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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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깃든 붓다의 본성

달라이라마, 보드가야 야단법석 법문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지금 여기에 나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윤회의 근거가 정화되면
그 순간이 즉 열반이 됨과 동시에
붓다의 완전체 다르마카야Dharmakaya에 이른다네.
그 경지에서는 붓다의 마음과 범부의 마음을 나누는 차별이 없으니
붓다의 근본 종자를 지닌 수행자는 오로지 정진에만 힘쓰라.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는 지도를 명하여 람림이라 하니,
수승한 보리도의 차제를 담아 수행의 단계라 이름하였다.’



대승불교의 아버지 용수보살(나가르주나)에게 예경을 올린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8)는 5만여 대중이 운집한 보드가야 야단법석에서 마음이 향하는 바, ‘공성’을 논하였다. 번뇌란 본래 일시적이며 그 어리석음을 해독하는 묘약이 보리심을 일으켜 공의 도리를 사유함으로써 무지에 기인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진정한 행복은 자비의 뿌리에서 난다네.”


우리는 깨달음의 기원이 되는 보드가야, 신성한 땅에 모였습니다. 용수보살께서 논하신 법의 찬미를 독송하며 우리 각자는 보리심의 깨어 있는 마음자리와 공에 대한 이해를 숙련시키기 위한 집중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과거 선지식께서 이루신 승리의 가르침을 깨닫고 예경 올린바, 진정한 진리의 힘으로 말미암아 일체를 정복하고자 서원합니다.
우리가 올리는 일상의 기도문에는, 그 어떠한 작은 고통과 괴로움을 원치 않음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중생이 동일하게 지닌 소망이자 희망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기쁨과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성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은 괴로움을 극복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행복을 실현하는 방법을 찾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능이 단견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책임을 전가하는 예도 일어납니다. 지금의 지구를 3차대전에 비유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입니다. 우리 인간은 여전히 파괴만을 목적으로 하는 정밀한 무기를 제조하는 데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그러합니다.
우리 인간은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고 모든 인류가 행복을 누리고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실천에 참여해야 합니다. 전쟁을 종식하고 무기 사용을 중단하기 위해 대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완전한 승리를 정의함이 적의 패배라는 관점에 기준을 두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나’와 ‘타인’이 아닌 우리의 자세로 더불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사는 방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살상 무기를 겨누는 지금의 상황이 슬픕니다. 어떠한 이유로 연민의 마음은 나눠지기 힘들게 되었을까요. 나를 둘러싼 주변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렵게 되었을까요. 세계의 평화는 이 지구별에서 과연 실현 불가능한 과제일까요?
진정한 행복의 뿌리는 단순합니다. 바로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분노와 미움으로 우리 자신을 이리저리 방황하게 방치하면 인류의 역사에 평화는 결코 도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갖고 그 온기를 나눈다면 일말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하나 되므로 인식하는 데는 곳곳의 리더들이 지닌 책임감이 주요한 역할을 합니다. 서로를 보듬고 돕기 위해서는 리더십의 역량이 발휘되어 실질적인 조취가 취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하게 하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과감히 도려내 봅니다. 애착, 분노, 증오와 같은 감정을 통찰의 시점으로 바라봅니다. 그것이 지닌 공허함을 면밀히 찾아내 봅니다. 우리가 더욱더 사랑하도록 하고 동정하도록 하는 마음을 내도록 우리의 정신에 사랑과 연민만이 자리하도록 집중합니다.
붓다를 의미하는 티베트어 상계SangGye는, 부처님께서 극복하신 모든 번뇌와 비로소 획득한 자질을 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낸 우리는 그 대상을 확대시켜 일체 중생을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나’ 역시도 의존하여 생겨나 이생을 살고 어느 시점에는 떠난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객관적으로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광활한 무한대의 공간에 포진한 중생을 마음자리에 두고 그들에게 이익을 주는 생각에 집중해 보세요. 그들을 함께 인도하겠노라는 서원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보리심의 싹을 틔우는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