경우 극단주의나 원리주의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써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문제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섬처럼 떨어져 있는 마음들을 느슨하게나마 묶어 덜 외롭도록 해주는 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낯선 곳에 다가서고 삶의 중심을 흔들어보는 작은 모험들이 그 끈을 잇는 작은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무료함 때문에 모험을 시도하든, 세상과의 작은 연대를 위해 모험을 감행하든, 동기의 이기성 이타성을 떠나, 뭐가 먼저든 결과는 한 가지일 것입니다. ‘나’의 활기, ‘나’의 행복, 타인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는 ‘나’의 작은 능력들이 모여, 사회의 활기, 세상의 행복,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가꿔지는 것일 테니까요.
권태롭다면, 사는 게 의미 없이 느껴진다면 잠깐이라도 길을 나서보기. 그런 뒤에 낯선 자리에 자신을 두고 삶의 중심을 흔들어보기. 그 작은 시도가 뜻밖의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