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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황야에서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중생을 나의 혈육과 같이 대하리.
말법의 중생을 이끄는 스승들께
간청을 드리네.
지혜와 설법의 위대한 승리자에게
예경을 올리오니
희유한 연기의 가르침에 귀의하리라.


“윤회에 끝이 있습니까? 윤회에 끝이 없습니까? 달라이라마는 이 높고 화려한 법좌에 영원히 앉아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달라이라마 역시 한 치도 역행할 수 없는 무상한 존재이며 시대의 연기적 산물일 뿐입니다. 당신에게 붓다의 가피란 과연 무엇입니까.”


총카파 대사의 논저 <보리도차제론>을 중심으로 3년차 람림법회를 주관하고 있는 14대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0). 4만 여에 달하는 겔룩빠 소속 승려들과 전 세계의 불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2014년 12월 23~29일까지 일주일간 남인도 문곳 간덴장체 사원에서 법문이 열렸다. 법회 기간 중 사원을 방문한 까르나따까 주정부 주지사와 관광부장관은 문곳을 작은 티베트(Little Tibet)로 지정하여 종교 순례 관광 지구로 활성화 시킬 것을 공약하면서 앞으로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의 수학을 희망하는 불자들에게 폭넓은 해택이 주어질 것을 기대했다.
달라이라마는 법회를 열며, 최근 ‘뉴 카담 불교’의 이름으로 반 달라이라마 활동을 벌이고 있는 슉덴의 문제를 지적하고, 사원 운영 체제에 관한 자정 쇄신을 당부했다. 잉글랜드에 본거지를 두고 게쉬 캘상 갸초를 스승으로 전 세계에 그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는 슉덴은 이미 한국에 정착했으며 그 기반을 다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티베트불교를 수학하는 한국인 불자들 사이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지적받고 있다. 말레이시아에 근거를 둔 슉덴 단체의 웹 사이트는 이미 한역되어 한국의 인터넷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반 달라이라마 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페이스북의
‘카담불교’ 명으로 마음 치유를 위한 명상지도 카페로 가장하여 슉덴의 명칭을 드러내지 않은 채 광고를 내어 회원 수를 늘이는 것이 그것이다. 이미 인도정부와 미국정부는 달라이라마의 위협 세력이 중국이 아닌 슉덴 추종 단체인 것을 인정하였고, 법회 기간 동안 슉덴사원 인근을 통제하는 등 원활한 법회 진행을 위해 경찰 공권력을 투입하기도 해 달라이라마와 겔룩빠가 처한 뿌리 깊은 현안을 실감케 했다.
달라이라마 본인이 1959년 인도 망명 이전까지 호법신장으로서 슉덴을 신봉해 왔던 바 이 사태의 해결 과제는 본인의 임무라고 이미 표명한 바 있다. 달라이라마의 스승인 역대 링 린포체의 권고로 슉덴을 이단으로 결론지은 이후로 달라이라마는 1997년 6월 13일자로 슉덴 신앙을 인정하지 않을 것을 만인에게 공포하였다. 이어서 슉덴을 신봉해온 티베트인들에게 탈퇴할 것을 지속적으로 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슉덴 단체가 활동 중인 것은 슉덴 내부적으로 믿음을 거역한 바에 대한 신장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과 중국 종교 관련 단체의 슉덴 활동 지원을 받는 바에 관한 두 가지의 경우를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달라이라마는 미국에 주석하고 있는 현 티장 린포체를 수차례 회유하여 슉덴 신앙을 멈출 것을 청한 바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장 린포체 측은 역대 카담의 전통을 따라 여전히 슉덴을 신봉할 것을 고수하고 있으며 현 티장 린포체가 승려의 삶을 접고 환속한 바에 대해서 달라이라마는 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제가 법문을 함에 있어 입만 열면 공성이라고 말한다고 생각할 런지 모르겠습니다. 저 스스로도 현재 보리도 차제의 수위를 점검한다면 결코 “지관쌍수를 체득했노라”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내면의 나라고 집착하는 그 무엇을 해체하는 열쇠는 오직 공성뿐입니다. 깨달음의 근거가 되는 대승의 발심이 되는 자량도로서 쫑카파 대사의 <입중론 주석>을 수학하십시오. 공성을 체득하겠노라는 일념으로 용수보살의 <중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이전에 불호 논사의 <불호논>을 수학해야 하며 또 그 이전에는 <입중론>을 그리고 그 이전에 봐야 하는 것이 바로 쫑카파 대사의 <입중론 주석>입니다. 문사수의 삼학 정진을 통해서 번뇌를 소멸시켜 가는 것이야 말로 수행의 큰 방편 가운데 중심축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하여 내가 붓다를 성취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바람을 마중물로 한 서원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차제로 이어집니다. 여섯 바라밀과 사섭법으로서 불법을 수학함에 나태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의 실체를 보고 탐내고 성내는 마음으로부터 무상을 사유해갑니다.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대함에 귀한 인간의 몸을 씨앗으로 여겨 붓다의 과에 이르도록 지극한 서원으로 실천해 가는 것이 바로 보리도입니다.
어머니가 지닌 은혜로운 마음으로 모든 중생의 행복을 구하나 막상 행복을 위한 선한 업을 지으려 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근본 스승이신 석가모니 붓다를 위시하여 법을 수행함에 스스로가 지닌 번뇌를 멸하면서 성숙시켜 나갈 수 있는 조력이 있어야 합니다. 반야부의 가르침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서 현관공성과 은희차제에 의해 전수되어 왔습니다. 그것을 혹자는 비밀불교라고 칭하지만 이는 그릇된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법의 계승에 관한 측면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고 신비롭기에 이를 비밀로 표현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철저한 근기에 준한 법맥의 승계이기에 은희차제인 것입니다. 이 모든 법통은 아띠샤 존자의 가르침으로 모두 응축되었고 명료한 단어로 ‘보리도’라고 수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현교와 밀교를 아우르는 금강승의 가르침으로 체계를 갖춤에 그 결정체가 바로 <보리도 차제론>이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 요즘에 들어 여든의 노장 달라이라마를 염려하는 세간의 소식들을 듣습니다. 나는 말합니다. “사람들의 소명만이 15대 달라이라마를 현실화 시킬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요즘 들어 뼈있는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입니다만, 현 14대를 끝으로 지금까지 계승 되어온 달라이라마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전한 것도 티베트인들과 티베트 불교도들이 공의 실상을 여실히 보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14대 달라이라마는 유래 없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히 우려컨대 15대 달라이라마가 행이 곧지 못하여 악명을 남기거나 대중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달라이라마는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기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진심으로 우려되어 달라이라마 환생제도를 14대로 끝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경우의 수를 거론한 바 있습니다.
티베트는 붓다의 법을 수호하는 민족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마음과 지혜를 보존하고자 하는 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디 티베트 불교 내의 분리된 종파성에 치우쳐 수행 역시 분별하지 마십시오. 부디 타성에 젖어 스스로 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우쭐해 하지 마십시오. 겔룩빠를 상징하는 황색의 기다란 모자를 쓴 모양새가 거만해 보이고 또한 각 파 별로 그 색깔이 노랗고 붉어 차별이 있다고 여겨 각자 자기들의 사상 체계만이 최고라고 우기는 실수를 범하지 마십시오.
붓다의 가피란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 봅니다. 우리의 근본 스승이신 붓다의 말씀에 의지하여 무지로 인한 번뇌를 멸함에 선한 동기로서 오늘을 살도록 하는 힘이 되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오늘날 물질을 중요시 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붓다의 가르침이 지닌 핵심인 연기의 공성을 바르게 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날란다 승원의 전통을 따르는 대승불교 국가에서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진여 공성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발심을 일으켜 보살이 되고 그리고 붓다를 성취하는 지혜를 거듭 향상시켜 나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심오한 공성의 지혜는 일체 종지를 성취하는 지혜와 다르지 않습니다.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붓다를 정각하신 역대의 선지식분들은 번뇌의 무지를 타파하는 길을 보이셨습니다. 무명을 깨는 법의 검 취모리는 오직 하나, 연기 공성의 지혜뿐입니다. 색수상행식의 오온조차도 공함을 여실히 봐야 할 것입니다.
실체를 보세요. 비유법으로서 수레를 예로 들어 보임에, 각 일곱 가지의 부속이 그 자체로 수레가 아닌 실상을 보세요. 이름을 지닌 대상에 본질이 있던가요. 그 이름에 부합하는 실체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자성이라는 것이 ‘없음’의 상태로 빠지면 허무해집니다. 자성으로서 있지 않음을 보며 단지 이름이 붙여진 것일 뿐임에 그 이름 또한 소리의 약속일뿐입니다. 비로소 ‘나’에서 공을 보고 윤회의 공함을 볼 때, 윤회의 황야에 서 있는 자성의 실체를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무상한 현상계에서 공의 도리로서 산다면 지금 순간의 희유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무상을 보고 전도된 사유와 착각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귀한 이생에 주어진 자신의 복을 무지라고 하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업은 스스로 없애고 변화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거짓 없이 복답게 사는 삶이 바로 바라밀 행의 시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리도차제론> 람림은 인간의 몸을 받은 바의 소중함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삶의 지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가연숙
omflower@gmail.com / www.gagy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