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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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철학으로 자리 매긴 정토신앙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원효 스님의 불교사상이 『대승기신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께서는 이 책에 대한 소위 해설서를 쓰셨는데, 그게 후세에는 『대승기신론 해동소』로 알려져 지금에 전한다. 여기에 나오는 ‘해동’이란 우리나라를 말한다. 이 해설서는 당시 중국의 당나라에 전해졌고, 중국 스님들의 『대승기신론』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로 현수법장 스님이다. 이 스님은 화엄종의 제3조로 받들어지는 유명한 학승이다. 화엄의 제1조는 두순 법사이고, 제2조는 운화사의 지엄 법사이다. 이런 화엄의 대법사들이 서로 이어가면서 만들어간 교학사상을 학자들은 ‘화엄교학’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우리나라의 원효 스님의 역할이 있었다. 『대승기신론』에 대한 해설서를 통해서 그런 역할을 했다.
‘화엄교학’ 형성에 『대승기신론』이 끼친 영향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일심사상’이다. 물론 ‘일심사상 『화엄경』을 구축하는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이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면 『화엄경』을 비롯한 대승경전 100여 부 속에 들어있는 ‘일심사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대승기신론』 속에 녹여 넣었다는 표현이 불교문서 성립 순서에 부합한다. ‘일심사상’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불교에도 중요한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점은 선불교는 물론, 정토염불 사상에도 드러나고, 이 모두는 우리나라에 현재 실행되고 있는 각종 염불 의식문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2.
『대승기신론』은 모두 다섯 대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네 번째 대목에서는 ‘신심’과 ‘수행’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신심’이란 진여의 근본,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 부처님의 가르침, 출가 공동체, 이 넷을 믿는 것이다. 보통, 경전 속에서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 내지는 신앙을 말하고 있는데, 『대승기신론』은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다시피,
 ‘대승’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대승’의 입장에서 믿어야할 또는 귀의해야할 대상을 명시하고 있다. 그 특징이 드러난 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진여의 근본’이다. ‘진여의 근본’이란 ‘일심’을 말한다. 다른 말로 ‘자성청정심’을 말한다. ‘연기-무상-무아’의 공성을 유지하면서도, 고요하면서도, 신령스러우면서도, 무언가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일심’의 작용이다. 이것을 화엄교학의 학승들은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일심’의 바탕 위에, ‘불-법-승’의 삼보가 성립 가능하다는 것이 대승 불교의 특징이다. 소위 초기불교를 대변하는 북방의 <아함부 경전>이나, 남방의 <니까야>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대승에서 말하는 수행이란 무엇인가?
 ‘수행’이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 이렇게 다섯 실천행을 말한다. 다섯 실천행 중에서 다섯째의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에 대해 『대승기신론』에서는 많은 설명을 한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의 끝 부분에 정토신앙과 매우 관련된 중요한 말씀이 있어 인용한다. 이 대목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오늘에 전해지는 우리의 신앙 현장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정토신앙과 우리의 정토신앙이 다른 핵심을 바로 아래의 인용문에서 찾을 수 있다.


“어떤 중생은 애시 당초 부터 이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수행법을 배워 바른 믿음을 얻으려고 하지만, 마음이 약한 이들은 (자신이) 이 사바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을 항상 만나서 몸소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걱정하며, 결국에는 자신이 신심을 내지 못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포기하려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는 마땅히 알아라. 부처님에게는 뛰어난 방편이 있어서 (그들이) 신심을 내도록 보호하고 품어주신다는 것을. 이른바 오로지 하나에 집중한 마음으로 염불한 인연으로 타방의 부처님 나라에 환생하여 그곳에서 항상 부처님을 친히 뵙고 영원히 악도惡道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일이다. 예컨대, 정토부의 여러 경전에서 어떤 사람이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전심전력으로 생각하여 그가 닦은 선근으로 회향하여 그 세계에 환생하기를 소원하면 곧 왕생往生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곳에서 항상 부처님을 친히 만나기 때문에 결코 물러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관觀하여 항상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 마침내 왕생하여 바른 선정(正定)에 머물기 때문이다.” 


3.
이 점에 일찍이 주목한 분은 역시 위에서 말한 신라의 원효 스님이다. 원효 스님은 『무량수경종요』라는 해설서를 집필하여 이 점을 분명하게 했다. 이 책은 정토신앙을 보급하시는 정목 강백께서 번역하여 읽기 쉽게 그리고 자세한 설명을 붙여서 출판했다. 『무량수경종요』(정목 역, 비움과 소통, 2015년)가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의 71쪽에는 이 점이 분명하게 제시되었는데, 이는 대승의 본질을 통찰하신 안목이고, 원효 성사의 본뜻을 밝히신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일심의 도리를 깊이 이해하고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일심 정토에서 동체대비를 실현하는 것이 불교의 큰 뜻이다. 『무량수경』은 불교의 큰 뜻을 실현하도록 쉽게 일러준 가르침이다. 『무량수경종요』는 타방 정토를 버리지 않고 일심 정토를 논하는 특별한 논서이다.”


이어서 정목 스님은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수행에 있어서는 부처님처럼 돈오돈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타의 보살들은 돈오점수하신다. 중생들도 마찬가지이다. 정목 스님의 해설(74쪽)에 따르면, “선오先悟란 먼저 연기 또는 일심의 도리를 깨치는 것이고, 후수後修란 깨달은 지혜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계신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선오先悟에서 무엇을 깨달으라는 말인가? 그것은 ‘일심’이다. ‘일심’에 대해 아주 간결하게 정리한 경전이 바로 『원각경』이다. 그 첫 대목에는 대승의 정토신앙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관점을 제시되어 있다.


“어느 날 바가바(bhagavat)께서 다음과 같이 하시는 것을 제가 보고 들었습니다. (그 분께서는) 신묘하고도 막힘이 없고 광명이 가득한 곳으로 들어가셔서 오로지 삼매에만 몰두하시어 수많은 여래들과 함께 찬란한 빛으로 서로서로를 비추시며 계셨다. 이곳은 모든 중생들이 본래부터 간직한 ‘깨끗한 깨침의 자리(淸淨覺地)’로서, 몸이니 마음이니 하는 일체의 겉모양이 완전히 사라져 평등하고 끝이 없어 온 세계에 꽉 차 있다. 그곳에서 둘이 아님(不二)을 수순하시며, 둘이 아닌 상태에서 여러 종류의 정토를 드러내셨다.”


“신묘하고도 막힘이 없고 광명이 가득한 곳”이란, 『보성론』에서는 ‘법계장法界藏’이라 했고, 『대승기신론』에서는 ‘심진여心眞如’라 했으니, 모든 중생과 부처님들에게 공통적으로 간직되어 있는 ‘본원本源 자리’이다. 유식종에서 법성토法性土라고 하고, 천태종에서는 상적광토常寂光土라 한다.
다음으로, “둘이 아님(不二)을 수순하시며”에서 말하는 ‘둘’이란 여러 상대적인 개념이나 현상들을 지칭한다. 예를 들면, 생사에 윤회하는 길과 열반을 이르는 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둘’이다. 범부들은 생사윤회에 순응하며 살고, 성문승과 연각승들은 열반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생사와 열반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 밖에도 정토와 예토를 나누고, 중생과 부처를 나누고, ‘능能 . 소所’를 나누는 것 등도 ‘둘’이다.
다음은 “여러 종류의 정토를 드러내셨다”의 뜻을 살펴보자. 불교의 국토는 법신 부처님이 머무는 법성토, 보신 부처님이 머무는 수용토, 화신 부처님이 머무는 변화토, 이렇게 세 종류가 있다. 이 모든 국토는 ‘일심’ 위에 세워진다. 『원각경』은 법신 부처님이 법성정토에서 설법하신 것으로 화엄종에 의하면 52지위 중에서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초지에 오르지 못한 수행자들이 보면 화신불이 예토에서 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문제일의 아난존자는 화신불이 예토에서 설하는 내용을 결집한 것으로서, 예부터 법성종의 철학에서는 이렇게 이해했다. 역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화엄종과 선종과 정토종이 이런 철학에 입각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