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범
숲해설가
겨울, 온 산의 나무들은 자신의 무성했던 치장들을 훌훌 벗어 버리고 서 있다. 앙상한 피골로 영하의 날씨에도 모진 칼바람을 맞으며 그 자리를 버티고 있다.
지난 여름 많은 잎들은 나의 옷이 아니었구나. 힘찼던 동화작용은 나만의 피가 아니었구나. 한 겹 두 겹 옷을 껴입는 계절에 비로소 미련 없는 이별에 익숙하구나. 웅크리고 오그리는 계절에서야 오히려 당당하구나.
겨울나무 앞에 서면, 한 시절 함께한 혈육을 미련 없이 보내고 제 한 몸만 오롯한 겨울나무 앞에 서면 우리는 더욱 작아진다. 겨울나무는 영혼을 팔아 예복을 차려 입지 않고 무성했던 지난날들을 되새김질 하지 않는다. 입은 인간의 몸이 벗은 나무 앞에서 그저 초라하다. 명품이 계급장이나 되는 것처럼 내세워 보지만 명찰도 없는 겨울나무 앞에 서면 부질없다. 그는 오직 묵언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가 누구는 꿈만 같고 기적이라 하고 누구는 천민자본주의일 뿐이라고 한다. 고착된 가치를 수정할 기미도, 참회를 고백할 용기도 없이 분노하는 눈빛만 맵게 변해간다. 주름이 늘고 머리가 굳어지고 있음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는 중에도 나무는 묵묵히 속살에 금을 새긴다. 겨울을 거쳐야 수행의 이력 같은 가는 선이 새겨진다. 겨울을 모르는 나무에게는 나이테가 없다. 영하의 날씨 속에 벗은 몸으로 한철을 보내야만 비로소 얻을 수가 있다. 겉으로 드러내고 과시하지도 않고 속으로 쌓여간다. 몸통을 잘라내고야 촘촘히 새겨진 그 내공을 드러낸다. 인고의 시간이다.
‘무소유’를 읽고 감격하고 무소유를 말하지만 언제 우리가 무소유인 적이 있었던가. 방에 앉아서 바깥이 궁금하고 밖에 나가선 아랫목을 그리워한다. 가구가 집을 점령하니 운신이 불편하다. 옷은 왜 그리 쌓이는가. 한 벌밖에 걸치지 못할 몸인데 옷장이 비좁다. 애물단지는 이런 것을 두고 부르는 이름일 터이다.
부산을 떨며 만인의 눈물로 길을 적시며 적멸로 향할 때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침묵으로 온존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의 이름이 흔적조차 없어질 때 나무도 서서히 적멸을 맞을 것이다. 우리 몸은 한 줌 재가 되지만 나무는 고사목이 되어 벌레의 자양분이 되고 집이 되고 흙의 거름이 될 것이다.
겨울나무 앞에 서면 무성함보다 앙상함이 더 엄숙함을 알게 된다.
겨울이 아니어도 비움을 생각하게 하는 나무는 대나무가 아닐까
대나무는 자라면서 속을 비운다. 살과 근육, 지식과 재산, 명예와 욕심으로 속을 차곡차곡 채우는 것이 동식물이 살아가는 방식인데 대나무는 다르다. 실속을 채운다는 말이 대나무에게는 무색하다. 짧은 죽순 시기에는 아삭한 속살이 있지만 이도 잠시뿐 이내 속을 텅텅 비우면서 자신의 몸을 키운다.
속을 비우고 꼿꼿한 자세로 하늘을 향해 거침없다. 저마다 음흉한 계략을 꾸밀 때도 오직 당당하고 올곧다. 번잡한 잔가지도 만들지 않는다.
곧다고 경직되지도 않다. 오직 곧기만 하다면 쓸모가 적다. 휠 줄 안다. 강직과 유연을 다 갖추고 있으니 그 기품이 가상하다.
직선으로 곧은 대나무지만 휠 줄 알기에 유용한 도구가 된다. 곧음의 반대 즉 굽음은 왜곡, 곡해 등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하모니를 이루는 오케스트라의 원천은 작곡이다. 굽음은 직선과 달리 원을 만들 수 있다. 원융무애의 경지에 이룰 수 있는 것은 곡의 미덕 때문이다. 동그라미는 비굴과 변절의 조합이 아니다.
만다라의 기본구도는 사각형과 원이다.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통해 최고의 미학과 가치를 창출한다.
대나무는 겨울에도 푸른 잎을 지니고 있으며 속은 비어 있으나 곧게 자라기 때문에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대쪽 같다’라는 말은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굳게 지킨다는 것으로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다.
대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송죽으로 즐겨 부른다. 또한 사군자와 십장생의 하나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대나무를 심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신라 최치원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송죽을 심으며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시대에 쓰여진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도 대나무에 대한 표현이 많이 나온다.
조선시대 고산 윤선도는 다섯 벗을 두었는데 그중 하나가 대나무다. 그를 노래한 오우가五友歌를 보자.
 나의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이 오르니 그것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하도 많다
 좋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 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빨리 지고
 물은 어이하여 푸르다가 누르는가
 아미도 변치 않는 건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우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 모르는가
 구천에 뿌리 곧은 줄 그로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 한 것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갑진년 새해다.
 화려한 성하의 여름보다는 나목의 겨울을.
속을 꽉 채우기 보다는 항상 비우면서도 고귀한 자태로 품위를 잃지 않는 대나무처럼 살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