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호
후애마이(Who am I)연구소 소장·Blog.daum.net/hyun-jaeho
불자라면 무정설법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고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깨침을 위한 적극적인 이해를 도모하고자 이 글을 올립니다. 우선 소동파蘇東坡의 경험담을 통하여 무정설법을 잠시 엿보겠습니다.
유명한 문장가 소동파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시인 소동파는 고을 관직을 맡아 나갔습니다. 그 고을에는 상총선사라는 이름난 선승이 살고 있었는데 한번 그 경지를 겨루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찾아갔습니다. 통성명을 하는데 소동파라 말하지 않고,
“나는 칭秤가요.”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칭가라는 성이 없기에 “칭가라니요?” 하고 선사가 다시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동파가, “사람이 몇 근이나 되는지 달아보는 칭秤가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사는 “악!” 하고 할을 하면서, “이것이 몇 근이나 되는지 일러 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소동파는 문장가이기 때문에 말이나 글로 경지를 겨뤄 보리라 짐작하고 있었는데, 밑도 끝도 없이 외마디의 할을 하니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동파는 선사님께 청했습니다. “이 우매한 중생을 위해 법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러나 상총선사는 “유정 설법을 들어서 무얼하겠는가? 무정설법을 들을 줄 알아야지.” 하고 말했습니다.
소동파는 말로 설해지는 유정설법을 알아도 무정설법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시인 소동파는 그만 아득해져서 정신없이 말을 타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곳을 지날 때 갑자기 폭포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쏴’ 하고 들렸습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무정설법을 들은 것입니다. 이 때 환희에 넘쳐 깨친 소식을 전한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그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溪聲便是長廣舌 시냇물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장광설이요.
계성변시장광설
山色豈非淸淨身 산빛이 어찌 그대로 청정법신이 아니겠느냐.
산색기비청정신
夜來八萬四千偈 밤새 들은 팔만사천법문의 그 소식을
야래팔만사천게
他日如何擧似人 뒷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타일여하거사인
극락정토에는 나무와 새가 설법을 한답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무정설법을 들으면 여기가 극락정토입니다. 단지 필요한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출처 : 대한불교청년회 장경각 중에서
1구는 부처의 32상 중에 12번째 언급되는 장광설長廣舌입니다. (상相을 표현)
2구는 부처중의 부처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 청정신淸淨身입니다. (체體를 표현)
3구는 우매함 속에 깨친 무정설법을 팔만경에 비하였습니다.(용用을 표현)
4구에서는 이러한 무정설법의 체상용을 어떻게 전달할까 하는 자신의 마음을 그렸습니다.
무정설법을 이해시켜주는 멋진 시詩입니다. 게다가 불가의 가르침인 체상용體相用을 순간 적용한 소동파의 지혜와 불심佛心에 그저 탄복할 따름입니다.
이어서, 나옹선사가 깨침과 함께 누진통을 얻은 후 지은 시를 소개합니다.
無端逐步到溪邊 무단히 걸음 따라 시냇가에 이르니
무단축보도계변
流水冷冷自說禪 물소리 냉랭하게 저절로 선을 설하네
류수랭랭자설선
遇物遇緣眞體現 만나는 사물이나 만나는 일들이 참모습 드러내니
우물우연진체현
何論空劫未生前 공겁이전 소식과 부모미생전 소식을 논할 것이 없어라
하론공겁미생전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高麗) 선사禪師의 선시禪詩 중에서(누진통漏盡通: 육신통六神通 중의 하나로써 자신 또는 상대의 과거와 미래를 보는 신통력)
1구 : 무단축보도계변 無端逐步到溪邊
쉼 없는 공부와 수행 정진을 하다 보니 자연의 소리가 수행의 궁극임을 알았네
수많은 경전을 외우고 내 것이 되었다 생각 했거늘 그것은 다 유정有情이었단 말인가?
이 작은 시냇물이 내게 법을 설해 주는구나. 아… 이것이 무정설법이던가?
2구 : 유수랭랭자설선 流水冷冷自說禪
이 작은 시냇물의 내게 세상 이치를 말해주는구나
수 천년 자리를 지킨 시냇물을 내 평생 읽은 경전 공부로 어찌 이해할꼬
그토록 찾던 진리가 매일 보던 이 시냇물에 있음을 이제 알았네
 
3구 : 우물우연진체현 遇物遇緣眞體現
모든 사물과의 만남도 인연이었구나
사물도 사람도 그 모든 것이 모두 같음이요, 그러함이 진리의 참 모습이었구나
이제 알겠네, 저 풀잎과 내가, 저 시냇물과 내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4구 : 하논공겁미생전 何論空劫未生前
시방삼세가 하나임을 이제 알았네(시방: 공간개념, 삼세: 시간개념)
자연의 진리 앞에서는 시공(시간과 공간)의 개념도 없어라
내 고향이 내 부모요, 무시(無始: 헤아릴 수 없는 끝없는 과거)의 세계에 모두가 하나였거늘…
1구에서는 무정無情과의 만남을, 2구에서는 무정無情의 소리를, 3구에서는 무정無情의 진실을, 그리고 4구에서는 <법성게>에서 말하듯 삼세(전세, 현세, 내세)가 혼재 되어 과거와 미래가 뒤엉켜 있으니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지 말라는 것처럼 (삼세의 시간적 개념과 시방의 공간적 개념을 망라하여) 시공의 개념을 재 정립 합니다. 이와 같이 본 시詩는 무정설법을 시사하면서 궁극적으로 시공의 개념 정리로 마무리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3구 부분입니다. 3구를 통해서 무정설법의 기본을 다질 수 있기 때문이죠.
이유인즉, 3구에서 물物을 거론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물物의 이해를 위하여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이야기를 잠시 들춰내야겠습니다. <제물론>에서 장자는 물화物化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물物은 사물을 뜻하겠습니다만, 화化는 무엇일까요?
1. 장자의 물화物化
화化는 본디 사람 인人 + 비수 비匕 입니다. 비수 비는 한 존재의 죽음, 없어짐을 뜻합니다. 화는 사람 인人과의 조합으로써, 결국 스스로의 죽음(자살)을 통하여 새로운 것으로의 재탄생이 바로 화化입니다. 모든 원소들이 각자의 성질을 죽이고 상대를 만나 새로운 물질로 재탄생하는 것, 그런 내용을 가르치는 학문이 우리 학교 때 배우는 ‘화학化學’ 맞죠?
장자의 물화物化 이야기로 돌아가서, 물화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한낱 사물과 다를 것 없다는 의미에서, 사람을 사물과 동일시하여야 한다는 내용으로 ‘화化’라는 자字를 사용했습니다. 물화物化는 인간도 사물화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같다는 것
-  사람이 자연 위에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인간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것
-  자연의 흐름과 인간사의 흐름이 같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
-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이론, 그 어떤 설명도 자연의 흐름을 표현 할 수 없다는 것
-  자연의 흐름을 보고 배워야 인간의 삶도 원활해진다는 것
-  그래서…. 생각도, 말도, 행동도 자연의 이치에 맞게 해야 한다는 것
결국 물화物化란 일반 사물의 흐름을 바로 보고 인간 또한 사물과 같은 존재로 고려하고 사려해야 한다는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화에 대하여 이렇듯 짧게 요약해야 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불가에서 중요시 하는 무정설법은 일찍이 장자의 물화와 만나 정제되어 남선종을 이룬 후 중국에 정착 및 한국에 전달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상 장자의 사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거나, 그 뜻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면 불교의 전래가 끊어졌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나라 말엽에 시작된 불경 번역 사업은 위진 시기를 거쳐 수ㆍ당나라에 까지 이르면서 중국불교를 크게 번성하였으며 삼론종·법상종·천태종·선종 등 불교 학파가 생겨 맥을 이었고, 그 중에서도 선종(특히 남종선)은 중국의 도가道家와 인도 대승불교를 새롭게 결합함으로써 미학적 가치를 구비하였습니다. (한국에 전달된 불교도 남선종이 그 시발이죠)
장자(莊子 : 기원전 369년 ? ~ 기원전 286년)
저명한 중국 철학자로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노자老子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장자는 만물 일원론을 주창하였다.
어느 날 장자는 자기가 나비가 되어 훨훨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잠을 깨니 내가 꿈을 꾸고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을 꾸고 지금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장자는 이처럼 상식적인 사고방식에 의문을 품고 유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가르침 따위는 하잘것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노자의 생각을 이어받아 자연으로 돌아갈 것과 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호접지몽胡蝶之夢)…………  출처 : Wikipedia
2. 중국 미학美學에서의 초사楚辭
회초리 초楚 = 수풀 림林 + 짝 필疋
수풀 림은 자연을 뜻합니다만 문맥상 단순한 자연과 숲을 뜻하기보다는, 자연 그 자체의 내면적인 모습, 우거진 숲을 통하여 대 자연을 통칭 한다고 생각하여야겠습니다. 짝 필은 말(馬)을 헤아리는 단위이기도 하지만, (올)바르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규범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규범과 올바름은 같은 의미라 하겠습니다.
대자연을 뜻하는 ‘림林’과 바른 규범을 뜻하는 ‘필疋’이 합하여서 만드는 의미는 대 자연의 바른 가르침이겠습니다. 아울러 대 자연의 바른 가르침이 옳다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대 자연이 당연히 옳지 뭐”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초리 초楚는 대 자연의 냉철함, 명쾌함, 온당함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마魔’라고 치부하는 모든 것들이 모두 자연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함께 내포합니다. 따라서 ‘마魔’라고 느껴지는 무슨 일이 삶에 다가왔다면, 그것이 자연의 가르침(초楚)임을 단박에 알아채고 참회와 더불어 자연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대자연은 사람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인재人災로 인한 인위적 사고 또한 자연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한시 바삐 깨우쳐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무정설법이니까요)
또한 바람에 흩날리는 풀잎과 내 자신이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 또한 깨우쳐야 합니다. 이 깊은 의미를 깨치지 못한다면 무정설법을 기대 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두 개의 시에서 느끼셨듯이 진정한 진리의 깨우침은 대 자연의 무정설법으로 인하여 깨치는 것이지, 사람의 말과 책으로 전해지는 유정설법으로 깨치기는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물론 유정설법으로써 깨달음의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터득한 이론이 득도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지는 못합니다. 대 자연의 순리, 그것을 불가에서는 ‘법法’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물(水)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거去) 것을 보고 법이라 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법담法談을 나누는 모든 것은 진정한 무정설법을 알아채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초사라 함은 대자연의 이치를 가르치는 말 또는 학문을 뜻합니 다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말이나 학문은 사람이 느낀 것을 전하거나 기록한 것에 불과하죠. 진정한 초사는 대자연의 말씀입니다. 그 자체로서 가르침을 주거나, 대자연의 이런 저런 현상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연의 섭리를 일깨워 주기도 하지요. 그것이 진정한 초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면서 초사를 들은 경험이 있으신가요? 네 많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초사로 알아보지 못하는 우매함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어떤 물건의 존재와 가치를 모른다면 그 물건이 곁에 있어도 우리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는 속담처럼 말입니다. 우리를 가르치고자 자연은 많은 말(초사)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늘 외면 해 왔습니다. 그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바로 불가의 염려요, 장자의 한탄이었던 것입니다.
3. 자연의 가르침 무정설법
자연의 이치는 우리 스스로 이해하고 그 섭리를 깨쳐야 합니다. 어쩌면 자연에 속해 있는 우리로써 그 깨침은 당연히 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대 자연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이치를 알아채기를 바라지만, 때로는 능동적으로 가르치기 위하여 행동으로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삼재三災 = 수재水災 + 화재火災 + 풍재風災
폭우에 집이 잠기고, 불에 집이 전소되거나, 태풍에 집이 날아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의 계략으로 화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재人災지요. 이것도 자연현상입니다. 사람도 자연임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최근에는 인재도 포함하여 사재四災라고 말합니다.) 이런 가르침은 냉정하고 무섭습니다. 그러한 자연재해는 서럽고 한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와 같이 자연의 가르침은 날카롭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르침임을 우리는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대 자연은 제 마음대로 그렇게 우리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러한 큰 재해도 모두 우리가 만든 것입니다. 초사를 미리 알아챘다면 삼재, 아니 사재가 우리를 그렇게까지 괴롭히지 못할 테니까요.
초고압 전기를 만드는 바람에 대지(땅)의 전위電位를 변화시켜 번개와 벼락이 잦아지고, 원유와 생수를 너무 많이 땅에서 뽑아내는 바람에 지구의 질량이 줄어들고 땅이 갈라지는 등, 씽크홀이 생기고 더 나아가 지구의 고유진동주파수가 7.8Hz에서 8.3Hz로 변화하였습니다. 이로 인한 지구의 모든 속도는 빨라졌고, 생태계도 위협을 받고 있지요, 물론 쓰나미도 잦아졌고 말입니다. 
자연재해로 인하여 힘들어지는 일도 생기지만, 사실은 우리가 만든 ‘공업共業’의 결과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4. 낙화무념
낙화무념 / 詩   - 日月 현재호 -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비었거나
꽉 찬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콕. 콕. 쳐 봐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비었거나
꽉 찬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생을 시작하는 새싹도
생을 마감하는 단풍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비었거나 꽉 찬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무언無言을 좋아하는 그들은
말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뜻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말이란… 언어란… 누구에게나 다 있지만
각자 자기의 언어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속삭임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연은 벙어리라고 생각됩니다.
 
자연은 우리를 보고 말하겠지요
사람들은 벙어리인가 봐
말을 못 알아듣네
바보인가 봐.
우리의 삶이 괴로운 이유는
자연의 흐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흐름을 모르는 것은
그들의 무언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우매함 때문입니다.
떨어지는 낙엽의 무언을
이제…
지금쯤이면……
알아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낙화무념落花無念 (또는 落花無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은 말이 없다’ 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 아니라,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자연의 모습이며 그들의 그러한 행위는 어떤 결심도, 어떤 작심도, 어떤 계획도 없었고 다만, 스스로 그렇게 행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만의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언어가 필요 없이 스스로 그렇게 흘러간다는 의미에서 자연自然이며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대한 시스템인 대자연의 속성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시사합니다. 그 가르침이 바로 무정설법 아니겠습니까?
서로 살려고 아귀다툼하는 인간세상과는 사뭇 다른 자연의 행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진정한 불자라면 가슴 깊이 참회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스스로 가지를 들추어서 바람을 넣는 잎사귀, 그렇게 스스로 자살을 하는 ‘단풍’이라는 시스템. 선조들은 이미 그 원리를 알아채고 ‘단풍 풍楓’이라는 자를 구성했습니다. (나무가 바람을 넣어 삶을 마무리 한다는 의미로써…)
우리 몸속의 세포들도 때가 되면 스스로 자살합니다. 마치 프로그램에 의한 죽음 같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것을 PCD(Programmed Cell Death)라고 부릅니다. 그런 현상을 ‘아
토시스(Apoptosis : 낙엽이 스스로 떨어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라고 하지요. 그리고 새로운 세포가 싱싱하게 다시 태어나는 것 또한 프로그램처럼 정해진 순서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거의 늙지 않겠지요. 하지만 늙어가는 우리 인간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런 자연의 흐름을 우리는 용납하지도, 이해하지도, 공부하지도 않습니다. 자연에 위배된 사고방식, 자연에 위배된 식습관 그리고 인공으로 만든 음식들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세포는 이미 늙어 버린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지요.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자연의 가르침인 무정설법을 외면하고, 오로지 자신이 제일 최고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은 그렇게 멍들어 가는 것입니다. 조금은 더 성실하게, 조금 만 더 적극적으로 자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불자가 된다면 성불의 길도 단축되리라 여겨집니다.