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 윤회를 끊어야

오늘은 석가여래부처님께서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인 가르침을 열고 보이고 깨달음의 세계에 들게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가 80여 세월을 중생과 더불어 머무시다 쿠시나가라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 날이다.
해탈과 열반은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한 것이다. 현상적으로 표현하자면 번뇌망상을 끊은 경계를 해탈이라고 하고,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자리를 열반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
부처님께서 29세 출가하여 6년 동안 법을 구하기 위해 많은 이들을 만나며 수행정진하여 불과덕(佛果德)의 자리에 오르신 날이 성도재일이지만 성도재일을 열반재일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은 번뇌망상을 여읜 자리를 깨달은 자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교리적으로는 35세에 성불하신 날은 사대육신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에 유여열반에 드셨다고 하고,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심을 무여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부처님의 생애를 팔상도(八相圖)에 비추어 얘기 하는데,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 출산수도상, 수하항마상, 녹원전법상, 쌍림열반상이 그것이다.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은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호명보살로 계시던 전생의 모습이고,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은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남이며,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은 사대문에서 노병사의 괴로움을 목격하지만 수행자의 안온한 모습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모습이며,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은 성을 넘어 출가하시는 모습이며,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은 설산에서 혹독한 수도를 하시는 모습이며,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은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하려는 마군의 무리들에게서 항복을 받아내는 모습이며,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은 녹야원에서 다섯 제자에게 처음 법을 설하시는 모습이며,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은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는 모습이다.
세상을 보면 종교라고 하는 자양분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이들만은 아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필요한 것이며 이는 넘쳐도 안되며 부족해도 안되는 것이다.
물질이 풍요로운 선진국일수록 종교성이 희박해짐을 보게 되는데, 그들은 결국 물질의 만족감이 행복의 잣대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실생활 속에서 종교화 되어가고 있긴 하지만 서로 어울리면서 같이 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게 된다. 물질이 풍부해질수록 더욱 시간에 쫓기며 살게 되고 결국 그러한 시간을 가지는 것에 소홀해 짐을 보게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세를 보면 첫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배우고 익히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려면 첫째는 배우려고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복덕과 지혜를 많이 실천하려는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사람이어야 한다. 넷째는 남을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여섯째는 생사윤회를 끊고자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여도 훌륭한 스승과 선지식과 도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끌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관음신앙이 깊게 뿌리잡고 있다. 또 서방극락왕생 하기위해 아미타불도 많이 찾곤 하지만 이 땅에 불교를 깊이 뿌리내려주시고 중생들에게 심성속에 불종자를 심어주신 석가여래부처님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사찰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기도를 많이 하는데,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한 가르침인 ‘신묘’, 한자 한자가 크고 진지하고 수승하다는 뜻의 ‘장구’, 그리고 ‘다라니’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요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진언’이란 본래 번역하지 않지만 부적절하나마 표현하자면 ‘참말’이라 하겠다.
요즘 보면 서로가 참말임을 강조하기 위해 참말임을 애써 강조하는 풍토가 있는데, 결국 거짓됨이 없는 그 말은 온데 간데 없고 참말이라는 말만 난무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이렇듯 척박해져 가고 있다는 이 시대에 우리는 만남과 어울림을 가지고 있을 때에 또 좋은 스님을 만났을 때에 스스로 져버리거나 접는 모습이 아니라 수행하고 정진하는 시간을 자꾸 가져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행동이 제각기 달라서 서로가 서로의 단점만 찾기에 급급하다. 명심보감에 “내 두레박줄 짧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 집 우물 깊은 것만 책망한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어리석은 분별 탓이고, 어리석음이란 탐진치삼독(貪·瞋·痴 三毒)의 결과인 것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넓은 벌판 가운데 한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은 맑고 깨끗해서 그 우물을 쓰는 사람이 청량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감로였다. 그러나 그 우물을 쓰는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말라서 없어지게 된다.’고 하였다.
아무리 귀한 제물이라도 그 제물을 어리석은 이가 가지고 있으면 자기를 위해서 써보지도 또 남을 위해서도 베풀어 보지도 못하고 지키느라 근심걱정만 하게 된다. 그러나 지혜있는 이가 제물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쓸 줄도 알고 베풀 줄도 알아서 그 목숨을 마칠 때 편안한 생각과 천상락(天上樂)을 얻게 된다.

“불자들아 믿음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믿음이요 하나는 구함이라 이런 사람은 믿음은 있으나 능히 구하지 못하므로 믿음이 구족하지 못하다 하느니라. 믿음이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들음으로부터 생기고 또 하나는 생각함으로부터 생기느니라 이 사람의 신심은 들음으로부터 생겼고 생각으로부터 생기지 아니하였으니 믿음이 구족하지 못하다 하느니라.”

정념(正念)과 정사유(正思惟)를 볼 때 둘 다 같은 생각같지만 인식기관을 통하여 생각하는 것과 그것과 관계 없이 갖게 되는 것의 차이가 있다. 정념, 억념(憶念)과 같은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신심이 구족한 것이다. 신심은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들어서 생긴 신심은 항상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문득 생기는 신심일 것이다.
신심은 들음으로부터 생기고 생각함으로부터 생기는데, 생각함으로부터 생기지 않으면 완전한 신심이라 할 수 없다.
고래와 같은 큰 동물도 죽고 나면 살아있는 새우나 멸치만도 못하다 하였다. 타의에 의해 움직일 뿐 자의적으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불자들아 이런 사람의 신심은 도가 있는 것만 믿고 도를 얻는 사람이 있는 것을 믿지 아니하므로 믿음이 구족하지 못하느니라.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바른 것을 믿고 하나는 삿된 것을 믿음이라 인과가 있는 것을 믿고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스님 네가 있는 것은 바른 것을 믿는다 하고, 인과도 없고 불법승 삼보의 성품도 다르다 말하며, 이런 삿되고 용렬한 말을 믿는 것을 삿된 것을 믿는다 하느니라.”

도가 있는 것은 믿는데, 도를 얻은 사람이 있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두레박줄이 짧은 것을 탓하지 않고 우물이 깊은 것만 탓하는 것과 같다.
바른 것을 믿고 삿된 것을 믿는 것도 믿음이라 하겠지만 인과를 믿는 것은 바로 믿는다 하고 인과를 부정하는 것은 삿된 믿음이라 한다.
우리는 구족하지 못한 신심으로 인해서 많은 분별과 시비에 휩싸이고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살고있다. 인생은 무상한 것이다. 우리 중생과 부처님과의 다른점을 교리적으로는 18가지가 다르다고 하고, 32상 80종호의 원만덕상을 이뤘다고도 하지만 또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돌아가신 이의 생일을 챙기는 일이 없지만 부처님은 2600여년동안 탄생일을 기억하며 모시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부처님의 열반재일이다. 전국의 각 사찰에서 봉축하기 위해서 경건주간으로 정하고 있다. 또 이런 날들을 통해서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떠날 것이라는 것을 사실을 인지하고 유념하여 남은 시간들을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전환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생의 무상함은 남녀노소 차별이 없지만 젊은이들은 앞날이 창창하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망령된 생각과 행동을 하기가 쉽다.
우리는 나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윤회를 끊기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선업을 지어야 하고 지혜로써 이 땅에 와도 환생자가 되어야 한다. 어리석음으로 생사에 끌려가는 윤회의 수레바퀴속에서 살지 말고 이제 나는 나의 모습을 잃지 않고 나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고, 나의 삶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나의 모습을 잃지 않는 시간들을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