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화엄산림대법회(2)

통도사 화엄산림대법회(2)


마음을 가꾸고 다스릴 줄 알아야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마음을 잘 가꾸고 다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그 마음을 한 번 바꿈으로써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될 화장여래(華藏如來)의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물려 부모, 형제, 처자, 권속 등 혈연으로 맺어진 인연의 지중함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를 보면 자식을 알 수 있고 자식을 보면 또 그 부모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유유상종(類類相從) 인연에 의해서, 그리고 각자의 업연에 따라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수미산(須彌山)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다시 그 수미산에 대해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수미산에서 발원하는 물은 사대해(四大海)로 흐른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인더스강을 따라, 또 하나는 갠지스강을 따라, 그리고 황하강과 네란자라강을 따라 4대해로 흘러갑니다. 이렇게 4대해로 흘러들어가는 물의 발원지가 바로 수미산입니다.

그리고 그 수미산 발원지에는 안욕지라는 호수가 있는데, 1년이면 수만 명의 순례자들이 1보3배의 오체투지(五體投地) 수행을 하며 죽음까지도 불사하고 참배를 합니다. 제가 수미산을 순례하면서 만난 한 수행자는 자기의 고향인 티베트의 동쪽에서 수미산까지 오는데 12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순례자들이 목숨을 걸고 수미산을 순례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수미산을 참배하고 수미산에서 기도하고 그리고 4대해의 발원지인 수미산 안욕지에서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시면 자신의 업장이 모두 녹는 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미산 순례행렬은 지금에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부처님 재세시(在世時)는 물론 그 이전부터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재세시(在世時) 부처님께서 수미산을 참배하고 안욕지에서 목욕하고 그 물을 마시면 업장이 다 녹아내린다고 믿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
….

“”그럼 그 물에 사는 물고기는?”이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물로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셔서 업장이 녹는다면 그 물에 살고 있는 물고기는 뭐가 되었겠냐는 말씀입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고사가 있는데, 부처님의 그 촌철살인 한 말씀에 저는 8만 4천 모공이 다 일어나는 법열을 느꼈습니다.

부처님은 이처럼 철저하게 평범하면서도 순화된 언어를 사용하신 분이십니다. 절대 극과 극의 논리로 말씀하시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마음을 넓게 쓰면 우주가 다 들어와도 넘치지 않고 작게 쓰면 바늘 끝 하나 세울데가 없는 것이 마음이라는데,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또 뭐라고 표현하신지 아십니까?

“사람이 마음을 옹색하게 쓰면 마른 완두콩 송곳으로 찌르기 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대중여러분, 완두콩으로 밥을 지어 먹어 보셨지요? 얼마나 고소하고 맛있습니까? 그런데 그 완두콩이 마르면 송곳도 안 들어간다 이겁니다. 그게 마음이라는 겁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다시 예를 들겠습니다.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수영 금메달 4관왕이 된 박태환선수 아시지요? 현재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라는데 그 선수의 발이 무려 320미리랍니다. ‘두대왈장군(頭大曰將軍)이요, 족대왈적(足大曰賊)’ 이라는 엣말을 따르자면 박태환선수의 발은 도둑놈 발입니다.

저 또한 발이 커서 280미리를 신습니다. 제가 10대 때 통도사에 들어와 살 때는 한 달에 고무신 한 켤레씩을 신었습니다. 그 때 우리 은사 스님이 ‘나는 석 달을 신는데 너는 한 달에 한 켤레도 다 못 견딘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당시 이 곳 하북면에서 280미리 신발을 신는 사람은 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발을 잘 써야 될텐데……” 라고 걱정을 했씁니다.
그 결과 저는 발을 포교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태환 선수는 세계적인 수영선수가 되는데 발을 썼습니다. 여기서 또 이런 생각을 가져 봅니다.

“삼보사찰(三寶寺刹)이요 불지종가(佛之宗家)인 영축총림(靈축叢林)에서 화엄사림법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성스러운 일인가…. 이 좋은 도량에서 좋은 스님들이 함께 어울리고 또 선지식을 만나는 지중한 인연을 맺어 준 통도사야 말로 성지 중의 성지가 아닌가……”

발 큰 박태환은 생각 한 번 바꾸니까 수영 선수되고 또 발 큰 정우는 포교사하고 있고, 마음은 그렇게 쓰기 나름인 것입니다.
염념보리심(念念菩리心)이면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이요, 염념삼독심(念念三毒心)이면 처처삼악도(處處三惡道)라고 했습니다.
이 법문을 현대적 버전으로 다시 번역을 해보겠습니다.
예을 들어서 애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의 뒷모습하고 출근할 곳이 없어서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젊은이의 뒷모습은 얼굴을 안 봐도 구분이 됩니다. 똑같이 젊은 사람일지라도 애인을 만나러 가거나 할 일이 있어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은 뒷모습에서도 탱글탱글 생기가 솟아나게 마렵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몸이 젊다고 하더라도 할일이 없어서 길거리를 배회 하는 사람은 맥까지 다 빠져서 힘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조사어록에 서방정토 극락세계(西方淨土 極樂世界)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서 동쪽에 있는 사람이 서쪽을 향해서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도달한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서쪽에 있는 사람은 어디를 보고 극락세계로 간다고 해야 되겠습니까? …….

앞에서 염념보리심이면 처처가 안락국이라고 했듯이 내 마음 먹기에 따라서 현재 머물러 있는 이 자리가 극락세계인데, 동서남북 방향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안락국을 만드는 것도 내 마음이요, 상악도를 만드는 것도 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잘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이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해야 할 십행품에는 부처님보다 대중이 상주보살이 되어 더 자주등장을 하십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중을 왜 보살님이라고 부릅니까? 보살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그 어떤 중생도 괴롭히지를 않습니다. 세간에 머물러 있는 중생들은 자기의 목적 의식에 사로잡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중상모략과 권모술수를 써가면서까지 원하는 바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보살은 스스로 목숨을 버릴지언정 결단코 남을 괴롭히거나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웃 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던데, 우리 부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쉼이 없나니 원망을 쉬어야 원망이 사라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으면 원수는 끊이지 않기 때문에 원수라는 생각 그 자체를 걷어내야 원수가 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즉 모든 문제는 자기로부터 출발을 하고 귀결점 역시 자기로부터 끝맺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세상의 그 무엇에도 얽매이거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웃종교의 이야기와는 차이가 많이 있지요?

다시 오늘 법문의 주제로 돌아와서, 십행품에 환희행(歡喜行)이 나옵니다. 여기서 환희행은 모든 소유물을 보시 하는데 있어서 털끝만큼의 아낌이 없이 되갚음을 바라지도 않고 다만 일체 중생을 구호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느끼도록 하는 것, 이것을 환희행이라고 합니다.

또 보시를 하는 방법에도 재보시(財보施)가 있고, 법보시(法보施)가 있고, 무외시(無畏施)가 있습니다. 여기서 보시는 공양(供養)으로 바꿔 말할 수도 있는데, 그 공양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공양을 법공양(法供養)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법공양보다도 더 수승한 공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공양이 무엇이겠습니까? …….

그것은 다름 아닌 부모님께, 그리고 웃어른께 효순(孝順)하는 공양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한 세상은 어둡지 않습니다. 이 화엄산림 법회에서 수많은 영가와 함께 자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을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대중 모두는 다함께 맛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희행 하나만 잘해도 나머지 바라밀은 다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바라밀이 환희행 속에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을 바꾸어서 육바라밀을 거꾸로 올라가 봅시다. 지혜가 그냥 생기는 것입니까? 또 선정삼매(禪定三昧)가 그냥 얻어지는 것입니까? 수행정진(修行精進)을 하지 않으면 선정삼매에 들 수가 없어요. 또 정진이 뭡니까? 갈팡질팡 횡설수설 우왕좌왕하지 않고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무소의 뿔처럼, 코끼리의 걸음처럼 한발 한발 내딛는 그런 모습을 정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진이라는 진지함이 그냥 생기겠습니까? 참지 못하는 사람은 정진도 못합니다. 참지 못하는 사람이 법상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참을줄 알아야 정진도 할수 있고 선정에도 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서만이 지혜가 늘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참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그냥 참아집니까?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절대 못참습니다. 규범 안에서 사는 사람만이 참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규범은 곧 지계입니다.

불자가 불자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고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생각하지 않고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 모습. 그러한 모습이 지계의 모습입니다.

자 그러면 보시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보시를 이렇게 말합니다. ‘주어도 준다는 생각 없이, 줬다는 생각 없이, 받을것이라는 생각 없이, 주는 사람도 깨끗하고 받은 사람도 깨끗하고 물건도 깨끗한 것, 그것을 보시라고 한다’고.
그러나 그 사람은 보시의 본래 의미를 전혀 모르고 한 말입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보시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보시는 ‘나눔’입니다. 나눔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준다는 것은 내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인데, 부처님 말씀에 따르자면,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왔습니까? 그리고 갈 때 그 것을 가지고 갑니까? 결국은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세상에서, 단 한 순간의 쉼도 없이 변화해가는 물질의 세계 속에서 서로 나누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보시입니다.

자 이제 오늘 법문의 결론을 게송을 옲는 것으로써 마무리하겠습니다.

“불자들이여,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환희행이라고 하는가.
불자들이여, 이 보살이 큰 시주가 되어 가진 물건을 모두 다 보시하는데 그 마음이 평등하여 뉘우치거나 아낌이 없으며 과보를 바라지 아니하며 이름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양(利養)을 탐하지도 아니하느니라”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