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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 거리를 넘어 만나고 있는 화쟁사상

최윤필 / 한국일보 기자

바람이 시작되는 지구의 먼 변방이 있어
, 거기 굼벵이 한 마리가 어느 달빛 좋은 밤에 산보를 나갔다고 하자. 그 작고 여린 몸뚱이의 꼬물거림이 적요한 대기를 흔들어 굼벵이 몸의 궤적만큼 완만하고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고 하자. 파동은 공기 속으로 서서히 퍼져 수백 리쯤 떨어진 어느 마을에 기분 좋은 산들바람을 선물할 수도 있고, 수천 리 바깥의 어떤 마을에서는 널어놓은 빨래를 날려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은 동력을 잃고 잦아들 수도 있고, 기세를 더해 큰 바다를 채찍질해 벼랑보다 높은 파도를 일으킬 지도 모른다. 70년쯤 전, 기상학자 로렌츠는 ‘나비효과’라는 이론으로 기상 변화의 저 같은 불확정성을 구명했다. 요컨대 그는 ‘원리’를 찾고자 했다. 반면에 먹고 사는 게 바빴던 북구의 어느 옛 바이킹 부족은 원리보다는 현상에 주목했다. 그들은 요람처럼 아늑하게 돛배를 흔들어주는 바다와, 성채만한 범선을 뒤집어 엎기도 하는 파랑(波浪)의 바다에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 개별화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던 그들에게 ‘바다’라는 말은 너무 성근 단어였던 것이다.


언어가 복잡해진다는 것은 삶의 직물이 보다 촘촘해지고, 다양한 소재의 피륙들이 짜깁기된다는 의미다. 바이킹의 시대를 거쳐 먼 항해를 이어오면서 인간계는 복잡해졌고, 의식주를 넘어선 수요의 질량과 공급시스템의 다양성으로 문명화의 정도를 가늠하는 시대가 됐다. 새로운 수요는 새로운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낯선 욕망들이 용틀임하며 일어서고 무리 짓고 엉키고 부딪치는 그 혼돈 속에서 밭은 호흡을 이어가고 있다. 이를, 로렌츠와 바이킹의 경우처럼, 본질과 현상의 대립항 속에 모조리 쓸어 담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바이킹이 누비던 미개의 바다와 핵 구동 엔진이 누비는 문명의 바다를 대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이킹에게 바다는 신의 바다, 경외의 바다였다. 그들은 철 따라 제물을 바치며 해신의 노여움을 달래야 했다. 신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오늘의 바다는 분석의 대상이다. 과학의 후예들에게 현상은 껍질일 뿐, 오직 중요한 것은 변함없이 본질이고 원리이다.


길항하는 두 바다의 보이지 않는 경계에 또 하나의 거대한 바다가 있다. 본질을 알지 못해 미지의 두려움이 너울지는 바다도 아니고, 본질만을 향해 육박해 드는 거만한 과학의 바다도 아닌, 본질과 현상이 조화롭게 일렁이는 바다가 있다. 신라의 고승 원효(617~686)가 바라본 바다, 화쟁(和諍)의 바다다. 그는 현상의 차이를 알았고 감각의 허술함을 깨달은 존재였지만, 깨달음의 이름으로 비웃지도 무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차이를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다독였다. 또 그는 본질을 외면하지 않았다. 저술 <대승기신론소>에 그가 ‘마치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니 파도와 바다는 둘이 아니다. 우리는 일심(一心)에도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이 동시에 있을 수 있으나 이 역시 둘이 아닌 하나이다’라 적을 때, 그는 깨달은 자의 겸허함으로 가난한 감각의 영혼을 따사롭게 포섭했다. 그리고 신라불교, 나아가 한국 불교의 대중화에 거대한 반석을 놓았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원효 사상의 근본인 화쟁은 “화해(和解)와 회통(會通)의 논리체계를 이르는 말로, 원효로부터 시작되어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이어 내려온 사상으로, 연기론(緣起論)과 실상론(實相論)을 바탕으로 하여 특정한 교설이나 학설을 고집하지 않고 비판과 분석을 통해 보다 높은 가치를 이끌어내는 사상”이다. 그리스에 연원을 둔 서양철학 사유의 거대한 뿌리인 변증법, 곧 모순과 대립을 통해 논리의 한 층을 더 높이는 정반합의 원리와 원효의 화쟁은 그 아스라한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넘어 저렇게 만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2일,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자승 총무원장이 ‘종단 4개년 발전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저 화쟁의 기치를 다시 높이 들었다. “진보와 보수, 노와 사, 남과 북, 정부와 NGO 등 각종 사회적 이견과 갈등을 화쟁하는 역할을 수행하고자 합니다.”자승 스님은 산들바람처럼 고요한 어조로 “사회에 대립과 갈등이 있는데도 종단이 내면적인 문제에 치중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더 이상 소가 닭 보듯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로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라 덧붙였다. 대한불교 조계종이. 아니 2000년이라는 광활한 시간의 바다를 항해해 온 한국 불교의 거대한 함선이 이제 비로소 원효의 바다, 화쟁의 바다로 키를 돌리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이는 결코 4년이라는 짧은 임기를 맡은 조계종 총무원장의 계획으로 왜소화해서는 안 될 한국 불교의 전기라 나는 여기고 싶다. 한국 현대사와 그 질곡의 역사를 맨몸으로 헤쳐 나온 이 시대의 서민들은, 1400년 전 원효의 서민들이 그러했듯, 한국 불교가 화쟁의 바다에서 선봉에 서줄 것을 갈망해왔고, 그 갈망은 점점 더 부풀어 어쩌면 지탱하기 힘든 압력에 짓눌려왔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승스님의 표현은 다소 우둘투둘하지만, 그간 한국 불교는 태고의 바이킹들이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봤던 바다의 현상을 ‘소가 닭 보듯’해온 경향이 농후했던 게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종교는 인간의 영혼에 개입하는 가장 느린 정신의 메커니즘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추억이 될지 모를 서울광장 시민들의 영혼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잘못된 정치와 행정에 대해, 잘못된 경제 사회에 대해, 그리고 병든 문화에 대해, 종교의 이름으로 현장에서 곧장 머리띠 두르고 주먹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내가 아는 종교는 인간의 영혼에 가장 깊이 개입하고, 가장 오래 지속되는 메커니즘이다. 그래서 종교는 강력하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종교를 영혼의 궁극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여긴다.


종교가 가리키는 길이 항상 옳았다고는 말하기 힘들 것이다. 십자가 뒤에 추한 욕심을 감춘 채 수백 년 동안 살육의 전쟁을 일으킨 것도 종교였고, 숱한 애먼 사람을 마녀로 낙인 찍어 기름 먹인 장작더미 위에 세운 것도 종교였다. 한국 불교 역시 현실 정치와 사회 안에서 옳지 않은 길을 택해 세상을 힘들게 한 예가 드물지 않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안다. 당대의 우리가 경험한 한국 불교, 자승 스님의 표현을 다시 옮겨 세상을 ‘소 닭 보듯’하며 내면의 깨달음으로 치달아온 관행이 그 같은 불교의 병폐를 저어한 데 따른 자성적 움츠림이었다면, 그 세월이 너무 길었노라고, 세상은 오래 전부터 기다림에 기진(氣盡)해가고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