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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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불교중흥을 돕다

중관 해안(中觀海眼 1567~?)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청허 휴정이 조선의 불교를 중흥했고, 대표적인 4명의 제자들이 그의 뜻을 받들어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중흥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들 네 명의 스님들 외에 그때나 지금이나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조선불교의 안과 밖으로 동분서주하며, 왕조와 불교계의 안위를 위해 마중물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스님들이 적지 않다. 그중의 한 분이 중관 해안스님이다.


스님은 그 행적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제자 임마거사恁.居士가 해안 스님의 유고집遺稿集에 쓴 발문跋文의 내용이 스님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다.
기록에 의하면 스님은 성은 오씨吳氏, 전라남도 무안務安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이라 불렸다. 그의 출가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집이 가난하여 승려이자 외숙인 뇌묵당雷.堂 처영處英에게 의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어느 날 해안海眼이란 승려가 무안務安으로부터 와서 인사를 드리는데 빼어나고 아름다운 기품이 한눈에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학식을 시험해 보니 이미 그들의 내전內典에 통달하였고, 곁으로는 시문詩文에까지 미쳐 지은 것이 또한 빛나기에 그 출신을 물어보니 사족士族이었다.


불교와 지중한 인연을 맺고 있었던 당대의 문인 허균이 스님과 10여 일간의 짧은 만남 이후 그의 문집에 남긴 단상이다. 허균은 스님과 나이가 같았다. 스님은 사족출신士族出身으로 교학敎學에 해박했고, 유학과 시문에도 능했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의 만남은 비록 짧았지만, 자신 역시 불교를 좋아했다고 술회한 허균과 스님의 교유는 승속僧俗을 초월하여 유불교류儒佛交流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다. 처영 스님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전통유교경전(墳典)에 통하였고, 시부詩賦에 있어서는 배우지 않고도 잘하였다고 한다.
스님은 출가하여 법명은 해안海眼, 법호法號는 ‘철면중관자鐵面中觀子’, ‘철면옥정鐵面玉井’, ‘운거철면중관선자雲居鐵面中觀禪子’ 혹은 스님이 주석했던 암자의 이름을 빌려 ‘무가암無可菴’이라고도 했다.
스님은 청허당의 법손法孫이기도 했지만, 삶 자체가 “지팡이 하나로 떠다니면서 인연을 따르되 집착이 없었다”고 한 것처럼 평생 유랑으로 일관한 삶이었다. 다만 스님이 임진왜란 때 영남에서 의승병을 일으킨 사실이나, 만년에 지리산 대은암大隱庵에 주석하면서 금산사·대둔사(大芚寺, 대흥사)·화엄사의 사적기를 찬술한 것이 많지 않은 그의 행적 가운데 대표적인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이 비록 못내 어리석사오나 선조宣祖께서 서수西狩하시던 해에는 의병을 일으켜 스승 아무의 군영 밑에서 종사할 때에 행주幸州의 한 성城이 다만 가시덤불이면서 싸움에 이긴 것을 보았는데…
-『중관대사유고中觀大師遺稿』 중에서-


이 기사는 스님이 처영 스님과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에 참여한 것을 알려주는 기사다.
행주대첩은 권율이 이끌던 관군官軍과 스님들로 이루어진 의승군義僧軍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승군의 지휘자는 처영 스님이었다.


스님은 봉기 직후 1천여 명의 의승군을 이끌고 전라감사 권율의 막하로 이동하여 북상하는 군사 1만과 동행했다. 이후 행주산성에서 권율과 함께 3만여 명의 적군을 격퇴했는데, 해안 스님은 당시 이 전투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런가 하면 스님은 경주 불국사 기록에도 나온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만력萬曆 40년, 즉 광해군 4년(1612) 스님이 전란의 참화가 극심하여 불에 타버린 불국사佛國寺의 범종각梵鍾閣·좌경루左經樓·우경루右經樓·남행랑南行廊을 중건했다는 것이다. 스님은 수행을 위해서도 계림雞林의 선원禪苑에도 있었다. 전장의 와중에서도 수행의 끈은 놓지 않은 것이다.
스님은 이와 같이 임진왜란 때 경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지방에서 의승군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가운데 불국사에 주석하면서 왜적 방어에 진력했고, 수행과 사원의 중건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스님의 문집에는 “몸은 산림山林에 있으면서 이름은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에까지 퍼져 임진년(壬辰年, 1592)에서 정축년(丁丑年, 1637)까지 승려의 장의총통승군仗義摠統僧軍으로 있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여 종1품인 판사判事를 제수받기도 했다. 삶의 대부분의 시기를 전란과 함께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해안 스님은 당시 조선의 어지러운 상황과 전란 속에서 의승군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조선의 불교계가 안고 있는 현실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불교의 역사와 정체성을 되새기고 있었을 것이다.


천계 5년(1625) 어느 달 어느 날 지리산 반야봉 아래 용문암 승려 아무개는 삼가 합장하고 도체부총융사께 답장 올립니다. 소납은 오랫동안 병을 앓는 중 매미 배를 채우면서 비바람과 뇌성벽력 가운데 선방에 앉은 지 오래입니다. 제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행주의 한 성이 다만 가시덤불이면서 싸움에 이긴 것을 보았습니다. 병가의 일이란 일시에 득실에 있을 뿐이요, 군대를 기르거나 성을 쌓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을 쌓아도 도적을 막기 어려운데 왜 구태여 누더기 입은 자를 시키려 하십니까? 도첩度牒이 없다고 죄를 준다면 저 조각구름처럼 떠도는 선승禪僧들로서 그 고된 역사役事를 배겨낼 힘이 없을 것이니, 그 죄를 이루 다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4민(사농공상士農工商) 밖에 있더라도 그들도 또한 머리털 없는 백성이라, 한갓 인화人和만 잃고 일은 뜻대로 안될 것이니 소승이 이것을 적이 우려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글이다. 스님들도 백성인데 도첩이 없다고 무작정 죄를 주고 부역을 시키는 것은 오히려 인화人和를 거스르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불교가 소외 당해던 당시에는 비일비재하였다.
스님은 전란 후에는 지리산 화엄사에 있으면서 대화엄종주大華嚴宗主로서 법화法化를 폈다. 만년에는 지리산 귀정사歸正寺 소은암小隱庵의 옛터에 대은암大隱庵을 중창하고 그곳에서 참선 수행에 정진하였다.
스님은 서산대사의 제자로 그 문하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이후 평생 임제선풍을 드날린 인물이다. 해동선海東禪의 종조를 임제종풍을 계승한 태고 보우太古普愚로 확립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그러나 승려의 본분은 수행과 중생제도일 뿐, 스님은 헛된 명예를 버렸다. 자취를 감추고 사람을 피하여 오로지 교해敎海에 잠기고, 선등禪燈을 탐구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시율詩律의 맑고 강직함과 필법筆法의 고풍古風을 감상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자세한 행장은 전하여지지 않으나 1636년(인조 14)에 화엄사의 사적을 쓴 것으로 보아 70세 이후에 그곳에서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법을 이은 제자로 청간淸侃·정환正還·설매雪梅 등이 있다.
저서로는 『중관대사유고中觀大師遺稿』 1책, 대흥사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죽미기竹迷記』 1책, 『화엄사사적華嚴寺事蹟』 1책,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 1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