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섭 | 법보신문 편집국 차장
“죽이는 칼(殺人刀)과 살리는 칼(活人劍), 이것은 존재의 모습이자 살아 흐르는 삶의 알맹이다.
그러니 죽임에 대해 말하더라도 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삶에 대해 말하더라도 곧 목숨을 잃고 만다. 깨달음 그 자리는 어떤 성인도 전할 수 없는 것이니 어거지로 깨닫고자 하는 이는 물속의 달을 건지려는 원숭이와 같다.”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 즉 선의 문헌 가운데 첫 번째로 손꼽히는『벽암록』제12칙‘동산의 마삼근’수시(垂示) 내용이다. 동산 화상은 이렇게 일러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자, 말해보라.
전할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언어와 공안이 있는가. 안목이 있는 자는 말해보라.”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동산 화상은 바로 앞에서 어떠한 성인도 전할 수 없다고 해놓고 도대체 무엇을 말하라고 하는 것일까.
간화선 수행에서 말하는 공안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생겨났다. 그리고 그 수는 1700개에 달한다. 이 공안을 다른 말로 화두라 부르고, 화두는 곧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구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에서는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의 스님을 비롯해 많은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화두를 참구하고 있으며, 화두 참구의 방편으로 참선을 택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100여 곳 선원에서는 2200여 납자들이 산철에 쌓아 두었던 좌복을 펼치고 동안거에 들어 있으며, 방방곡곡 시민선원에서도 깨달음을 얻고자 발원한 수많은 재가선객들의 수행열기가 한 겨울 추위를 녹이고 있다.
참선수행자들의 은산철벽을 뚫고도 남을 듯한 그 모습을 볼 때면
언제나 한국불교의 희망이 살아 숨 쉬는 곳이라는 믿음으로 감동을 느끼곤 했다.
다만, 혹여라도 목적은 잊은 채 앉아 있는 것만이
공부이고 진리라고 집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방편에 집착하지 않고 목적에 충실할 때 진정한 선의 황금시대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옛 조사 스님들이 스승의 말끝에 깨달음을 얻었듯, 선사들이 들었던 그 화두를 들어 몰록 깨닫기 위해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고 있는 그 모습은 구도자의 모습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조계종이 간화선 대중화에 매진한 덕분에 그 수도 적지 않게 늘어났다. 바야흐로 부처님이 깨닫고 가르친 바를 제대로 알아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수행 전성시대가 열린 듯한 모습이다.
깨달음에 곧바로 이를 수 있는 최상승의 수행법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한국불교에서 최상의 수행법으로 불리는 간화선 수행은 이렇듯 현재 이 땅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수행법이며, 그 자부심과 열기로 인해 혼탁한 세간을 구할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까지 부각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간화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게 흘러나오고 있다. 단적으로 지난 11월 15일 조계종 불학연구소 주최로 열린‘간화선의 인간상과 수행관’세미나에서는 간화선에 대한 날선 비판이 제기됐다.
세미나에서 한 스님은“오늘날 한국 선은 상구보리의 측면에 치우침으로써 대승의 기본 정신인 자비실천을 못하고 있으며, 초월만 강조함으로써 현실문제에 대응하는데 무능하다”고 간화선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그런가 하면 어느 학자는“석가모니는 매우 다정다감하고 신중한 수행자이며 온건하고 합리적인 품성의 소유자였지만 선 수행자는 이와 달리 냉정하고 성급하며 과격하고 비합리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며 간화선 수행자들이 겉으로 드러내 는 모습의 일면을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간화선에 대한 지적이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간화선이 최상승법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었고, 돈점(頓漸)을 다투는 일도 적지 않게 있어왔다. 그러나 이 세미나는 기존의 간화선 논쟁에서 볼 수 없었던 간 화선 수행자들의 태도를 문제 삼고 잘못을 적나라하게 지적했다는 점에서 이채롭 기까지 했다.
이날 한 스님은“선 수행자들이 무턱대고 앉아만 있는 것은 문제”라며 수행자들의 수행 태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또 다른 학자는 “선은 모든 권위와 관념을 타파하는 것인데 지금은 오래 앉아 있는 것이 훈장처럼 간주된다”면서 오래 앉아 있기에 능통한 기술자가 대접받는 현실을 꼬집었다.
간화선의 핵심은 두말할 것도 없이 화두 타파를 통한 깨달음 증득에 있다. 그러나 출·재가를 막론하고 “선방에 앉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드는 수행자가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는 의심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심지어 “선방에서 간화선을 하는지 염불선이나 위빠사나를 하는지 알 수 없으며, 몇 해가 지나도 도인은 나오지 않고 오로지 앉아 있는 기술만 늘고 있다”고 자조 섞인 심경을 토로하는 수좌도 있었다. 재가불자들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구참 재가선객들은“화두를 받아 들기는 했으나, 지도 점검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지 못한 채 그저 앉아 있는 시간만 늘려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재가선방 풍경을 전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수행자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전하는 말은 불교계 전반에 널리 퍼진“우리시대 선지식이 없다”는 자조와 맥을 같이 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사실선 수행을 해보겠다고 발심한 사람들이 늘어 나고 있어도, 그들이 참선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논리적으로 배울 수 있는 스승을 만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참선은 어렵고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불교 역사에서 몇 년‘장좌불와’ 를 했다거나, 열반에 들 때‘좌탈입망’을 했다는 등의 일화를 남긴 스승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스승들은 선 수행자들에게 수행의 본보기가 되어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도 그 스님들처럼 해 보겠다”는 원을 세우고 수행하고 있다면 한번쯤 되돌아 봐야 할 일이 있다.
과연 그 스님들이 그저 오래도록 앉아 있기만 하는 기술(?) 하나로 몇 년 장좌불와를 하고, 좌탈입망을 했겠는가. 아니다. 스승들은 참선이라는 방편에 집착하지 않고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었기에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 없이 많은 참선 수행자들이 좌복을 펴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그리고 은산철벽을 뚫고도 남을 듯한 그 모습을 볼 때면 언제나 한국불교의 희망이 살아 숨 쉬는 곳이라는 믿음으로 감동을 느끼곤 했다. 다만, 혹여라도 목적은 잊은 채 앉아 있는 것만이 공부이고 진리라고 집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방편에 집착하지 않고 목적에 충실할 때 진정한 선의 황금시대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