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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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마음을 냈으면 그 마음을 기르자

 


신규탁(연세대 철학과 교수)



1.
과거에는 상상도 못 했을 ‘사회적 통신망 체계(SNS)’가 구축되었습니다. 지난달에는 지인의 부친께서 별세하셨다는 문자 메시지가 스마트폰으로 왔습니다. ‘스미싱(SMS 피싱)’ 즉, ‘사기성 모발일 문자’였는데, 그걸 모르고 눌렀다가 제 스마트폰에 ‘악성 앱’이 심어졌고, 이번에는 <신규탁 교수 부친 부고장>이 제 이름으로 다시 퍼졌습니다. 난리, 난리였습니다.
문제가 생긴 줄을 확인 즉시, 컴퓨터의 <카톡> 발송을 활용해 제 스마트폰에 저장된 모든 전화번호를 10개씩 나누어, 사기성 문자임을 알려 열지 마실 것과 죄송하다는 문자를 급히 전했습니다. 그리고 ①경찰서 민원실로 가서 절차를 밟고, ②스마트폰매장에 가서 제 명의를 도용하여 개설한 스마트폰이 있는지 확인하는 등 각종 조치했습니다. 이 일로 참으로 많은 걸 경험했습니다. 많은 일화가 있는데 두 개만 소개합니다.
부산 세존사 장산 큰스님께서는, ‘신 교수가 죽어서 아들이 신 교수 전화로 <부고장> 낸 줄 생각하시고 전화하신 것’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핸드폰이 울리고 스님 함자가 뜨길래 얼른 받았습니다.
“큰스님, 접니다.”
“아이고 안 죽었네! 신 교수가 받네.”
이리 깊이 내리시는 사랑을 제가 어찌 갚아야 할지. 글을 쓰는 지금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 이튿날 이른 아침 전화가 울려 열어보니 ‘통도사 혜남 강백’이라는 글자가 보였습니다.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받았습니다.
“강주 스님 접니다.”
“신 교수,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 난 <부고장> 열 줄 몰라. 향전香奠 보내게 통장번호 일러줘.”
안 열어보셨다니 안심되고, 나 같은 게 뭐라고, 위로하시려는 마음이 한없이 감사했습니다.
혜남 강주 스님과는 오랜 여운이 남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1993년인 걸로 기억하는데, 일본 동경에 있는 다이쇼대학(大正大學) 근처에 사시는 혜남 스님께로 해인사 원택 스님을 모시고 가는 길 안내였습니다. 당시 혜남 스님은 동양철학 전공 박사학위 과정을 막 마친 때로, 해인사 강원講院에서 스님을 강주講主로 초빙했습니다. 전화로 허락은 받았지만, 찾아뵙고 예를 갖추려는 해인사 대중의 정중함이었습니다. 그 일을, 당시 해인사 총무 소임을 맡으신 원택 스님께서 수행하셨습니다. 다이쇼대학 전철 근처 커피집에서 󰡔화엄경 청량소󰡕의 <왕복서> 가르쳐주시던 일, 일본 떠나시면서 세간살이를 주시던 일, 긴 여운으로 남아 있어 지금껏 이어지고 있습니다.


2.
여기에 연재하는 󰡔범망경󰡕 이야기는 혜남 스님의 교화 공덕입니다. 그런 인연을 좀 말씀드려 감사드리며, 특히 󰡔범망경󰡕의 골수骨髓가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제게 되짚어주신 큰스님의 뜻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부고장> 일로 혜남 스님 전화를 받고, 상황이 파악되자 안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 말씀이, 작년 6월 입적하신 월운 스님 열반 초종初終 상례에 참여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전해주셨습니다. 늘 궁금하던 차였는데 스님께서는 <무문관無門關> 드셔서 왕래에 자유롭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다음 말씀은, 월운 스님을 향한 ‘추모의 정’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제게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우리스님 통도사 젊은 시절, 당시는 구하九河 노장님 회상이었습니다. 어린 학인들이 조선 최고의 화엄종주이자 선사이신 환성 지안(喚惺 志安 1664~1729) 스님의 시詩를 운운하는 소리를 노장님께서 지나다 들으시고는, “글은 해룡(海龍=월운 스님의 법명) 학인이 최고”라 하셨답니다. 문성文星의 열반을 아쉬워하는 덕담이셨다.
끝으로 필자의 일상도 하문하였습니다. 이에, 최근 저는 큰스님 덕분에 󰡔범망경󰡕과 인연 되어 그 책의 <상권>과 <하권>을 모두 번역해서 곧 출판할 예정이라는 말씀, 스님께서 주관하신 당나라 화엄종주 현수 법장 스님의 <범망경보살계본소>를 가까이 두고 배운다는 말씀을 여쭈었습니다.


절 집안으로 치면, 월운月雲 스님은 필자의 은사恩師이자 법사法師이시고, 혜남慧南 스님은 보살계 계사戒師가 되십니다. 필자는 마을의 길지 않은 종손으로 태어나 꼬맹이 때 조부님과 ‘겸상’을 받으며 응석 부린 인연인지, ‘유교儒敎적 종법宗法’ 의식이 좀 남아 있습니다.
석전 박한영 스님의 강맥을 이은 종손宗孫이 혜남 스님이십니다. 우리스님은 운허의 제자이고 운허는 석전의 제자이지만 지손支孫이십니다. 봉선사는 고향 집 같고, 고창 선운사와 영축산 통도사는 큰 집 같아 남다르게 생각하고 지냅니다. 그리고 순천 선암사에서 강석講席을 펼쳐 석전 등을 길러 조선팔도로 전강傳講 시키신 ‘화엄종주 경운 원기 대선사’는 이 나라 화엄의 중시조로 우러릅니다. 이런 인연으로 태고종 총무원장과 선암사 주지로도 봉직하셨던 서울 도봉산 염불사 호명 큰스님은 집안 어른 같으십니다. 호명 스님은 그 어려운 종단역사 속에서도 경운 스님의 기신제를 지금껏 모시는 증법손曾法孫이십니다.


3.
필자는 2009년 윤 5월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소재 <기원정사>에서 혜남 스님을 전계사로 보살계 수계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범망경󰡕 <하권>을 꼼꼼히 읽기 시작했고, 계상戒相에는 근처에도 못 가지만 잊지 않으려 ‘노력’은 좀 합니다.
<부고장> 일로, 혜남 스님과의 전화 통화에서 ‘노력’은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러시게. 노력하시게” 하셨고, 전 그러겠다고 다짐을 드렸습니다. 목욕하고 새 옷 입은 듯이 행복했습니다. 때 묻은 저에게 청정수를 부어주시는 계사 스님께서 건강하시길 마음으로 염원했습니다.
독자님들이 시중에서 보시는 책은 󰡔법망경󰡕의 <하권>으로 ‘10가지 무거운 죄상과 48가지의 가벼운 죄상’이 적혀있습니다. 대승불교를 실천 수행하여 보살의 길을 가려는 불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윤리 강령’입니다. 그런데, 이런 실천 강령이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 점에는 주목하지 않는 듯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출가 교단의 ‘윤리 강령’은 그 공동체 합의에서 유래합니다. 물론 그 공동체 중심에는 석가세존께서 계셨습니다. 세존 열반 후,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100년이 지나고, 또 400년이 지나면서 공동체 교단은 분열되어 20개 부파部派가 출현했다고 불교의 역사는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부파의 공동체에서는 자신들의 ‘윤리 강령’ 소위, 율장律藏의 자구字句 연구는 했지만, ‘윤리적 행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간과했습니다. 전승되는 율장을 왜 지켜야 하는가? ‘교조주의적’ 발상이 컸습니다. 세존 생전에 정하신 것이니까! 옛 어른 스님들이 지켰던 것이니까! 이런 발상에서 당위적 행위의 정당성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대승의 불교도들은 좀 더 ‘보편적 지평’에서 행위의 정당성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율장만이 아니라, 경장이나 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보편적 지평’, 그것이 ‘교주의 말씀’보다 더 정당성을 담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바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도, 보편 이성으로 담보된 도덕률이라면, 내지는 철학이라면, 수용하기 더 쉬울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이념적 내지는 믿음의 전통이 다른 공동체간에도 함께 수용할 수 있습니다.
󰡔법망경󰡕 <상권>에는 바로 이런 ‘보편적 지평’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마음[心]’이 그런 지평이라고 합니다. 대지 위에 온갖 식물과 생물이 자라고 살아가듯이, 모든 이론과 가치가 ‘마음’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심지心地, 즉 ‘마음의 땅’이라는 말로 용어화 했습니다.
계戒와 율律이 그것이 그것으로서의 당위적 정당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면 ‘브라만 신神’으로부터 내려 받던, 또는 ‘여호와 신神’으로부터 계시 받던 해야 합니다. 물론 ‘공동체의 전체 구성원’의 논의를 통해서 정할 수도 있습니다. 규약주의(conventionalism), 발상은 좋지만 그게 가능하기 위한 조건 갖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 생존한 사람들만의 의견에 한정해서 논의하면 뒷세상에 태어날 사람들은 그 논의에 동참하지 않았는데, 미래의 사람도 따라야 할까요? 너무 철학적 문제이어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합니다.
물론 ‘마음의 땅’이라는 보편적 지평을 상정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어렵고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도들은 ‘규약’이 아니라 ‘심지’의 전통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을 담아 ‘대승보살계’라고 이름합니다.


4.
이런 배경으로, 지난 4월호에서도 소개했듯이 대승의 실천 윤리는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체적으로 ‘발심하여 깨침으로 나아가는 ‘10가지 발취심[十發趣心]’을 소개했습니다. 이어서 5월호에 소개하는 내용은, ‘발심發心하여 취도趣道’ 했으니 이제는 그 마음을 길러 가꾸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어떤 존재[法]라도 모두 가설假設된 것이라 여기는, 문사수聞思修 중에서 사혜思慧에 해당하는, 굳건한 법인[堅法印]에 입각하여 ‘10가지 장양심[十長養心]’을 닦아 깨침의 결과로 향해 나아가라고 합니다. 10가지란, ①자심慈心, ②비심悲心, ③희심喜心, ④사심捨心, ⑤시심施心, ⑥호어심好語心, ⑦익심益心, ⑧동심同心, ⑨정심定心, ⑩혜심慧心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 달에 올리기로 하고, 중요한 점만 밝히겠습니다. 중요한 건 ‘심지心地’입니다. 발심한 마음을 길러 나아가야 할, 그렇게 행동해야 할 당위성의 근거 말입니다. 󰡔법망경󰡕 <상권>에 나오는 본문을 인용하겠습니다.


‘진실한 지혜 자체의 본성[實智體性]’에 입각하여 ‘방편 지혜의 도[智道]’를 널리 행하는 것이다.


‘진실한 지혜 자체의 본성’이 행위의 당위적 근거입니다. 이점이 ‘대승계’의 골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