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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느끼며 살 것인가 |
삼라만상의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 와 인생의 팔고(八苦) 가 어떻게 드러나는 현상인가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모든 것은 물질적이고, 형상적으로 이루어진 것 뿐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일체존재는 변화되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사적으로 무엇인가에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다. 풍선을 보면 풍선 안의 공기와 바깥의 공기가 달라도 그 풍선이 터지고 나면 안팎이 같아진다. 이번 인도 성지순례길에서 사진촬영을 많이 하였는데, 그 필름들을 정리하면서 느낀 것 역시 ‘내가 나를 놓으면 우주와 내가,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님을 보게 되었다.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 자연과 내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게 되더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붙들고 있으면 마치 물과 기름처럼 어울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집착된 자리에서 편견과 아집으로 드러나는 현상 속에서 자유로워 지는 길은, 수행정진을 통해서 ‘나’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열반경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때리거든 이렇게 때리는 이는 어디서 왔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그는 어떠한 도구를 사용해서 나를 때리고 있는데, 내 몸이 없었다면 그가 나를 때릴 수 있겠는가? 내 몸이 있는 것이 허물이구나.’ 어떤 이가 뺨을 때리니, 맞은 이가 오히려 때린 사람의 손바닥을 걱정하였다 한다. 부딪힘은 서로 내세워서 생기는 것이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나를 낮추면 부딪힐 일이 없다. 또 설혹 상대가 나를 꾸짖는다 하더라도 그것도 관심에 의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런 것으로부터 흔들림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질투하는 생각, 원망하는 생각, 시기하는 생각 들이 생기면서 갈등하고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부처님은 화엄경에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을 현인(賢人)의 지위라 하고, 십지(十地)보살이 되어야 성인의 과덕에 오른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도 제8 부동지((不動地)에 머물지 못하면 그때 그때 생각이나 환경이나 기분에 따라서 늘 변화되는 모습이 결국 나 자신을 파괴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고 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세상에는 어떠한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거룩한 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떤 가르침을 통해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고, 설령 누군가 나를 비난하고, 꾸짖고, 헤친다 하더라도 그기에 흔들림 없는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성인의 가르침은 네 가지 성스러운 가르침이 있으니 그것을 고,집,멸,도라 한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이라고 하는 전제를 두고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 괴로움에는 여덟 가지가 있는데,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또 사랑하는 이와 헤어짐과 만나기 싫은 이를 만나는 것, 구하고자 하지만 구해지지 않는 것, 오온성고(五蘊盛苦)가 그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고(苦) 라는 것은 못살게 구는 것이다.’고 하셨다. 세상에는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나도 인정하고 상대도 인정하는 것, 둘째는 나는 인정하지만 상대는 인정하지 못하는 것, 셋째는 나는 인정하지 못하지만 상대는 인정하는 것, 넷째는 나도 인정 못하고 상대도 인정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중 나도 인정하고 상대도 인정하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가 곧 불보살이라 하겠다. 괴로움은 결국 핍박상이라 하였다. 자기가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 괴로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모은다는 것인 집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먼지가 쌓여가듯 조금씩 쌓여가는 것이다. 모아진다는 그 개념은 ‘능생장(能生長) 의 모습이다’ 고 하였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못살게 구는 것인데 자꾸 쌓이는 것은 자라기 때문이다. 이것을 멸하는 방법은 적멸상이라 하셨다. 번뇌를 멸하면 넉넉하고 고요한 삶을 살 수 있다. 도(道)는 성인의 도라 하였다. 이는 팔정도(八正道)라 하였는데, 이는 대승상(大乘象)이라 하였다. 그리고 고(苦)는 드러나는 모습이요, 집(集)은 끊임없이 누적되는 것이요, 멸(滅)은 소멸하는 모습이요, 도(道)는 능히 소멸될 수 있다고 하였다. 불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러한 삶이 우리의 번뇌와 망상을 능히 제하며 그에서 발현되며 드러나는 현상이며, 이것이 보살도요, 삶의 진정한 표현일 것이다. 번뇌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인데, 어떻게 이들을 구분 지어야 할 지 모르겠다면, 화를 잘 내는게 욕심이며, 화를 잘 내는 것은 어리석기 때문이고, 어리석은 것은 바로 욕심 많은 것이다. 결국 이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괴로움에 세가지 모습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괴로운 이 몸에 괴롭고 시끄러운 것이 자꾸 생긴다. 번다하고, 조급하고, 서두르는 모습이다. 몸과 마음에 시끄러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변화해 감으로 괴로운 것이다. 생각이 여러가지로 일어나고 안절부절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파괴됨으로 괴로운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괴로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늙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잠깐의 찰나사이에 늙는 것이 있고, 또 계속 평생해서 늙어가는 것이 두 번째다. 병이라고 하는 것은 지수화풍 4대가 조화롭지 못할 때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몸에 생긴 병과 마음에 생긴 병이다. 또 죽는다는 것은 받았던 몸을 버리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아 곡식에 의지해 살다가 그 몸을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불자들아. 몸을 버리는 데도 두 가지가 있으니 명이 다하여 죽는 것과 바깥 인연으로 죽는 것이니라. 명이 다하여 죽는 데도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명이 다하고 복이 다한 것이 아니요, 둘은 복이 다하고 명이 다한 것이 아니요, 셋은 복과 명이 모두 다한 것이니, 바깥인연으로 죽는데도 세가지가 있으니, 부난이 아닌데 스스로 해롭게 하여 죽는 것과, 횡수로 다른 이 때문에 죽는 것과 두 가지가 다 함께 하여 죽는 것과, 또 세가지 죽음이 있으니 하나는 방일하여 죽는 것이요, 둘은 파괴하고 죽는 것이요, 셋은 목숨을 파괴하여 죽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방일(放逸)하여 죽는 것인가, 대승방등 반야바라밀다를 비방하는 것은 방일하여 죽는 죽음이라 하고, 파괴하여 죽음이라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에 부처님이 재정한 계율을 범하는 것이고, 목숨을 파괴하여 죽음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오온(五蘊)으로 된 몸을 버리는 것을 목숨을 파괴하여 죽는 죽음이라 하나니 이런 것을 죽는 고통이라 하느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식의 범주이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다. 무심하다는 것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분별하지 않고 시비하지 않는 보편성이 결여되지 않은 사고 속에서의 생각과 행동이 내 것이어야 한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때 소중한 것도 드러나고 그것이 우리의 참모습임이 드러날 때 인생팔고든 생로병사든 고든 스스럼없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은 내려놓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내려놓는 공부를 해야 할 때이다. 내려놓는 공부를 할 때에 모두가 어울리고 조화롭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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