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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한결같은 마음, 환희지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언제부터인가 사찰을 찾아오는 불자들을 볼 때마다 맑고 밝고 깨끗한 마음에서 향기롭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출가한 지 40년이 지났는데, 그러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이제야 《화엄경(華嚴經)》 십지품(十地品)의 환희지(歡喜地)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어떤 할머니가 머리에 짐을 한 보따리 이고 시골길을 걸어가는데 지나가던 차가 할머니 앞에 서더니 태워주더랍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얼마나 고마웠던지 자동차에 타서도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갔답니다. 차를 태워준 분이 불편할 터이니 내려놓고 편히 가라고 해도 안 내려놓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더랍니다. 자기만 타고 가는 것도 고마운데 짐까지 태우고 가기가 미안해서….
이 할머니를 어리석다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자비심이 가득하다고 해야 합니까? 나는 그 할머니를 어리석다고 생각 안합니다.
세속적으로 보면 그 할머니는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화엄경》의 세계에서 보면 보살처럼 보입니다.


보살의 복과 지혜와 도를 돕는 일을 구족하여 중생을 이익하게 하되 다하지 아니하며, 일체 보살의 지혜의 방편과 필경의 저 언덕에 이르렀으며, 일부러 나고 죽는 것과 열반에 들어가지만 - 열반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자리에 들어가지만 - 보살의 수행을 그만두지 아니하며…, 부처님의 제자인 수없는 보살들이 해오고 있는 일입니다. 거기에 금강당보살(金剛幢菩薩)이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을 받들어서 보살대지혜광명(菩薩大智慧光明)의 삼매(三昧)에 들어있습니다.
우리말 가운데 세 살 먹은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눈여겨보면 세상에 스승 아닌 이가 어디 있고, 안목 있는 눈으로 보면, 잘못하는 사람을 경계로 삼으면 그 사람도 스승인데 하물며 잘 사는 사람들의 그 모습을 닮아가고자 노력을 하는 것이 어찌 스승의 가르침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화엄경》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물질의 현상을 크게 나누어 사대(四大)를 공식으로 말하고 밀교에서는 지수화풍공견식(地水火風空見識)이라는 칠대(七大)로도 말을 합니다.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세계로부터 수없는 불보살님들이 오시는데 《능엄경(楞嚴經)》에서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어둡고 침침한 허공과 만나서 부딪히고 요동치고 흔들리다가 바람기운이 생기고 그 마찰력에서 불기운이 생기고 그 따뜻함으로 녹은 건 물기운이 되고 굳은 것은 땅기운이 되었다고 세상의 현상을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과학자들의 이론을 빌리자면, 암흑, 즉 어둠이라고 하는 물질과 암흑이라는 에너지의 작용이 크다고 합니다.
미국에 갈 일이 있어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 상공을 지나가고 있는데, 그 때가 마침 한밤중이었는데도 승무원들이 창문을 덮개로 덮어 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됐습니다. 비행기가 1만 미터 이상 올라갔으니까 낮같으면 직사광선이 들어올까 봐서 덮개를 덮는다고 생각했겠지만, 한 밤중에 왜 덮개를 덮느냐는 생각 때문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창문의 덮개를 열어보니까 꼭두새벽의 시간이었는데도, 허공은 환한 대낮만큼이나 어둠이라는 빛이 강하게 작용하는 걸 느꼈습니다.
과학자들은 또 우주가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의 눈으로는 우주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 시절에 나는 오대양 육대주에 담겨져 있는 물을 지구에서 물꼬를 터서 확 쏟아 부으면 허공에서 어떻게 느낄까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또 땅속에서 용암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데, 그것을 고름 짜듯이 허공에다가 퍼 부으면 다른 별세계에서는 이 광경을 뭐라고 얘기할까를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에 대한 이론을 들어보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화장장엄세계(華藏莊嚴世界)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주가 폭발하고 빅뱅이 이루어지고, 우주가 또 다른 우주와 부딪치고, 태양계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는 블랙홀 등등 …
부처님께서 설하신 우주의 생성과정을 예를 들어보자면 아이들이 비눗방울 가지고 노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눗방울이 방울방울 허공에 떠도는 것처럼 여기는 지구, 여기는 태양, 여기는 무슨 별 …. 마치 점막으로 이뤄져 있는 것을 우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것들이 중첩되고 진진(塵塵) 무진(無盡) 무진의(無盡意) 찰찰(刹刹)로 헤아릴 수 없는 우주라 하더라도 하나가 보고 있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허공이라는 개념이나,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라는 개념은 비눗방울처럼 터지기도 하지만 점점 그 속에 있는 공기가 줄어드는 것처럼, 우주라는 것도, 은하계라는 것도, 지구라는 것도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진진찰찰로 이뤄져있다는 그 세계 속에 작가 이우성의 《정말 소중한 것은 한 뼘 곁에 있다》는 책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시를 인용해 봅니다.


나는 결국 나 혼자 사는 게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들. 밥상에 반찬으로 올라와 있는 것들. 심지어 내가 마시는 물도 저 시냇물의 물 한 방울이고 내가 마시는 이 공기도 나무들이 밤새도록 내뿜은 산소 한 모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몸을 살찌우는 곡식과 채소들이 저 들판에서 나왔다는걸 아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내 의식은 자연의 자양분을 얻었습니다.


화엄세계에서는 바닷물을 찍어서 혀끝에 대보고도 맛을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시를 통해서도 충분히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화엄경》은 간단히 말하면 신해행증(信解行證)입니다. 바로 믿고 바로 이해하고 바로 실천하고 바른 도리를 증득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공부입니다. 내 것으로 만드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을 통해서 십회향(十廻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는 신지행득(信知行得)이라고 했습니다. 믿고 알고 행하면 얻는다는 것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얻는다는 확신과 믿음을 줬습니다. 원하는 바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념을 철저하게 각인시켜 줬습니다.
이것이 화엄세계에 오면 신해행증(信解行證)입니다. 아는 게 아니고 이해하고 해결하고 앞장서고 풀어 나갈 수 있는 그것을 믿고 이해해서 보살행을 하면 증득된다는 것입니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 한걸음씩 무소의 뿔처럼 걷게 되면 그 장소에 도착할 것입니다. “너 출가하면 거기에 도착할 수 있어?”라고 되물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살행을 닦으면 선근이 이루어진다”는 그런 믿음을 확실하게 알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즉, 십신에서는 올바른 믿음을 성취시켜주고, 십주에서는 올바른 이해를 가르쳤고, 십행에서는 올바른 실천, 즉 자기의 이익됨을 위한 보살행을 하도록 했다면 십회향에서는 이타행을 하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유한 사람은 절대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불자들이여, 무엇이 열인가. 하나는 환희지(歡喜地)며, 둘은 이구지(離垢地)며, 셋은 발광지(發光地)며, 넷은 염혜지(焰慧地)요, 다섯은 난승지(難勝地)며, 여섯은 현전지(現前地)요, 일곱은 원행지(遠行地)며, 여덟은 부동지(不動地)며, 아홉은 선혜지(善慧地)며, 열은 법운지(法雲地)이니라.』


저는 날마다 오늘처럼 기분이 화사해서 환희지에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보니까 복도 없고 그릇도 조그마한 것들이 물질의 풍요 속에 넘치게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안주하려고 하다 결국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마치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고 살다가 어느 날 그것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후회를 하고 괴롭다고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이것이 왜 생겼을까?” 하고 들여다보면 무지몽매한 무명으로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무명(無明)의 얼굴입니다. 연기법(緣起法)으로 보면 무명(無明) 행(行) 식(識)이 내 곁을 떠나지 않아도 그 스스로가 떠납니다. 금은보화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으면 뭐 합니까? 그 놈이 안 떠나면 내가 떠납니다.
어느 날 내 스스로가 떠나야 되는 그런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물질적 존재에 깃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실상이나 인생팔고(人生八苦)가 나타나는 허망함을 깨달아야만 어떤 재앙이나 고통이 닥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오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참 자유를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통해서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양 미간으로 백호광명(白毫光明)을 보이니까 금강장보살이 해탈월보살의 권청에 의해서 법문을 하게 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불자들이여, 보살이 이러한 큰 원을 내고, 이익 되게 하는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과 따라 순종하는 마음과 고요한 마음과 조복하는 마음과 적멸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과 윤택한 마음과 동하지 않는 마음과 흐리지 않은 마음을 얻느니라.
…
불자들아, 앞에 있는 두 가지 거두어 주는 법으로 중생을 포섭하나니, 보시하는 것과 좋은 말하는 것이요, 뒤에 있는 두 가지 거두어 주는 법은 다만 믿고 아는 힘으로 행하거니와, 잘 통달하지는 못하느니라. 이것이 보살의 십바라밀 중에 보시바라밀다가 더 많은 것이니, 다른 바라밀다를 닦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을 따르고 분한을 따를 뿐이니라.』


굳이 성문소승(聲聞小乘)이나 연각중승(緣覺中乘)이나 보살대승(菩薩大乘)이라는 삼승(三乘)의 법문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원효(元曉)대사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만 보아도 그 이치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있다고 할까, 아니 한결같은 목숨이 텅 비어 있고,
없다고 할까, 아니 만물이 다 여기로부터 나오네.
그것은 광활한 것이다.
대허공과 같이 사(私)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평등한 것이다.
큰 바다와 같이 공평한 것이다.
그것을 일컬어 도리 아닌 지극한 도리라 하며,
그것을 일컬어 긍정 아닌 대긍정이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목격한 대장부가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언설을 넘어선 대승을 논(論)하고,
사려가 끊긴 대승에 깊은 믿음을 일으키게 할 수 있으랴.”


화엄의 세계에서 말하고자하는 그 마음이 광대무변한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서명숙의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이라는 책에 보면 「그때는 몰랐다」는 시가 있는데, 오늘의 법문을 하면서 공감되는 바가 있습니다.


그때는 몰랐다.
길을 걷는다는 것과
길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일인가를.
사람들은 간혹 내게 묻는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사니까 정말 행복하겠다고.
정말 보람있겠다고.
얼마나 좋으냐고. 근심걱정이 없겠다고.
얼추 맞는 말이다. 행복하고, 보람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길을 내면서도
나는 종종 외로워하고,
때로 분노하고, 절망한다.
사랑에 대한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