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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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260자에 담긴 삼라만상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아’는, 일체는 무자성임을 함축한 단어이다.
지혜란 면밀하게 분석하여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광대한 법은 근기에 따른 차제를 따른다.
스승에게서 듣고 배운 바를 체득하여 수행한다.
반야의 공은 이러한 모두를 통한 결론이자 세상의 섭리이다.
                          - 14대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 수행론』 중에서 -


한국인 불자의 권청으로 인도 다람살라에서 지난 20여 년 동안 개최된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6)의 법회가 장기적인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지난 1년간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2020년도 한해는 한국인 불자를 위한 공식적인 법회가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새해가 되어서야 비대면 법회를 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1월 5일부터 7일까지 3일간, 반야심경을 주제로 하여 랜선을 통해 50명의 불자와 달라이라마의 만남이 진행된 것이다. 이날의 법문은 한국어 영어 중국어 베트남어 등으로 통역 되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었다.


“공하므로 존재하는 것, 오온조차도 그 자성 없음을 보라”


존재하는 것의 본질은 어떠한가요? 본래 자성이 없음을 얼마만큼 바르게 알고 있는지요?
반야심경은 세상에 일어나는 현상의 본질에 관해 묻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없음을 일깨웁니다. 이러한 다양한 모습이 본래 고정되어 불변하지 않기에 공하다고 합니다.
양자역학에서는 형태와 색을 비롯한 법이 마치 대상으로부터 실제 하는 것과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내가 보는 대로 보이고 내가 인식하는 대로 사유가 됨을 과학적인 근거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분석을 통해 아무것도 고정된 바가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대상으로부터 존재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바가 없다는 중관 논리와 존재함이 없는 일체유심조의 유식 논리가 현대물리학과 긴밀한 논의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집착으로 인해 왜곡된 분별과 망상을 일으킵니다. 용수보살께서는 일체가 상호 의존하여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오고 감도 없듯이 상호 의존하지 않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선업과 악업을 짓게 만드는 혼란은 탐내고 성내며 어리석음에서 기인합니다. 대상에 대해 무언가 실제 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보이는 그 색과 같이 그 모양 그대로 반드시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 존재함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고집할 일이 없습니다. 존재에 대한 집착은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번뇌는 원인과 조건의 상호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대상으로부터 생겨난다고 고집하여 생각하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이러한 논리를 펼치게 된 것입니다. 고정되어 있어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욕심을 내고 원하는 바대로 되지 않았을 때 분노의 감정을 일으킵니다. 궁극적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별 망상을 제거하는 데 필요로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생명 지닌 모든 중생은 행복을 원하지만 시기와 질투의 감정을 일으켜 심지어 살생을 저지릅니다. 어찌 보면 인간은 현상하는 모든 문제를 일으킨 원인의 제공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마음에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공성의 지혜는 고집하는 본연의 집착을 점차 줄여 가도록 돕습니다. 발심이란 중생을 위해서 이타심을 일으켜 이타행을 하는 것입니다. 차제를 두루 수습하여 바라밀 수행을 통해 반야부와 중관을 수학하고 붓다의 길로 향하는 것입니다. 중론에 담긴 공성의 뜻을 헤아려 현관장엄론에 이르러서는 반야를 깨우치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합니다.


미묘현현한 법수 삼매에 드신 부처님을 떠올려 봅니다. 인도 왕사성 영축산 지금의 라즈기르에서 붓다께서 중전법륜에 임하셨습니다. 무자성의 논리 반야법은 그렇게 공포되었습니다. 반야심경은 천신으로 화현하신 관세음보살과 업이 정화된 장로 사리불의 문답입니다.
미묘란 공성이요 현현은 대상을 의미합니다. 공성의 삼매에서 중생의 근기를 헤아린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온조차도 그 자성이 공함을 본 것입니다. 대상으로부터 실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이 그러합니다. 오온에 의하여 비롯된 나 역시도 독립된 자성이 따로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대상으로부터 실제하는 바는 그 무엇도 없음을 보셨습니다.
선남자 누군가가 미묘행을 닦기를 원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온조차도 무자성임을 보아야 합니다. 외도는 불멸의 자아를 논하지만, 불교는 나의 자성 없음을 논하고 있음을 확실히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몸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을 포함하여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는 것을 통해 각양각색의 분별망상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논의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 한 것입니다.


무자성이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호 의존하여 원인과 조건에 의해 비로소 갖추어진 것입니다. 형색과 공함 역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가 의존한 것입니다. 중론 입중론 현구론 선설장론에서 모두 공의 의미를 이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만약 자성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총카파 대사께서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공성을 깨우친 성인의 깨달음을 세간이 부정하게 되고, 세상의 이름 지어진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되며, 공성을 깨우친 세간의 깨달음이 부정되고, 만물은 모두 공함에 오류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것도 대상에서 비롯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이름 지어진 것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 무엇도 집착할 바가 없습니다. 여기서 자비심이 발현됩니다. 공성의 지혜를 통해 대상에 대한 집착과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속성을 일깨울 수 있게 됩니다. 자비의 심성이 성장될수록 이기심의 허물을 항시 관찰하고 동시에 이타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본인의 이기심을 줄여가는데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요? 다시 말해 얼마만큼 타인의 행복을 위해 이바지하고 있는가요? 그 물음의 답을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